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찬 심진경의 명작은 시대다] 불타는 책





출간 자체가 하나의 사건이 되는 책이 있다.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고 그리하여 세상을 움직이는 그런 책. 읽은 이의 삶을 통째로 뒤바꾸고 그렇게 한 시대의 뜨거운 상징으로 살아남는 그런 책. 1983년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제목을 달고 나온 ‘전태일 평전’이 바로 그런 책이다. 이 책은 시대의 한가운데서 불타오른 하나의 사건이다. 소설이 아직 숨 가쁜 현실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을 때 수기와 르포르타주 같은 증언문학은 기층민중과 노동자의 현실을 증언하고 고발하는 중요한 미디어로 기능했다. 80년대 초 이 책은 그렇게 세상에 던져졌다.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 전태일 평전’(이하 ‘전태일 평전’)은 1970년 11월 13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분신한 청계피복 노동자 전태일(1948∼1970)의 일대기를 그렸다. 76년 완성되었지만 출판 검열로 한국에서 발표되지 못한 이 책은 78년 일본에서 먼저 ‘불꽃이여 나를 태워라’라는 제목으로 출간된다. 한국에서는 83년에 이르러서야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나왔다. 그간 숨겨져 있던 저자가 인권변호사 조영래였다는 사실은 91년 ‘전태일 평전’이라는 제목으로 개정판이 나오면서 비로소 세간에 알려진다.

‘전태일 평전’은 전태일이 남긴 대학노트 세 권 분량에 담긴 일기와 수기, 그리고 짧은 습작소설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그의 삶과 죽음의 기록이다. 이 책은 ‘평전’의 형식을 취했지만 그 자체로 뛰어난 하나의 문학작품으로도 읽힌다. 시와 소설로 나뉘는 엄격한 장르적 기준을 적용한다면 이 책은 당연히 문학작품이라 할 수 없다. 그러나 ‘전태일 평전’은 오히려 그런 경직된 문학의 범주를 초월한다. 이 책은 일기 수기 증언 르포르타주 자서전 등 온갖 잡다한 장르들의 몽타주다. 그 다양한 비문학적 형식들의 조합과 배치, 장르의 교차와 혼합이 창조해낸 것은 전태일의 삶과 죽음이라는 입체적 드라마다.

산업화 시대 한국의 비참한 노동 현실 속에서 분투하다 자기 몸을 불사른 전태일의 눈물겨운 고뇌와 희생적 삶의 드라마. 당시 많은 이들이 이 드라마에 몰입해 눈물을 흘렸고 감동을 받았다. 그 감동은 노동자의 열악한 현실의 개선을 위해 자기를 헌신하고 불사른 전태일의 자기희생적 삶에 대한 뜨거운 공감에서 오는 것이었다. ‘전태일 평전’은 그 사실 자체가 주는 감동을 실제 기록의 재구성과 효과적인 배치를 통해 증폭하는 숭고한 자기희생의 드라마를 완성한다.

