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현의 기독문학기행] 아이들을 사랑한 이, 동화같은 봄을 선물하다

이원수의 '고향의 봄' 시비 가 세워진 경남 창원시 용지공원에서 어린이들이 평화롭게 자전거를 타고 있다.
 
이원수문학관 내부 전경.
 
'고향의 봄'에서 '꽃대궐'로 표현된 김종영 생가(위), 이원수가 6∼9세까지 살았던 주택(아래).
 
고향의 봄길
 
1980년 대한민국문학상 아동문학부문 본상 수상 후 아내와 함께 한 이원수.


나라를 잃어버렸던 시기에 민족이 즐겨 불렀던 노래는 겨레의 마음이 됐다. 이 시절 만들어진 동원(冬原) 이원수(1911∼1981)의 '고향의 봄'과 최순애(1914∼1998)의 '오빠생각'은 해방 뒤 초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되면서 어린이뿐 아니라 동심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즐겨 부르는 겨레의 노래가 됐다.

식민지 조선은 아동문학의 불모지였다. 소파 방정환이 1923년 월간 잡지 '어린이'를 펴내면서 아동문학이 싹트기 시작했다. 당시 '어린이'를 애독하던 12세 최순애는 '오빠생각'(1925)으로, 16세 이원수는 '고향의 봄'(1926)으로 등단했다. '어린이' 잡지를 통해 알게 된 이들은 '기쁨사'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더 가까워졌고 10여년 동안의 펜팔로 부부의 연을 맺었다.

꽃대궐 차린 동네

‘아동문학의 거목’ 이원수는 방정환과 함께 근대 어린이문학, 문화운동의 선구자로 꼽힌다. 그는 민족의 현실을 시의 소재로 삼았고 우리 민족이 겪어왔던 아픔과 슬픔, 안타까움과 그리움 같은 민족정서를 풀어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동시를 썼다. 해방 후에는 주로 통일과 민주주의, 생명존중과 더불어 사는 삶. 정의와 같은 문제를 소년소설과 동화 속에 담았다.

대표작 ‘고향의 봄’은 일제식민지 시절 한일합병 이전의 조선을 그리워하며 조국을 떠나 만주, 연해주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운동가들의 심정을 우회적으로 노래했다. 지난 21일 이원수 문학의 산실이며 ‘고향의 봄’의 배경지인 경남 창원을 찾았다.

경남 창원시 의창구 서상동 ‘고향의 봄 도서관’ 지하1층에 이원수의 생애와 문학세계를 엿볼 수 있는 문학관이 있다. 문학관엔 이원수의 아내 최순애가 평소 읽던 성경책도 전시돼 있다. 최순애는 ‘어린이’에 이원수보다 한 해 먼저 동요가 입선될 정도로 동요에 관심이 많았지만, 결혼 후 자녀를 양육하고 집안살림을 도맡느라 동요를 계속 쓰지 못했다. 대신 신앙생활과 교회봉사에 열중했다. 그가 동시집을 내려고 써둔 원고들은 6·25전쟁 당시 불타 소실됐고 10편 정도 남았다.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뻐꾹 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 제/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면/비단 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기럭기럭 기러기 북에서 오고/귀뚤귀뚤 귀뚜라미 슬피 울건만/서울 가신 오빠는 소식도 없고/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오빠생각’ 전문)

최순애의 ‘오빠생각’은 집에 돌아오지 못하는 오빠를 기다리는 간절한 마음을 담은 동시다. 그의 오빠 최영주는 일본 도쿄에서 유학까지 한 지식인이었다. 최영주는 일본 경찰에 쫓겨 숨어 다니다가 건강을 해쳐 결국 요절했다. 최순애는 생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시작(詩作) 동기를 이같이 밝혔다.

“오빠는 고향인 수원에서 소년운동을 하다가 서울로 옮겨 방정환 선생 밑에서 소년운동과 독립운동을 열심히 했다. 집에는 한 달에 한 번 정도밖에 오질 않았다. 오빠가 집에 올 때면 늘 선물을 사 왔는데 한번은 ‘다음에 올 땐 우리 순애 고운 댕기 사줄게’라고 말하고 서울로 떠났다. 그러나 서울 간 오빠는 소식조차 없었다. 그런 오빠를 그리며 과수원 밭둑에서 서울 하늘을 보면서 울다가 돌아왔다. 그래서 쓴 시가 바로 ‘오빠 생각’이었다.”

