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현의 기독문학기행] 하나님 섭리 헤아릴 수 없음을 노래하다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 유천마을 이영도 시조시인의 생가. 열린 철대문 사이로 안채가 보인다. 마당에 시인의 어린 시절을 지켜보았을 감나무가 홀로 빈 집을 지키고 있다.
 
시인의 생가 인근 ‘오누이 공원’에 이호우 시비와 이영도 시비(오른쪽)가 나란히 서 있다.
 
이영도


“먼 첨탑(尖塔)이 타네/ 내 가슴 절벽에도/ 돌아앉은 인정 위에/ 뜨겁던 임의 그 피/ 회한은 어진 깨달음인가/ ‘골고다’로 젖는 노을.”(이영도의 ‘노을’ 전문)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 내호리 유천마을은 ‘달무리’ ‘보릿고개’ 등 민족 고유의 정한을 단아하고 섬세한 가락으로 승화시켜 현대 시조를 한층 빛낸 정운(丁芸) 이영도(1916∼1976) 시조시인이 태어나고 성장한 곳이다. 그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시조시인 이호우의 여동생이다. 유천마을은 유명한 오누이 시조시인이 태어난 마을이란 이유로 ‘시인의 마을’로 불린다.

유천마을은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영신 정미소, 지금은 사용되지 않지만 일제강점기 때부터 있던 유천극장, 일본식 가옥의 금화 미용실, LP판 돌아가는 소리가 나는 듯한 중앙소리사 등 1970년대의 모습이다. 정미소 앞 ㄱ자형 기와집 앞에 발길을 멈췄다. 시인의 생가였다. 1910년께 건축된 단층 한옥기와집으로 안채와 사랑채로 구성돼 있다. 이곳은 한국문학사에 중요한 위치에 있는 시조시인 남매의 생가라는 점에서 문화사적 가치가 높다. 철대문 옆엔 ‘등록문화제 제293호 이호우 이영도 생가’란 팻말이 붙어 있다.

마당엔 시인의 어린 시절을 지켜봤을 키 큰 감나무가 빈집을 지키고 있다. “우리 집 뜰엔 감나무가 많았다. 우리나라 명물로 손꼽히는 청도 반시의 고장이기 때문이다. 수십 년의 연륜을 감고 뜨락 가득히 그늘을 드리운 감나무 아래서 초여름의 긴 긴 낮을 감꽃을 주워 그것으로 꾸리는 소꿉살림이 여간 호화롭지 않았다.”(수필 ‘그 산천, 그 동무들’ 중에서)

초가을에 새로 바른 창호지

이영도 시인은 청마 유치환의 시 ‘행복’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서간집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의 주인공이다. 20여 년 동안 청마로부터 5000여 통의 편지를 받았던 여인이란 인식에 가려 시조시인으로서의 문학적 업적과 작품세계를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 경향이 있다.

이영도는 우리나라 전통 시가인 시조를 현대적으로 구현하는 데 공헌했다. 정형시 형식의 질서를 가장 현대적으로 승화시키고 시대의 아픔을 역사적인 관점에서 성찰했다는 점에서 재평가받을 만하다. 또 광복 직후 불모지나 다름없던 현대 시조계에 여류시조의 산맥을 일으켰다고 평가받고 있다. 노산(鷺山) 이은상은 이영도 유고시집 ‘언약’ 서문에 이렇게 말했다. “사향노루가 지나간 뒤에는 발자국 닿는 풀끝마다 향기가 끼치듯이, 그는 어디론지 가버렸건만 향내 머금은 작품들이 남아 우리 가슴에 풍기고 있다.”

이영도는 남편과 사별한 1945년 12월 경북 대구 동인지 ‘죽순’에 시조 ‘제야’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들은 ‘탁마(琢磨)된 시어는 구김살이 없이 좌악 펴져서 윤기가 난다’ ‘초가을에 새로 바른 창호지 같다’고 평했다.

