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의 현장을 찾아서 <제5편>] 사도행전적 초대교회를 꿈꾸며 하나님께 일생을 드리다

일본 복음화를 위해 2007년 막을 올린 ‘러브 소나타’ 집회에서 하용조 목사와 참가자들이 성경 말씀을 종이비행기에 적어 날리고 있다. 온누리교회 제공
 
하용조 목사
 
아프가니스탄 선교 현장을 방문한 하 목사가 현지 어린이와 함께 한 모습. 온누리교회 제공
 
신앙적 동지로 활동한 '4인방 목사'들로 왼쪽부터 하용조 옥한흠 이동원 홍정길 목사. 온누리교회 제공
 
김성영 목사


종교개혁은 16세기에 갑자기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이미 신약시대 예수님께서 ‘성전 대청소사건’(요 2:13∼22)을 통해 부패한 성전 개혁의 모범을 보이셨으며 교회를 새롭게 세우시기 위해 자신을 내어주셨다. 종교개혁은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초대교회로 돌아가는 운동이자 땅 끝까지 교회를 확산하는 성령운동이다. 하용조 목사(1946∼2011)는 ‘성령 목회’로 사도행전적 교회를 꿈꾸며 이 땅의 교회 갱신을 위해 자신을 관제(灌祭)로 주님께 드렸다.

‘변화산에서 생긴 일’로 끝난 설교

하용조 목사의 마지막 지상설교는 마가복음 9장 2∼13절로 끝난다. ‘변화산에서 생긴 일’이라는 제목의 메시지다. 미완으로 끝난 그의 마가복음 강해를 후임 이재훈 목사가 이어서 마무리한 것이 감동의 유작(遺作) ‘순전한 복음’이다. 오랜 지병으로 일곱 번의 대수술을 받고도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복음을 증거한 우리 시대의 초인적 전도자를 어떻게 그려야 할지 필자는 한 동안 붓을 들기 어려웠다.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가 가득 찬 곳으로 들어올 때마다 두려움과 떨림을 가져야 합니다.” 기도하기 위해 변화산에 오르신 주님 계신 그곳이 교회였기에 두려움에 떨었던 제자들을 염두에 둔 마지막 강론의 한 부분이다.

그는 두려움으로 하나님의 임재 앞에 모인 성도들을 향해 세상으로 담대히 나가야 한다고 외친다. “헌신하십시오. 여러분 생애를 바치십시오. 여러분 한 사람 때문에 민족이 살고 우리 사회가 살고 통일이 올 것입니다. ‘하나님, 나를 제물로 받아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세상으로 나아가십시오. 열방을 향해 가십시오!” 이 시대 청년들을 향한 또 하나의 마지막 설교 ‘열방을 향해 나아가라(Go to the Nations)’에서 그는 최후의 절규를 하고 있다.

하용조 목사는 경건훈련(QT)과 가정사역, 그리고 일대일 제자양육, 청소년 비전 등 다양한 목회 프로그램을 개발, 목회에 적용해 성공한 사례들을 한국교회 목회자들과 성도들에게 보급한 영적 크리에이터로 평가된다.

그런데 그의 초기 목회는 이러한 모습과 거리가 있었다. 대학 시절 한국대학생선교회(CCC)를 통해 복음에 대한 사명감을 갖게 된 하 목사는 신학교를 마치고 1975년 교회를 개척했다. 그게 연예인교회였다. 세속적인 문화사역자들을 기독교문화 사역자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사회 각 분야의 전문인들과 지도자들을 전도하는 것이 효과적인 복음 사역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성령 목회를 하라”는 주님 음성에 굴복

그러나 하 목사의 목회 방향에 큰 전환이 일어난 것은 육신의 지병을 통한 성령의 인도하심 때문이었다. 그는 ‘사도행전적 교회를 꿈꾼다’라는 자전적 목회철학서에서 이 사실을 고백했다. 85년 온누리교회를 개척한 후 악화된 지병으로 91년 미국 하와이에서 정양((靜養)을 하던 그는 기도 중에 “성령으로 돌아가라, 성령 목회를 하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했다.

평소 성령을 강조하는 목회자들을 불편하게 생각해 온 그는 성령으로 목회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기로 결단, 교회로 돌아와 다음과 같이 선포했다. “이제부터 성령목회를 하겠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하 목사의 성령목회이며, 사도행전적 교회의 비전이다. 그 후로는 목회의 크고 작은 일을 성령께 맡기고 그 분이 명하시는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초대교회 사도들의 행전을 이어가고자 했다.

