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승림의 인사이드 아웃] 콩쿠르, 음악으로 경쟁하는 이유


 
지난 6월 9일(현지시간) 미국 텍사스주 포스워스에서 열린 제15회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 결선에서 선우예권이 연주하고 있다(왼쪽 사진). 10일 시상식에서 한국인 최초로 우승을 차지한 선우예권이 눈물을 닦고 있다.반 클라이번 콩쿠르 홈페이지


문화사학자 요한 하위징아는 1938년 ‘호모 루덴스’란 저서를 출판했다. ‘놀이하는 인간’이란 의미의 제목은 문화가 인간의 놀이로부터 시작돼 놀이를 통해 발전한다는, 문화가 곧 놀이라는 획기적인 주장을 담았다. 저자는 놀이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로 ‘아곤(agon)’을 들었다. ‘경쟁’을 뜻하는 이 그리스어는 겨루는 행위자, 응원하는 관객, 이들을 통제하는 질서(규칙)를 포함한다. 나아가 아곤을 통해 놀이는 긴장과 즐거움이 가득한 축제를 거쳐 정신이 고양되는 신성한 의식으로 발전한다.

스포츠뿐 아니라 예술에도 아곤이 존재한다. 사실 인류는 오래 전부터 예술 분야에서 아곤을 즐겨왔다. 기원전 6세기 고대 그리스 도시들은 축제에서 음악 노래 연극 시합을 벌여 가장 잘 하는 사람에게 상을 줬다. 이 시합은 중세까지 이어져 도시 최고의 명가수를 뽑는 대회로 진화했다. 바그너의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는 이 대회를 소재로 한 음악극이다.

18세기 유럽의 유명 라이벌 음악가들이 대중 앞에서 벌인 연주 배틀도 빼놓을 수 없다. 헨델과 스카를라티는 하프시코드로, J.S. 바흐와 루이 마르샹은 오르간으로, 그리고 모차르트와 클레멘티는 피아노로 대결한 기록이 남아 있다. 그들의 대결은 기교적 승부를 넘어서 사회적·정치적 맥락으로 이해됐다. 이탈리아 출신 클레멘티에 대한 빈 음악가 모차르트의 승리는 로마 교황청에서 합스부르크 왕가로 이전된 유럽 지배권을 상징했다. 19세기 평민 출신 리스트가 귀족 탈베르크를 이긴 피아노 대결은 재능이 혈통을 제압한 상징적 사건이었다. 이후 위대한 음악가는 귀족 못지않은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음악계의 아곤은 근대에 이르러 콩쿠르로 진화했다. 1886년 러시아 피아니스트 안톤 루빈슈타인은 자신의 이름을 딴 역사상 최초의 콩쿠르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개최했다. 당시 그는 올림픽처럼 콩쿠르를 5년마다 다른 도시에서 개최하려고 했지만 러시아 혁명 때문에 4회 만에 꿈을 접어야 했다. 대신 나움버그 콩쿠르(1926년), 쇼팽 콩쿠르(1927년), 퀸엘리자베스 콩쿠르(1937년)등 여러 유명 콩쿠르들이 우후죽순처럼 조직됐다.

냉전시대 미국과 소련은 콩쿠르를 이용해 각 체제의 문화적 우월성을 증명하고자 했다. 1958년 먼저 차이콥스키 콩쿠르를 창설한 소련은 자국에서 첫 대회의 우승자가 나오길 기대했다. 하지만 승리는 적대국인 미국에서 온 23세의 피아니스트 반 클라이번에게 돌아갔다. 이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1962년 그의 이름을 딴 대회가 미국에서 창설됐다. 바로 올해 선우예권이 한국인 최초로 우승한 반 클라이번 콩쿠르다. 국가가 주도해서 만든 차이콥스키 콩쿠르와 달리 연주자의 고향 포트워스의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성금을 걷어 만들었다. 시민주의 정신을 동반한 반 클라이번 콩쿠르는 미국 최고 권위의 대회로 폭풍 성장했다. 연주자에게 다양한 특전이 주어지는 것으로 유명해서 경쟁이 치열하다.

심사 비리가 적발되고, 기교에 적용되는 엄격한 규칙이 참가자들의 상상력과 예술성을 저해한다는 비판이 제기됨에도 불구하고, 콩쿠르에서 ‘아곤’의 기능은 여전히 건재하다. 그동안 콩쿠르 상금으로 생계를 유지해온 선우예권의 뒷얘기는 그가 결선에서 연주한 라흐마니노프 협주곡만큼 심금을 울렸다. 또 심사위원들이 꺼릴 만큼 파격적인 개성을 선보이며 준결승에서 탈락한 김다솔의 연주는 기득권에 대한 건강한 도전이었다. 이렇듯 대중의 정서를 직관적으로 자극하는 젊은이들의 존재를 발굴한 것만으로도, 콩쿠르는 아직 존재의 이유가 있다.

노승림<음악 칼럼니스트·문화정책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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