“우러르면 내 어머님/ 눈물 고이신 눈매/ 얼굴을 묻고/ 아아 우주이던 가슴/ 그 자락 학같이 여기고, 이 밤 너울너울 아지랑이”(‘달무리’ 전문)

“사흘 안 끓여도/ 솥이 하마 녹슬었나/ 보리 누름 철은/ 해도 어이 이리 긴고/ 감꽃만/ 줍던 아이가/ 몰래 솥을 열어보네”(‘보릿고개’ 전문)

종착지는 구원의 날개

“여기는 슬기의 이방/ 당신마저 외면하고/ 목마른 소망들이/ 지향 잃은 벌판인데/ 먼 궁창/ 대기권 밖에선/ 달빛보다 곱다든가/ 주! 이젠 그 못자국/ 만지게 하옵소서/ 우러르던 첨탑들로/ 허울로만 남아 선 자리/ 기댈 곳/ 없는 내 의지/ 홀로 추정을 간다”(‘추정을 간다’ 전문)

시인 이동주는 ‘이영도 평론’에서 “그는 유교의 토양에 착근돼 길러온 교양에 기독교적인 정신이 접목돼 꽃을 피우게 했다”고 언급했다. “유교주의에서 출발해 불교적 세계관 속을 얼마간 서성이다가 기독교적 구원의 날개 밑에 안주했다. 이영도 시조의 가장 뚜렷한 정신의 터전이자 최종 종착지는 기독교적 구원의 날개 밑이다.”(이동주의 ‘이영도 평론’중에서)

그가 신앙을 갖게 된 것은 30대 초반으로 추정된다. 그는 46년 작곡가 윤이상, 시인 유치환이 근무하던 통영여고 교사로 부임했는데 이 시기 폐침윤 발병으로 마산 결핵요양원에서 요양했다. 당시 폐질환은 결핵이 대부분이었고 그것은 당시 의료 수준으로 사형 선고와 다름없었다. 이때 그는 불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했으며, 육체적인 질병을 통해 신앙은 더욱 견고해졌다.

신앙인에게 기도는 호흡과 같다. 이후 그의 작품엔 은총, 감사, 구원 등의 신앙적 희구가 느껴진다. 구원에 대한 강한 갈구가 담긴 이영도 시인의 ‘청맹의 창’은 하나님의 섭리가 너무나 커 인간의 작은 마음으로 헤아릴 수 없음을 노래한다.

“정작 가득하여/ 안을 수 없는 하늘/ 이 목숨 싹 트임도/ 당신 뜻이거니/ 빛 부신/ 그 음성마저/ 내 귀는 닫힌 절벽/ 높고 먼 뜻을 이르랴/ 제 눈에 티도 못 비친/ 그 청맹의 창/ 닦아도 닦아도 흐리고/ 더듬어/ 생애 한 가슴에/ 부딪치는 또 한 벽.”(‘청맹의 창’ 전문)

부산에도 그의 흔적이 남아 있다. 56년부터 11년 동안 부산 금정구 장전동 자택인 애일당에서 살았다. 박옥금 시조시인은 이영도 평전 ‘내가 아는 이영도, 그 달 빛 같은’에서 “현재 부산대 앞 장전3동 장전2지구대 맞은편 장전제일교회 주차장 자리가 애일당 터”라고 밝힌다. 부산 동래 금강공원에 ‘단란’ ‘석류’ ‘모란’이 새겨진 이영도 시비가 있다.

그는 애일당 마당에 잔디를 심고, 꽃씨를 뿌리며 가꾸며 말씀을 묵상했다. “그리움도 슬픔도 티 없이 밝아지는 기도일 수밖에 없다. 나는 이 그지없는 고요의 시간에 시를 생각하고 사랑을 느끼고 신의 음성을 드는 것이다…애정을 달래기 위해 신을 불러 무릎을 꿇고 눈물짓는 것인지 모른다. 슬픈 기도도, 알뜰한 솜씨도, 간절한 시도 그 애정을 통해서만이 있는 나의 하늘은 투명한 9만리! 그의 애가의 숨결 따라 내 성좌는 밤마다 명암하고, 아쉬움은 먼 무지개로 꿈을 잇은 것이 아니겠는가?”(수필 ‘애정은 기도처럼’ 중에서)

이영도는 53년 부산 남성여고 부임 이후 부산소정교회에 출석했다. 이후 부산여자대학에 출강했고 67년 서울로 이주했다. 74년 중앙대 예술대학교 강사로 강단에 섰으며 여류문학인회 부회장, 시조시인협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그는 76년 3월 6일 시조집 ‘언약’의 서문을 이은상 시인에게 맡기고 돌아온 후 자택에서 뇌일혈로 쓰러졌다. 유고 시조집이 된 ‘언약’은 기독교적 구원의 시어가 진한 모성적인 회귀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갈원’ ‘종1’ ‘기도’ ‘은총’ ‘추정을 간다’ ‘부활절의 노래’ 등 기독교 신앙이 짙게 나타나는 시조들로 만년을 독실한 신앙인으로 살다 갔음을 알 수 있다.

