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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이 걸어온 길… ‘노무현 친구’에서 ‘광화문 대통령’으로 홀로서기


“노무현 변호사를 만나고, 지금에 이르게 된 것도 마치 정해진 것처럼 느껴진다. 운명 같은 것이 나를 지금의 자리로 이끌어 온 것 같다.”

정치권 입문 전 ‘노무현의 친구’로 알려졌던 문재인 후보가 2011년 자신을 세상에 내보이며 발간한 ‘문재인의 운명’에 적은 글이다.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친노(친노무현) 유산을 물려받은 정치인’ ‘노무현의 적자’로 불렸던 그가 제19대 대통령 당선이 유력시되면서 결국 홀로서기에 성공했다.

‘정치인 문재인’ ‘인간 문재인’을 이해하려면 노 전 대통령과의 관계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1953년생인 문 후보는 29세에 부산에서 변호사 노무현을 만났다. 그의 인생에 노 전 대통령을 알기 전보다 노 전 대통령과 함께하거나 노 전 대통령을 그리워한 시간이 더 많다는 얘기다. ‘대선 재수’에 도전했던 기간에도 그는 가장 그리운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에 고민 없이 ‘노무현’이라고 답하곤 했다.

문 후보는 ‘문재인의 운명’에서 “당신(노 전 대통령)은 운명에서 해방됐지만, 나는 당신이 남긴 숙제에서 꼼짝하지 못하게 됐다”고 썼다. 문 후보 스스로 자신의 정치적 운명이 결국 노 전 대통령에게서 시작됐음을 인정하는 대목이다.

문 후보가 노 전 대통령과 만난 것은 굴곡진 우리 현대사 때문이다. 재수 끝에 1972년 경희대 법대에 입학한 문 후보는 입학 첫해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선언’이라는 정치적 폭탄을 맞았다. 1975년 총학생회에서 유신반대 시위를 주도하던 그는 구속과 동시에 제적당했다. 담당 판사가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를 선고하면서 석방됐지만 강제징집을 당해 특전사에서 군복무를 했다. 문 후보는 자신이 특전사에서 근무한 것을 두고두고 자랑스러워했다.

군 제대 후 바로 복학이 되지 않았다. 복학 전까지 사법시험을 준비하기로 한 그는 전남 대흥사에서 공부해 1979년 1차 시험에 합격했다. 10·26사태 이듬해인 1980년 3월 복학했지만 문 후보는 신군부의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두 번째 구속을 당한다. 그러나 유치장에서 뜻밖의 ‘사시 2차 합격’ 소식을 당시 지금의 아내인 김정숙 여사로부터 들었다.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졸업한 문 후보는 판사 임용을 희망했지만 두 차례 구속 전력 때문에 꿈을 이루지 못했다.

변호사 개업을 위해 낙향하듯 내려간 부산에서 만난 사람이 변호사 노무현이었다. 두 사람은 곧 ‘변호사 노무현·문재인 합동법률사무소’의 동업자가 됐다. 이후 1988년 노 전 대통령이 국회의원에 당선돼 정치권에 들어갈 때까지 인권변호사 활동을 함께했다. 문 후보는 당시 상황을 “부산 경남 울산 창원 전체에 인권변호사는 고작 서너 명이었다. 다들 정치권으로 가고 나 혼자 남았다”고 회상한 바 있다. 노 전 대통령의 서울 여의도 입성 후 문 후보는 부산에서 노동운동 지원 활동을 계속했다. 두 사람은 문 후보가 2002년 대선 경선에서 노 전 대통령의 부산선대본부장을 맡으며 재결합했다.

노 전 대통령 당선 이후 문 후보는 정치권에 들어서기를 한사코 거절했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은 끝내 그를 청와대로 불러들였다. 노 전 대통령은 당선인 신분이던 2003년 1월 3일 문 후보를 불러 “달리 맡길 사람이 없으니 민정수석을 맡아 달라”고 짧게 부탁했다고 한다. 문 후보는 고심 끝에 “민정수석으로 끝내겠다. 정치하라고 하지 말라”는 두 가지 조건을 내걸고 청와대에 들어갔다.

마치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과중한 업무에 힘겨워했던 문 후보는 1년여 만에 청와대를 떠났다. 그러나 2004년 히말라야 트레킹 도중 노 전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됐다는 소식에 급거 귀국, 노 전 대통령 대리인단으로 참여했다. 노 전 대통령 탄핵안이 헌법재판소에서 기각된 후 그는 시민사회수석으로 청와대에 복귀했고, 이후 민정수석을 다시 역임했다. 민정수석을 마친 후 다시 청와대를 떠났지만, 노무현정부 마지막 해인 2007년 3월 ‘노무현의 마지막 비서실장’으로 청와대에 다시 들어왔다.

