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신상목] 유일한 위로



2000년 기독교 역사는 박해와 순교로 점철돼왔다. 초기 300년간 일어난 대박해는 로마제국 시기에 10차례에 걸쳐 발생했다. 첫 박해는 AD 67년 로마의 여섯 번째 황제인 네로 치하에서 시작됐다. 폭군이었던 그는 자신이 구상하는 신도시 건설을 위해 로마시내에 불을 질렀다. 대화재는 장장 9일간 이어졌고 이 모든 비난의 화살을 기독교인에게 돌렸다. 이 과정에서 사도바울과 베드로가 순교한 것이다. 사도바울은 참수형을,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렸다.

사도요한은 로마로 소환돼 기름이 끓는 가마에 던져졌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났다고 한다. 이후 밧모섬으로 유배됐고 거기서 요한계시록을 남겼다(계 1:9). 요한은 계시록에서 모든 악의 세력이 종국적으로 패배할 것을 예언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이 묵시를 읽으며 희망을 품었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극심한 박해를 받은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主)’로 불렀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은 신(god)으로 숭배 받던 로마 황제 대신 그리스도(God)를 주로 고백했다. 안티오키아의 주교였던 이그나티우스는 이 혐의를 받아 로마로 압송돼 콜로세움에서 맹수들의 먹이가 됐다. 그는 체포될 때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하나님의 밀알이 되어 맹수(로마)의 이빨에 갈려 그리스도의 생명의 떡으로 발견될 것이다.”

서머나교회의 감독 폴리카푸스는 기독교를 포기하면 목숨을 살려주겠다는 총독의 회유에 “내가 86년간 섬겼던 주님은 어떤 해도 끼치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런 구세주를 모욕할 수 있겠느냐”며 화형을 당했다. 그가 사망하자 당시 ‘교회의 아버지’로 불리던 테르툴리아누스는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 되었다”고 말했다.

초기 신자들의 삶은 콜로세움과 카타콤으로 대변된다. 흔히 땅 위에서의 박해와 땅 아래에서의 기도로 불린다. 카타콤은 박해를 피한 기독교인들의 지하 은신처이자 예배장소, 그리고 무덤이었다. 로마 근처에만 60여개가 발견됐고 지하 통로를 모두 이으면 965㎞나 됐다. 지하도 높이는 2.4m, 폭은 1.5m가량 됐고 한쪽 면에는 층층이 쌓인 낮은 천장의 방으로 구성돼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곳은 무덤이었는데 시체를 안치하고 대리석판과 타일로 막았다고한다. 이 대리석판과 타일에는 비문과 상징이 새겨져 있다. ‘순교자 열전’을 쓴 영국의 청교도 작가 조지 폭스는 카타콤을 이렇게 자세히 설명했다.

“무덤을 파헤치면 유골이 이야기를 들려준다. 머리는 몸에서 분리돼 있고 갈비뼈와 어깨뼈는 부서지고, 남은 뼈마저도 불에 시커멓게 탄 경우가 많다. 유골은 이렇게 무시무시한 박해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비문은 평안과 기쁨, 승리감에 차 있다. 가장 흔한 카타콤 벽화에는 선한 목자가 어깨에 양을 메고 있는 모습과 하프 닻 면류관 포도나무 물고기를 싣고 항해하는 배가 그려져 있다.”

끔찍한 박해 이야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미국 해외선교연구센터(OMSC)가 펴내는 국제선교통계보고서(IBMR)는 2015년에만 9만여명의 기독교인이 자연재해와 질병, 내전, 정치·종교적 이유로 사망했다고 보고했다.

로마 박해의 21세기 버전은 이집트 콥트 기독교이다. 지난달 26일 발생한 콥트교도에 대한 버스테러는 1세기 사도마가의 선교 이후 점철돼온 쓰라린 고난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버스테러로 숨진 사람들의 장례를 치르면서 찬송을 불렀다. 가사는 그들을 에워싼 이슬람교 환경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신(god)이 아니라 하나님(God)만 섬기네.” 지난달 파키스탄에서 납치돼 살해된 것으로 알려진 중국인 교사 2명도 순교의 길을 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개혁교회의 대표 신앙고백서 중 하나인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사나 죽으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인가”를 묻는다. 답의 첫 문장은 이렇다. “나는 내 것이 아니고 사나 죽으나 몸과 영혼이 나의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신상목 종교부 차장 smsh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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