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경제 이끄는 강소기업] 代 이은 ‘한국 한지’ 명가… 바이오 진출 재도약 꿈꿔

대를 이어 반세기 넘게 전주한지를 생산하고 있는 천양P&B㈜는 우리나라 한지업체의 최대 규모이자 자존심이다. 최영재(오른쪽 여덟 번째) 대표와 직원들이 수제한지실에서 한지벽지 등 생산품을 들고 포즈를 취했다(맨위 사진). 아래 왼쪽부터 집채만한 기계가 가동중인 천양P&B㈜의 기계한지실, 천양P&B㈜ 전시장에 놓여 있는 색지한지,1985년 전주 흑석골 공장에서 손으로 전통한지를 만드는 직원들 모습. 김용권 기자, 천양P&B㈜ 제공
 
최영재 대표


지난 5월말 전북지역에 낯설지만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세계 3대 박물관인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이 소장한 문화재 복원에 전주한지(韓紙)가 사용됐다는 뉴스였다. 루브르박물관은 1951년부터 간직해온 문화재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앙 2세 책상’을 복원하는데 전주한지를 사용했다. 그간 세계 문화재 복원시장은 일본 화지(和紙)가 독점해 왔다.

전주시는 “박물관측이 가구 복원에 전주한지를 선택한 이유를 접착력과 가벼움, 강도, 치수안전성, 상대적 투명성 면에서 굉장히 섬세한 복원에 적합하기 때문이라고 전해왔다”고 말했다. 그 전주한지의 중심, 우리나라 한지의 세계화에 앞장서고 있는 회사가 바로 ‘천양P&B㈜’다.

4년 전 종이·바이오 전문회사 목표

천양P&B㈜는 우리나라 전통한지의 자존심이자 명가다. 대(代)를 이어 반세기 이상 전주는 물론 대한민국 한지의 명성을 이끌어왔다.

천양은 최장윤(87)씨가 1966년 ‘호남제지’란 이름으로 창업했다. 1982년 기계한지 회사인 천양제지를 함께 연 뒤 1995년 ‘천양제지’로 합병했다. 아들 최영재(51)씨로 이어지며 국내 최대 한지업체의 자리를 굳건히 하고 있다.

4년 전 종이(Paper)와 바이오(Bio) 전문회사로 재도약을 꿈꾸며 천양P&B로 사명을 바꿨다. 본사는 전주 한옥마을 안에 있다. 지난달 30일, 완주군 소양면에 있는 공장 취재에 나섰다. 20여 년 만에 다시 찾은 발길이었다. 곳곳을 둘러보는데 한 창고에 들어서 있는 집채만한 기계가 보는 이를 압도했다. “현재 한지 생산의 90%는 대형 기계를 통해서 이뤄지고 손길이 많이 가는 전통방식은 10%도 안된다”고 하성주(50) 팀장이 설명해줬다.

1990년대 중반 기계화 적극 나서

천양의 전성기는 1970년부터 1990년 초반이었다. 전주한지의 본고장인 ‘흑석골’을 비롯해 인근에 4개의 공장을 운영했다. 직원만도 250명에 이르렀다.

“당시 서울 인사동 상인들이 차를 대기하고 기다릴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고 합니다. 모두 현금을 싸들고 왔다고 하지요….”

김재용(65) 공장장은 “‘참말로 신바람 내며 일할 때였다’라고 들었다”고 전해준다. 일본과 대만에 수출도 이어져 1993년 한지업체로는 처음으로 ‘100만 달러 수출탑’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값싼 중국산에 밀려 한지업체들은 날이 갈수록 뒷걸음쳤다. 한때 100개가 넘던 전주한지 업체는 지금 7곳만 남았다. 원주와 안동의 한지업체들을 합쳐도 30곳이 안 된다. 그마저 연 매출이 30억 원을 넘는 곳은 한 곳도 없다. 천양도 직원이 24명으로 줄었다.