“대학생 친구가 하나 있었으면 원이 없겠다.” 이는 전태일이 전문적인 법학개념과 법률용어가 많이 나오는 ‘근로기준법’ 책을 혼자서 깨우치려 애쓰면서 수없이 되뇌던 문장이다. “학력이 초등학교 과정과 중등 정도의 공민학교를 포함해 3년 남짓 다닌 것밖에 없는” 전태일의 절망과 소망이 담긴 저 문장은 많은 이들이 ‘전태일 평전’에서 가장 사무치게 기억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70년 전태일 분신 사건은 당시 대학과 지식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 충격의 이면엔 대학생이고 지식인이라면 마땅히 알았어야 할 참혹한 노동현실을 알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우리 사회의 약자를 미처 돌보지 못했다는 죄의식이 있었다. ‘전태일 평전’의 드라마는 이 윤리적 죄의식을 시간을 뛰어넘어 환기하고 증폭했다. 이 책이 환기한 윤리적 죄의식은 당시 대학생들이 전태일의 삶에 공감하고 더 나아가 그런 자기희생적 삶을 실천적으로 모방하게 하는 동력으로 작용했다. 일례로 진보정당 대표 심상정은 서울대 재학시절에 ‘전태일 평전’을 읽고 큰 충격을 받고 노동운동의 투사가 되었다고 고백한다. 80년대의 많은 대학생들이 그러했다. 전태일의 비극적 삶과 죽음의 기록이 당시 대학생들의 의식과 삶의 행로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전태일 평전’은 총 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태일의 기록은 자기 삶을 옥죄었던 지배자의 언어를 벗어던지고 윤리적 주체로서 자기 삶의 서사를 새롭게 쓰고 완성하기까지의 고통과 고뇌와 역경을 오롯이 보여준다. 어린 시절을 다룬 1장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에서는 전태일이 평화시장에서 ‘청년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을 자각하는 일련의 과정을 다룬다. 전태일의 서사는 우리에게 익숙한 성공신화가 얼마나 허구적인 서사인지, 아울러 “개천에서 용 난다”거나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한다” 등과 같은 말이 얼마나 실현 불가능한지를 뼈아프게 폭로한다. 근대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던 60∼70년대를 지배했던 마스터플롯은 성공의 서사였다. 당시 대중을 사로잡았던 서사는 가난한 시골 청년이 서울에 와서 낮에는 공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밤에는 야간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해서 성공했다는 이야기다. 가난한 촌년과 촌놈이 성공하려면 배워야 한다. 그러나 전태일은 깨닫는다. ‘배움=성공’이라는 논리는 박정희 개발독재의 시대에 못 배우고 가난한 자들을 개발의 전쟁터에 동원하기 위한 허구적인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것이었다.

‘전태일 평전’은 이러한 성공의 서사를 역행하는 실패의 서사다. 즉 그것은 성공의 의미를 반성하고 역전시키는 숭고한 실패의 서사다. 전태일도 한때는 배우기만 하면 성공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검정시험을 준비하지만 곧 포기한다. 커피 한 잔 값밖에 안 되는 일당을 받으며 하루에 14∼15시간씩, 바쁠 때는 잠 안 오는 약을 먹으면서 3일 이상 버텨야 하는 노동자들에게 공부는 사치였다. 그러다가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착취당하는 어린 소녀들을 목격한 뒤, 전태일은 비로소 어린 시절부터 좇았던 성공이라는 가치와 신념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며 이를 포기한다. 타인의 고통을 직면한 뒤에야 비로소 그는 폐쇄된 자아의식에서 벗어나 자아를 그 바깥의 세계로 확장한다. 그것은 그에게 “좁은 자아의 환상을 버리고, 그 껍데기를 깨고, 자신과 이웃과 세계에 대한 참되고 순수한 관심의 햇살이 비치는 곳”으로 나아가는 과정으로 묘사된다.

이제 전태일에게 타인은 더 이상 타인이 아닌, 자기 존재의 일부다. 그는 그렇게 세계 속으로 걸어 들어가 세계의 고통을 앓는 존재가 된다. 그리하여 피를 토하면서 쓰러진 여공과 막노동판에서 버림받은 밑바닥 인생은 그에겐 단순히 고통 받는 타인이 아니라 “위로해야 할 나의 전체의 일부”로 들어온다. 70년 8월 9일, 서울 삼각산의 임마뉴엘 수도원 건설 현장에서 잡역부로 일하던 전태일은 결단을 내린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이 재단사로 일하던 평화시장으로 돌아가기로 한다.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각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생을 두고 맹세한 내가, 그 많은 시간과 공상 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 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을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오랜 방황과 고민 끝에 전태일은 ‘불쌍한 형제, 어린 동심, 나약한 생명체들’ 곁으로 돌아가 “나약한 나를 다 바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그는 자기를 불사른다. 이 자기희생의 결단을 가능케 한 힘은 무엇인가? 무엇이 그를 숭고한 주체의 길로 이끌어가는가? ‘전태일 평전’의 저자는 답한다. 그것은 죄의식의 윤리다.