온누리교회 영성은 이처럼 목회자의 특별한 영적 체험에 의해 형성되었다. 사도바울처럼 육체의 가시를 통한 고통의 열매라 할 것이다. 여기서 얻은 것이 내적 훈련을 위한 QT이고 일대일 제자양육이다. 또 최소 단위의 천국인 가정사역이었고 다음세대를 위한 청소년 사역이다.

하 목사는 특히 성도 양육자를 세우는 것이 교회를 건강하게 부흥시키는 비결임을 확신하고 양육에 힘을 썼다. 이러한 목회 방법은 사랑의교회 옥한흠 목사의 평신도 사역과 접촉점이 있어 보인다. 그런데 양육의 대상을 하 목사는 성도로, 옥 목사는 평신도라고 표현하는 데 차이가 있으며, 하 목사의 성도 양육은 ‘아비의 마음’으로 한다는 점에 그 특징이 있다.

즉 성도 양육을 선생의 마음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아비의 마음으로 사랑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아버지 교실’이 나오고 ‘어머니 교실’이 나왔다. 공교롭게도 평신도(성도)를 깨우고 양육하기에 애쓴 두 교회는 10여 년 전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 복음주의 교회로 주목받은 바 있다. 하 목사는 이러한 성령 목회를 효과적으로 실천하기 위해 문서선교를 병행, ‘빛과소금’, ‘생명의삶’, ‘목회와신학’ 등 정기간행물과 수많은 경건서적을 반포하는 한편 전 세계 60여개 국에 1200명의 선교사를 파송함으로써 목회의 지경을 넓혀나갔다.

‘종합병원’ 같은 몸으로 ‘러브 소나타’를

하용조 목사는 1946년 9월 20일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태어나 6·25전쟁 중 남하해 경기도 이천과 전남 목포에서 피난 생활을 했다. 서울 대광고를 거쳐 건국대 재학 중 CCC에서 김준곤 목사를 만나 구원의 확신과 복음에 대한 사명을 받고 옥한흠 목사와 홍정길 목사, 그리고 이동원 목사와 함께 신앙 동지로서 영성훈련에 매진했다.

7년간 CCC 간사로 활동했으며 72년 장신대에서 공부하고 76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연예인교회를 개척했다가 건강 악화로 사임, 영국에서 학업과 선교훈련을 마치고 귀국해 85년 온누리교회를 개척했다.

그는 대학 시절부터 앓기 시작한 폐결핵과 당뇨, 고혈압 등 여러 지병과 신부전증으로 일주일에 두 번씩 투석을 해야 했으며 간염이 간암으로 발전해 일곱 차례 대수술을 받는 등 일생을 모진 질병과 싸웠다. 그는 2011년 8월 2일 66세를 일기로 주님의 부름을 받기까지 사도행전적 복음 사역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국내에 ‘열린 예배’를 도입했으며, 현대기독교음악(CCM) 예배를 한국교회에 정착시켰다. 특히 그의 ‘변하는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말씀’이라는 주제의 강해설교는 한국교회 강단에 영향을 끼쳤다.

또 하나 그가 남긴 주요 사역은 일본 복음화를 위한 ‘러브 소나타’로, 이는 2007년 병상에서 받은 사명이다. 그는 러브 소나타를 통해 복음을 전하기 위해 병이 깊은 몸으로 일본 열도를 누볐다. 일본 땅에서 하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고 ‘지성에서 영성으로’ 들어온 한국의 석학 이어령 박사는 추모시에서 “갑자기 끊긴 생명의 합창/음표와 음표 사이의 빈자리에 서서 기다립니다/미처 함께 부르지 못한 나머지 노래를 위하여…/님은 우리의 아침이고 우리의 생명의 약속인 줄 아오나/용서하소서/다만 오늘 하루만 당신을 생각하며 울게 하소서”라고 표현하며 우리 곁을 떠난 그를 아쉬워했다.

하 목사 별세 후 온누리교회는 후임 목회자 승계에도 모범을 보였다. “제사와 예배에 나의 피를 붓는 일이 있을지라도 나는 기쁘다”(빌 2:17)고 고백한 사도바울처럼 살다간 하용조 목사의 헌신이 그리운 종교개혁 500주년이다.

글·사진=김성영 목사(전 성결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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