1990년대 중반, 힘겨운 상황이었지만 천양은 자기 계발을 계속해 나갔다. 국내시장으로 눈을 돌리고 발 빠르게 기계화에 나섰다. 화선지류에서 인쇄용과 건축용 한지 분야로 생산품목을 전환했다. 색지 한지를 비롯 벽지 한지, 장판용 한지를 잇따라 개발했다. 2008년엔 한지벽지 최초로 친환경인증을 받았다.

이 회사의 한지가 유엔 사무총장 관사의 영빈관을 장식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천양은 2008년 미국 뉴욕에 있는 반기문 사무총장의 내빈 숙소 벽지와 장판 등을 꾸며 세계적인 관심을 받았다.

3년 전 조선왕조실록 전주사고본 복본화 사업에도 전주시내 11개 회사와 함께 참여했다. 더불어 해외에서 열린 전시회에 잇따라 참가해 ‘한스타일’을 알리는 데 앞장섰다.

2007년 한지기업 첫 R&D센터

천양은 2007년 한지기업으로서는 최초로 연구개발(R&D)센터를 설립했다. 이후 한지의 물성 연구와 닥나무 천연 추출물의 효능 연구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연구개발 능력을 바탕으로 천양은 4년 전 바이오 분야로 사업을 확장했다. 하성주 팀장은 “닥나무 추출물을 활용하여 천연비누와 화장품, 바디용품 등을 출시했으며 그 외 다양한 연구를 진행중”이라며 “모두 미래 경쟁력 확보를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전통은 영원하다.’ 수제한지실 벽에 내걸린 문구를 보며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부심과 사명감을 잃지 않고 있는 천양 가족에게 조용히 응원의 박수를 보냈다.

■ 최영재 대표
“천년 가는 한지 우수성 세계에 알려야지요”


“최고의 한지 제품 생산은 물론, 세계에 우수성을 알리는 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최영재(51·사진) 천양P&B㈜ 대표는 평소엔 과묵하지만 ‘한지’ 얘기만 나오면 서너 시간이 짧을 정도로 애정을 쏟아낸다.

최 대표는 1991년 군 제대 후 부친의 뜻을 이어 한지의 길로 들어섰다. 보일러와 폐수, 초지실 등을 거치고 영업과 경영 업무를 익힌 뒤 2005년 대표이사를 맡았다. 이후 연구 개발과 사업 영역을 넓히는 데 힘을 쏟았다.

“아들이 어릴 적 아토피가 심했어요. 주변에서 한지벽지가 좋다는 말을 듣고 벽지 개발에 몰두하여 아들 방에 시공하고 큰 효과를 봤습니다.”

이후 벽지는 물론 닥나무를 이용한 비누와 스킨 등의 개발에 성공했다. 그는 “4년 전 전북도로부터 ‘장수기업 1호’ 표창을 받았어요. 무척 기뻤습니다. 뭔가 효도를 한 것 같았죠”라고 말했다.

부인 김미숙(51)씨는 인생의 반려자이자 사업 동반자다. 최 대표는 부인과 함께 전통 계승과 사업 다변화는 물론 많은 전시회에서 ‘전주한지’를 맘껏 자랑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인쇄시장 쇠퇴와 경기침체로 인한 경영난을 벗어나지 못할 때는 절망감이 컸다.

“어두운 터널 안에 갇힌 느낌이었어요. 중소기업 운영에 한계가 보이고 슬럼프에서 벗어나질 못했어요.”

최 대표는 “사명감으로 운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나, ‘사회봉사’를 하겠다는 젊을 적 꿈을 되새기며 생각을 바꾸니 조금 나아졌다”고 회고했다.

2년 전 입사한 딸 수연(23)씨가 최 대표의 든든한 응원군이 되고 있다. 한국화와 경영을 전공한 수연씨는 상품기획과 수출업무를 맡고 있어 3대 기업에 대한 기대를 낳고 있다. 천년을 가는 한지처럼 가업을 발전시키고 후대에도 이어질 수 있게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최 대표는 “언젠가 한지의 모든 것을 보여줄 수 있는 박물관을 만들어 ‘한지? 한지를 보려면 전주로 가야지∼’라는 공식을 만들고 싶다”며 환하게 웃었다.

전주=김용권 기자ygkim@kmib.co.kr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플러스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