‘전태일 평전’은 세 겹의 죄의식으로 둘러싸여 있다. 전태일과 작가 조영래, 그리고 작품이 일깨우는 독자의 죄의식이 각각 그것이다. 가장 안쪽에는 전태일의 죄의식이 있다. 고된 노동 때문에 사지가 마비되고 각혈로 죽어가는 어린 소녀들, 즉 노동 피라미드의 최하층을 차지하는 시다들에 대한 전태일의 죄의식. 물론 그는 이들에게 어떤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다. 잘못은 가장 기본적인 근로기준법조차 지키지 않는 자본가와 그런 자본가의 노동착취를 묵인하는 국가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죄의식을 느낀다. 내 잘못은 아니지만 내 책임이다. 그는 그렇게 고통스러운 죄의식을 스스로 짊어진다. 전태일의 드라마는 자기희생을 통해 이 죄의식의 윤리를 완성하는 숭고한 주체의 드라마다.

이러한 죄의식의 감각은 이 책의 저자이자 서술자인 조영래에게서도 반복된다. 본시 평전은 한 인간의 삶을 객관적으로 서술하고 의미화하는 장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태일 평전’에서는 작가와 대상(전태일) 사이의 비평적 거리는 자주 무화된다.

급기야 전태일이 근로기준법 책과 함께 스스로를 불태운 70년 11월 13일을 다룬 마지막 장에서, 작가는 서술자의 객관성을 잃고 대상에 완전히 동화되고 빙의된다. 그 지점에서 조영래와 전태일의 언어는 하나가 된다. 그 동화와 뜨거운 감정이입이 보여주는 것은, 세계의 고통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짊어진 전태일의 죄의식과 자기희생의 다짐이 저자에게까지 감염되는 사건이다.

감염되는 건 저자만이 아니다. 이러한 죄의식의 감정이입과 동화는 ‘전태일 평전’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공히 일어나는 사건이다. ‘전태일 평전’은 그 세 겹의 죄의식이 창조하는 살아있는 텍스트다. 이것이 만들어낸 것은 일종의 ‘죄의식의 공동체’다. 이 책을 읽는 경험은 그 ‘죄의식의 공동체’에 참여하고 그 윤리적 거울을 통해 자기 자신을 비추어보는 반성적 경험이다. 이 책이 세월을 뛰어넘어 현실 속에서 끈질긴 생명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거기에 있다.

◆조영래(1947∼1990)

장기 수배 중 집필… 독재시대 밝힌 인권 변호사


인권변호사이자 ‘전태일 평전’의 저자다. 그의 생애는 불의에 저항하고 약자를 돌보는 데 바쳐졌다. 서울 경기고 3학년이던 1964년, 6·3항쟁을 주도하고 정학처분을 당했지만 다음해에 서울대 전체수석으로 법대에 입학한다.

서울대 재학 중에도 한일회담 반대, 3선 개헌 반대 등의 학생운동을 주도했다. 71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연수원에 들어갔지만 사법연수원 재직 중에 서울대생내란음모사건으로 구속되어 1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는다. 출소 후에도 민청학련 관련자로 수배되어 6년간 피신했는데, 그때 같은 사건으로 수배 중이던 장기표를 통해 전태일의 어머니에게 전달받은 그의 수기를 중심으로 전태일 평전을 집필한다.

이 책은 76년 초고가 완성되었지만 83년이 되어서야 국내에서 처음 출간된다. 출간 당시 저자가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조영래가 저자였다는 사실은 그가 사망한 그 다음해인 91년에 개정판이 발간되면서 비로소 알려진다. 그는 83년에 시민공익법률사무소를 설립한 후부터 본격적으로 우리 사회의 약자들, 예컨대 빈민 노동자 여성의 편에서 변론 활동을 시작한다. 84년 망원동 수해 주민들의 집단 손해배상청구소송, 86년 여성 조기정년제 철폐소송, 87년 상봉동 진폐증 사건, 86∼88년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등이 있다. 90년 43세의 이른 나이에 폐암으로 사망했다.

<문학평론가 김영찬>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플러스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