노 전 대통령 서거는 국민이 ‘정치인 문재인’을 알게 된 계기였다. 그의 정치여정이 시작된 출발점이기도 하다. 특히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슬픔을 혼자서 묵묵히 감내하던 문 후보의 모습은 많은 국민에게 각인됐다. 그는 ‘문재인의 운명’에서 노 전 대통령의 서거일을 “내 생애 가장 긴 하루였다. 그날만큼 내가 마지막 비서실장을 했던 게 후회된 적이 없다. 시신 확인에서부터 운명, 서거 발표, 그를 보내기 위한 회의주재까지. 나 혼자 있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했다”고 회고했다.

노 전 대통령과의 기억, 청와대 시절, 퇴임, 서거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문재인의 운명’은 ‘정치인 문재인’을 세상에 알리는 도구가 됐다. 그는 2012년 대선 패배 이듬해 내놓은 ‘1219 끝이 시작이다’에서 “제가 대선 출마까지 간 것도 결국은 ‘문재인의 운명’ 출간에서 시작됐다는 생각이 든다”고 적었다.

이후 문 후보의 정치인생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2012년 19대 총선에서 부산 사상에서 당선돼 정계에 입문했고, 그해 민주통합당 후보로 제18대 대선을 치렀다. 그는 48% 득표로 선전했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3.53% 포인트 차로 패배했다. 대선 이후 당권과는 거리를 둬왔지만 ‘서해 북방한계선(NLL) 대화록 공개’ ‘세월호 단식’ 등 정치 이슈의 한복판을 떠나지는 않았다. 그는 2014년 12월 당대표 선거에 전격 출마해 당권을 쥐었다.

그러나 ‘문재인호’는 오래가지 못했다. 2015년 4월 재보선에서 전패하면서 정치적 위기에 직면했다. 그해 겨울엔 안철수 전 국민의당 공동대표가 당을 떠나면서 ‘분열의 리더십’이라는 야권 비주류의 십자포화를 맞기도 했다. 결국 그는 김종인 비대위 대표에게 당권을 내려놓고 물러났다. 당대표 사퇴 후에도 문 후보는 몇 차례 위기에 봉착했다. 지난해 20대 총선에서는 ‘호남 지지 철회 시 대선 불출마’라는 승부수를 띄웠으나 민주당은 호남 28석 중 3석을 얻는 데 그쳤다.

20대 총선 이후에도 위기는 있었지만, 그는 탄핵 정국에서 확보한 대세론을 끝까지 내세워 본선 티켓을 손에 쥐었다. 본격적인 대선 국면에서도 문 후보는 국민의당과 범보수 진영의 집요한 공세에 시달렸다. 아들 준용씨의 한국고용정보원 취업특혜 의혹이 가장 대표적인 공격 포인트였다. 문 후보는 모든 정치적 공세를 ‘촛불 민심’이라는 든든한 우군과 ‘적폐청산’이라는 분명한 정치적 슬로건으로 물리치고 결국 대권을 손에 쥐었다.

문 후보는 사법연수원 차석, 성공한 인권 변호사, 청와대 비서실장, 제1야당 대표 등 화려한 경력을 쌓았지만 유년기는 가난의 연속이었다. 문 후보의 부모는 1950년 12월 흥남철수 당시 미군 선박을 타고 경남 거제의 피난민수용소에 도착했다. 문 후보는 한국전쟁의 끝자락인 1953년 1월 24일 경남 거제에서 태어났다. 그는 크레용보다 부드럽게 칠해지는 크레파스는 사 본 적이 없고, 남자 아이들이 다 다녔던 태권도장에 다니고 싶다는 말도 꺼내지 못했다고 한다. 학교 기성회비를 내지 못해 수업 중 쫓겨나는 일도 예외는 아니었다. 용돈을 벌기 위해 바다에 뛰어들어 낚시용 미끼인 참갯지렁이를 채집해 낚시가게에 팔기도 했다.

가난했지만 공부는 게을리하지 않았다. 문 후보는 당시 부산 명문학교였던 경남중에 입학했다. 그는 “부친이 가장 기뻐하셨던 일이 경남중에 시험 쳐서 들어갔던 일”이라며 “한강 이남에서 가장 명문학교로 이름난 학교였다”고 회고했다. 그는 저서에서 “아이들이 몇 달씩 선행학습을 해 왔고, 집에 가보면 정말 놀랄 만한 저택과 정원이 있어 완전히 차원이 다른 세상이었다”며 “그런 걸 보면서 세상이 참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고, 인권 변호사로의 인생이 어릴 때의 경험이 전혀 상관없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명문학교에서 일찌감치 겪은 ‘양극화의 경험’이 오늘날 그를 ‘광화문 대통령’으로 만든 셈이다.

최승욱 기자 applesu@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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