이원수가 남긴 많은 작품엔 창원의 천주산과 실개천 공기와 바람이 젖어있다. “내가 자란 고향은 경남 창원읍이다. 나는 그 조그만 읍에서 아홉 살까지 살았다…창원읍에서 자라며 나는 동문 밖에서 좀 떨어져 있는 소답리라는 마을의 서당에 다녔다. 소답리는 작은 마을이었지만 읍내에서도 볼 수 없는 오래 되고 큰 기와집의 부잣집들이 있었다. 큰 고목의 정자나무와 봄이면 뒷산의 진달래와 철쭉꽃이 어우러져 피고, 마을 집 돌담 너머로 보이는 복숭아꽃 살구꽃도 아름다웠다…창원의 성문 밖 개울이며 서당 마을의 꽃들이며 냇가의 수양버들, 남쪽 들판의 푸른 보리. 이런 것들이 그립고 거기서 놀던 때가 한없이 즐거웠던 것 같았다. 그래서 쓴 동요가 ‘고향의 봄’이었다.” (수필 ‘흘러가는 세월 속에’ 중에서)

남산자락 고향의봄 도서관

이원수 문학관을 나와 뒷산의 산책로를 따라 걸어 올라가면 남산자락과 만난다. 복숭아꽃 살구꽃이 피었던 남산자락에는 보리밭과 미나리밭이 파란들처럼 펼쳐져 있다. 이원수가 어린 시절 성장한 천주산 아래의 소답동으로 발길을 향했다. 문학관에서 버스로 10분 거리에 있다.

이원수가 양산에서 태어나 한 살 때 이사해 아홉 살 때까지 살았던 곳이다. 그의 동심 속 ‘작고 초라한 성문 밖 개울, 서당 마을의 꽃, 냇가의 수양버들, 남쪽 들판의 푸른 보리밭’이 있는 서정적 공간이다. 그의 ‘정서적 샘’ 역할을 했던 천주산은 봄이면 진달래와 철쭉이 흐드러지게 피어나 예나 지금이나 크게 변하지 않았다.

창원읍성은 도시가 형성되면서 대부분 없어졌고 터만 남았다. 이원수는 어린 시절 성문을 드나들며 서당에 다녔을 것이고, 동네를 가로지르며 친구네로 놀러갔을 것이다. 돌담 너머 대궐집이 보였다. ‘고향의 봄’ 노랫말에서 ‘꽃대궐’로 표현된 조각가 김종영 선생 생가 마당엔 울긋불긋 꽃들이 피어 있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울긋불긋 꽃대궐 차린 동네/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고향의 봄’ 중에서)

소답동 창원초등학교 입구부터 김종영 생가까지의 이면도로는 ‘고향의 봄길’로 지정돼, 이원수의 삶을 소개하는 입간판이 세워져 있다. 4∼6세 때 살았던 북동리 207번지엔 성장지 표지석이 있다. 또 창원시민들의 휴식공간인 용호동 용지공원에 ‘고향의 봄’ 시비가 세워졌다.

일제강점기 이원수는 당시 주류였던 동심주의나 천사주의를 뛰어넘는 면모를 보였다. 일제강점기의 현실 속에 우리 민족이 겪어야했던 설움을 작품 속에 잘 드러냈고 해방 후엔 동시로 표현하지 못했던 많은 이야기들을 동화와 소년 소설에 담았다. 6·25전쟁이후엔 분단, 실향 이산가족의 문제를 작품 속에 담아 어린이 문학이 사회의 가장 첨예한 현실문제까지 담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그러나 그가 일제 말기에 친일시를 쓴 것은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에 대해 아동문학가 이오덕은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 2002년 회보에서 이렇게 말했다. “선생만큼 불의와 부정을 싫어하고 어떤 권력 앞에서도 굽히거나 타협하지 않고 올바르게 살고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이렇게 살았던 태도로 미루어 선생은 일제 말기에 한때 저질렀던 그 친일 행적을 뼈아프게 뉘우쳤음이 분명하다. 어쩌면 선생은 친일 동시를 썼던 몇 해 동안의 죄를 갚기 위해 그 세월의 꼭 10배나 되는 동안(한평생을) 우리 어린이와 겨레를 살리기 위한 작품을 남기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원수는 ‘민들레의 노래’ ‘메아리 소년’ ‘호수속의 오두막집’ 등 반전(反戰)메시지를 담은 작품, ‘땅 속의 귀’ ‘어느 마산 소녀의 이야기’ ‘벚꽃과 돌멩이’ 등 4·19정신을 담은 작품, ‘토끼대통령’ ‘명월산의 너구리’ ‘잔디숲의 이쁜이’ 등 독재정치를 비판한 작품을 썼다. 또 전태일 분신 사건 때 한 노동자의 의로운 죽음을 의인동화에 담은 ‘불새의 춤’을 즉시 발표했다. 그는 리얼리즘에 입각한 아동문학을 펼치면서 아동문학은 몽상적이고 유치하다는 통념을 깨고자 했다.

