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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노트] TV 없이 주말보내기

리처드 해밀턴의 ‘오늘의 가정을 그토록 색다르고 멋지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금요일 아침, 텔레비전을 켰는데 정지된 화면만 나온다. 찌는 더위 탓에 주말에는 텔레비전을 보며 소파에서 뒹굴뒹굴 시간을 보내려고 했는데, 고장이라니. 서비스 기사에게 제품명과 증상을 설명했더니 “오래된 거라 부품을 못 구해요. 곧바로 수리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라고 한다. 어떻게 할까? 나는 마음을 바꿔 먹었다. ‘차라리 잘됐다. 이참에 텔레비전을 완전히 끊어보자.’

금요일 늦은 오후, 책을 사려 헌책방에 갔다. 묵직한 고전은 사양한다. 짜릿한 장르소설도 좋지만, 느긋하게 읽히는 에세이가 낫겠다. 에세이 코너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비밀의 숲’을 발견했다. 하루키의 에세이는 다 읽었다고 여겼는데, 이건 읽지 않았다. 책날개에 박힌 하루키의 사진을 보고 웃음이 빵 터졌다. 지금 그의 나이 69세라고 하는데, 이건 뭐야. 짧은 폴로셔츠를 입고 어깨에 스웨터를 걸친 채 고양이를 안고 있는 푸릇한 얼굴이라니. 바로 구매 결정.

일요일 아침, 책상에 앉아 눈을 감고 기도를 한다. 그런 뒤 김치냉장고에 넣어둔 커피콩을 꺼내 핸드밀로 간다. 프렌치 프레스로 커피를 만들려면 조금 굵게 갈아야 한다. 커피가루에 뜨거운 물을 붓고 막대로 휘휘 젓고 5분 기다리면 완성. 인터넷신문을 읽으며 커피를 마신 뒤 피트니스센터에 가서 운동하고 돌아오니 벌써 오후다. 클래식 에프엠을 틀어놓고 금요일에 산 에세이를 계속 읽는다. 그런데 얼마 못 가 졸음이 밀려온다. 잠깐 자고 일어났더니 벌써 저녁 먹을 시간. 나는 밥을 하고, 아내는 반찬을 만든다. 설거지까지 마치니 어느덧 밤이 되었다.

평소 같으면 텔레비전으로 ‘효리네 민박’을 보면서 ‘아, 제주도에서 살고 싶다’며 몽상에 젖어 있을 시간이다. 참아보려 했지만 금단 증상이 슬금슬금 일어난다. 버텨보려고 책을 읽어도 집중이 안 된다. ‘지난주에 그 프로그램이 어떻게 끝났더라’ 하며 딴생각이 자꾸 든다. ‘에이 그러면 그렇지, 텔레비전을 완전히 끊고 어떻게 사냐!’ 인내력은 여기까지, 바로 인터넷 티비 온! 컴퓨터 모니터에서 흘러나오는 제주살이를 보며 실실 웃고 있다. 나의 텔레비전 보지 않고 주말 보내기는 이렇게 사흘을 못 버티고 끝나고 말았다.

김병수(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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