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승림의 인사이드 아웃] 지휘자의 리더십과 미학적 도덕성




현대사회에서 지휘자의 입지는 음악에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악단을 넘어서 활동하는 도시와 나라를 대표하는 사회적 문화적 상징으로 부각됐다. 미국 지휘자 건서 슐러는 이런 지휘자에게 필요한 덕목 세 가지로 재능 기술 그리고 미학적 도덕성을 꼽았다. 이중 미학적 도덕성은 지휘자를 사회와 연결시키는 문화적·윤리적 리더십의 고리이다. 지휘자는 그가 사는 세상의 지도자 상을 비추는 거울이다. 그래서 그들의 변화된 모습은 음악이 아닌 사회와 도덕의 본질을 나타낸다.

실제로 거장 지휘자의 신화가 각 시대에 따라 다르게 요구되던 이상적인 정치적 지도자의 성격과 맞물려 변화해온 것은 오케스트라가 사회로부터 고립된 집단이 아님을 방증한다. 개인보다 집단이 더 중시되고 일사불란한 단결이 요구되는 냉전 시대에는 제왕적 카리스마를 뽐내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나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같은 지휘자가 세를 떨쳤다. 마거릿 대처 전 영국총리는 카라얀의 절대 권력을 공공연하게 질투했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수세에 몰려 있던 닉슨은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감독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에게 하소연하는 편지를 썼다.

포디엄 위의 독재 패러다임은 그러나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카라얀을 비롯한 절대 권력자들의 서거와 더불어 소멸됐다. 카라얀에 이어 단원 투표로 베를린필의 새 예술감독으로 선출된 클라우디오 아바도는 민주주의적 전환을 알리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악단 운영은 물론 해석까지도 단원들의 의견을 경청하던 아바도는 단원들 사이에서 마에스트로 대신 스스럼없이 이름으로 불리며 권위를 내세우지 않았다.

이런 국제적인 분위기와 비교할 때 한국 악단은 아직 냉전시대의 낭만적 독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여전한 지휘자와 단원 사이의 상명하복 관계는 단원들 중 상당수가 대학시절 지휘자의 학생이었던 과거 교육 시스템의 연장선상에서 해석 가능하다. 반대로 최희준 성시연처럼 젊은 해외 유학파 지휘자들의 리허설 테크닉은 더욱 민주적이고 유연하다.

최근 지휘자의 비극적 사임으로 끝난 수원시향 사태는 인권에 대한 감수성의 세대 차이를 넘어서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드러냈다. 자신의 무례를 인정하고 직접 공개 사과까지 한 지휘자를 단원들은 결국 받아들이지 않았다. 김대진이 음악감독으로 재임한 9년 여 동안 수원시향이 지휘자의 역량 덕에 그 어느 악단보다 남다른 성장과 성취를 누렸음은 자타가 공인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정작 단원들의 상당수는 그 성취와 성장에서 정작 자신들은 소외되었다고 주장했다. 단원들의 급여가 시의회에 발목을 잡혀 10년 째 동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영국 평론가 노먼 레브레히트는 이를 가리켜 지휘자와 오케스트라 간의 유대감을 해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제3의 권력 행위라 칭했다. 보답 받지 못한 단원들의 사기저하는 분명 지휘자의 잘못은 아니다.

임금을 비롯한 단원들의 복지와 경제적 의사 결정권이 전적으로 시에 일임되어 있는 한국 공공단체의 현실적 시스템은 지휘자가 적극적인 리더십을 발휘하기에 한계로 다가왔을 것이다. 피상적인 명예와 음악적 완성도만으로 살아가기 전에 경제적 활동을 하는 인간으로서의 단원들은 강제적이고 감정적인 지휘자의 태도에 한층 더 지치고 피로했다. 지휘자의 미학적 도덕성은 과거와 달리 이제는 지휘자 개인의 능력만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게 되어버렸다.

<음악 칼럼니스트·문화정책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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