청매로 오누이 공원

이영도 생가엔 현재 아무도 거주하지 않지만 매년 이호우와 이영도를 그리는 많은 사람들로 인해 빈집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청도군에서는 2009년부터 매년 11월 ‘이호우 이영도 오누이 시조문학제’를 개최하고 있다.

시인 생가에서 동창천 쪽으로 걸어 나오면 청매로에 ‘오누이공원’이 있다. 두 남매가 우리나라 현대시조문학사에 큰 업적을 남긴 것을 기리기 위해 근래에 조성된 기념공원이다. 시비공원엔 사이좋은 오누이처럼 시비도 나란히 세워져 있다.

말씀을 사모했던 시인의 마음이 담긴 ‘봄비’가 말씀처럼 ‘시인의 마을’인 유천마을에 내리는 듯했다.

“조용히 잠결을 흔들고/ 장지 밖 봄비소리/ 한겨울 내 담통을 풀며/ 우수절 밤비가 내린다/ 강산은 관절을 펴고/ 물문들이 열리겠다/ 이 밤, 당신 말씀에/ 흥건히 적심 입어/ 거듭나고 싶어라/ 내 심령 덩굴마다/ 뿌리신/ 씨앗 낱낱이/ 알곡으로 맺고 싶다.”(‘봄비’ 전문)

■ [이영도처럼 생각하기]
“무릎 꿇고 간구할 신앙이 있음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행복이란 지극히 주관적인 자기 인식이다. 이영도(사진) 시인은 자신을 행복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이유는 분명했다. 자신의 모든 걸 맡기고 간구할 수 있는 하나님을 가슴속에 지녔기 때문이었다.

“인간으로서의 내 힘이 미치지 못할 때, 인간으로서의 내 가슴을 스스로 다스리기 어려울 때 겸손히 무릎을 꿇고 간구할 신앙이 있음은 얼마나 다행한 일이며 스스로의 구원이 될 수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기에 나는 새벽마다 밤마다, 그것이 자신에게 타이르는 스스로의 교훈이든 하루 동안의 자기 행위에 대한 반성이든 간에 버릇처럼 가슴에 손을 모으고 조용히 눈을 감는 기도의 자세를 취하게 되는 것이며 그러므로 하여 스스로 심신의 안위를 얻어 오고 있는 것입니다.”(수필 ‘진실한 행복’ 중에서)

그는 분노도 사랑도 고운 꿈도 ‘죽음의 권위’ 앞에선 한 자락 스쳐가는 감정의 사치로 여겼다. “이제는 정말 찬란하게 삶을 누려야겠다고 생각한다. 모든 실재 위에 신의 이름이 영광되듯, 내게 허락된 남은 세월은 기쁘고 슬프고 또한 아름다운 생명의 자취를 나의 문학으로 윤색하고 조각하며 회한 없는 목숨을 누려야겠다. 크나큰 은총은 죽음의 피안에서뿐 아니라 바로 오늘의 삶 위에 받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수필 ‘생사의 갈림길에서’ 중에서)

그는 폐침윤으로 두 번의 요양생활을 했다. 이 시간을 통해 죽음에 대한 생각과 준비를 했을 것이다. 그가 별세하기 5년 전 딸에게 쓴 편지를 보면 죽음을 초월한 시인의 마음을 알 수 있다.

“진아. 내 사랑하는 딸아. 71년 11월 7일 1시에 엄마가 네게 마지막 부탁을 쓴다. 엄마가 죽은 뒤 울음을 삼가고 엄마가 소속한 교회(현동교회, 은산교회)에 기별해서 찬송가 419장 ‘주 날개 밑에 내가 쉬며’를 불러 주도록 부탁하고, 진아 너도 울음 대신 이 찬송가로 엄마의 마지막 영혼을 축복해다오. 오직 하나인 내 혈육 진아의 행복과 자손들의 번영과 평강을 엄마는 하늘나라에서 빌며 지낼 것이다.”(박옥금의 ‘내가 아는 이영도, 그 달빛같은’ 중에서)

청도=글·사진 이지현 선임기자 jeeh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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