투병 중 받은 세례

이원수가 신앙을 갖게 된 것은 78년 구강암 발병으로 죽음의 공포와 싸우며 작품 활동을 하던 무렵이었다. 이 시기 그는 죽음의 그림자를 감지하고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어린이들을 위한 밝은 내용의 작품들을 썼다.

“어릴 때/내 키는 제일 작았지만/환히 들여다보았었지/아버지가 나를 높이 안아 주셨으니까/밝고 넓은 길에선/항상 앞장세우고/어둡고 험한 데선/뒤따르고 하셨지/무서운 것이 덤빌 땐/ 아버지는 나를 꼭 /가슴 속, 품속에 넣고 계셨지…“(‘아버지’중에서)

그가 마지막으로 쓴 동시 ‘겨울 물오리’는 죽음을 초월하고자 한 의지가 서려 있다. “얼음 어는 강물이/춥지도 않니?/동동동 떠다니는/물오리들아/얼음장 위에서도/맨발로 노는/아장아장 물오리/귀여운 새야/나도 이젠 찬 바람/무섭지 않다/오리들아, 이 강에서 같이 살자”(‘겨울 물오리’ 전문)

이원수의 차녀 이정옥(73·군포산본교회) 집사는 “평소 ‘주님의 존재를 믿는다’고 가족들에게 말씀하셨던 아버지는 말년에서야 어머니가 그토록 함께 하길 원했던 신앙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이 집사는 “어머니 최순애는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했고 평생 말씀을 의지해 사셨어요. 저희 3남 3녀 자녀들 모두 신앙인으로 양육하셨죠. 아버지는 소설가 황순원 선생님의 인도로 신앙을 갖게 됐어요.”

이원수는 암 투병 중일 때 ‘병든 후에야 주님을 찾는 것이 죄스럽다’며 교회 나가길 거부했으나 병이 위중해지자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갖고 80년 11월, 서울 남현동 남성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소천하기 세 달 전이었다.

■ 이원수처럼 생각하기
"죄 없는 나의 가난에 원망도 슬픔도 갖지 않았다"


"약한 몸으로 경난 속에 살아온 내 아내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해야 옳은지 잘 모르겠다. 처 최순애의 어릴 적 작품 '오빠생각'과 내 동요 '고향의 봄'이 인연이 되어 오랫동안 마음으로 생각하다가 결혼을 의논하게 되자 내가 일본 사람들에게 붙들려 가서 꼭 1년 동안 아내는 눈물로 세월을 보내며 기다려 주었다." (수필 '나의 아내' 중에서)

기독교 가정의 부유한 환경에서 성장한 최순애와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었던 이원수의 결혼은 처음부터 순탄치 않았다. 결혼을 약속한 후 생각지도 못한 일이 터졌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나기로 한 날 이원수는 '함안 반일독서회 사건'으로 체포돼 1년간 마산형무소에서 감옥생활을 했다. 그의 동시 '두부장수'는 이 때 형무소 안에서 쓴 것이다

1936년 출소한 이원수는 처가가 있는 경기도 수원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마산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그는 늘 가난에서 헤어나기 힘들었지만 강직한 마음으로 이겨냈다.

"나는 나의 가난에 죄 없음을 깨달았고 죄없는 나의 가난에 대해서 원망도 슬픔도 갖지 않기로 했다. 더구나 죄 없는 나의 가난에 조금이라도 비굴이나 불의나 부정으로서 대항하지 않는 것을 내 생활의 신조로 삼았다. 천연의 동심으로 아동들을 위한 문학을 하기 위해서도 그것은 오히려 필요한 생활 태도임을 확신했다."(수필 '끝없는 시련 속에 일생을 즐거이' 중에서)

이원수는 자신의 고집과 자존심을 누구보다도 잘 알아주고 탓하지 않는 아내를 평생의 문우로 여겼다.

창원=글·사진 이지현 선임기자 jeeh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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