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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길] 여인들이 목격하고 살아낸 6·25전쟁

봇짐을 머리에 이거나 등에 진 피난민들이 1950년 8월 강을 건너고 있다. 치마를 허벅지까지 걷어 올린 여인들이 보인다. 에피파니 제공
 
민명기 지음/문예중앙/276쪽/1만5000원
 
강인숙 지음/에피파니/376쪽/1만8000원


전쟁은 갑자기 삶에 들이닥친 재앙이었다. 전장의 남자들이 총을 들고 싸우는 동안 여자들은 총탄을 피해 피난을 갔고 거리에서 양식을 구해야 했다. 여인들이 목격하고 살아낸 전쟁을 담은 신간 두 권이 나왔다. 6·25전쟁 기념일을 앞두고 나온 소설 ‘하린’(문예중앙)과 에세이 ‘어느 인문학자의 6·25’(에피파니)다.

‘하린’은 을사조약 체결에 항거해 자결한 충정공 민영환의 증손녀 민명기(72)씨가 어머니 김성린(1921∼2003)의 삶을 토대로 쓴 실화소설이다. 충정공의 종손부(맏손자의 아내)이자 고종황제의 처조카딸이었던 김성린이 주인공 하린의 모델이다. 하린은 고모인 고종황제의 마지막 왕비 정화당 손에 자랐다. 그녀는 충정공의 손자와 혼인을 하기로 돼 있었다.

하지만 웬일인지 혼사는 계속 미뤄진다. 하린은 충정공의 손자 병수(실명 병철·1917∼1947)에게 편지를 쓴다. ‘민군 보옵소서. …감히 붓을 든 저는 군과 수년 전 혼인의 가연을 맺기로 언약이 된 김하린이라고 하옵니다. …혼인을 정하고 8년이라는 긴 세월을 이렇게 연년이 미루신 군의 본뜻을 감히 여쭙고자 글월 보냅니다.’(34∼35쪽)

망한 집안에 아내 들이기가 미안했던 병수는 이 편지를 받고 마음을 돌린다. 해방되던 해 둘 사이에 딸 은기(저자 민명기)가 태어나지만 이태 뒤 병수는 차 사고로 숨진다. 하린은 그 뒤 바느질로 가족들을 먹여 살리고 피난 가서는 버선을 팔아 살아 나간다. 지아비를 잃고 외동딸을 키우며 전쟁과 혼돈의 시기를 살아낸 반가(班家)의 여인.

하린을 통해 일제강점이 불러온 양반가의 몰락과 전쟁으로 흔들린 삶의 뿌리를 볼 수 있다. 작가는 22일 국민일보와 통화에서 “애처로운 어머니의 삶을 그려보고 싶었다”며 “왕가와 인연 있는 가문에 태어난 여인들의 삶은 더 가혹했다”고 말했다. 이 소설에서 하린을 사모한 한 선생 이야기는 허구이지만 나머지는 대부분 사실이다.

‘하린’에서 전쟁이 명문가 종부에게 주어진 고난의 배경이라면 ‘어느 인문학자의 6·25’에서 전쟁은 민족 전체를 수난으로 몰아넣는 비극으로 묘사된다. 저자 강인숙(84) 건국대 명예교수 가족은 전쟁이 나던 1950년 6월 25일 손수레에 세간을 싣고 한강변 이촌동으로 이사를 했다. 어머니가 생계를 위해 강가에서 오리를 기를 계획을 세웠기 때문이었다.

사흘 뒤다. “많은 차들이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강)철교 중간 어느 지점에 다다르면 약속이나 한 듯 헤드라이트들이 꺼져버리는 것이다. 필름이 끊기듯이 깔끔하게….”(44쪽) 다음 날에야 한강철교가 폭파된 걸 모르고 달리던 차들이 밤새 강으로 곤두박질 쳤던 것을 알게 된 소녀는 기겁한다.

그의 가족은 경기도 광주 정자리로 피난갔다가 인민군과 국군의 총격전 한 가운데 선다. 소녀는 소년병들이 물놀이 하는 것을 보다가 민족끼리 비극적 전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그들은 함경도 사투리를 쓰고 있었다. …반가워서 말을 걸려는 순간, 나는 그들이 바로 조금 전까지 우리 군대와 싸운 인민군이라는 것을 깨달았다.”(64쪽)

불에 타버린 분당리 마을에서 수백 개 장독의 장이 끓는다. “분노 같기도 한 그 무엇이 솟구쳤다”고 기억한다. 열여덟 살 소녀의 눈에 비친 전쟁의 참화가 생생하다. 책에는 서울대 국문과 동기로 만난 남편 이어령(83) 박사 얘기도 있다. 이 박사가 그녀에게 쓴 첫 편지는 “30도의 술에 취하여 이 글을 쓰오”로 시작됐다.(288쪽)

전쟁 땐 모두 살아남기 위해 서로를 경계했고 남의 것을 훔쳤다. 두 여성의 전쟁 이야기는 그 시대를 산 모든 어머니의 삶에 연결되는 기록이다. 이 기록은 소용돌이치던 민족의 역사로 수렴되면서 전쟁과 분단이 지금 우리 삶에도 작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전쟁을 기억하는 시간, 가만히 열어볼 책이다.

강주화 기자 rul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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