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의 현장을 찾아서 <제5편>] 교회와 사회의 소통 위해 ‘빈들의 소리’로 살다간 선각자

강원용 목사
 
크리스찬아카데미가 1970년 개최한 ‘농촌사회 중간 집단 교육’을 마친 후 찍은 사진으로 강원용 목사는 앞에서 다섯 번째 줄 오른쪽에서 세번째에 앉아 있다(왼쪽 사진). 1995년 ‘여성 중간 집단 교육’ 후 촬영한 사진으로 이 교육을 마친 여성 중에는 여성운동가와 국회의원, 대학교수, 정부 요인 등이 다수 배출됐다(오른쪽 사진). 대화문화아카데미 제공
 
크리스찬아카데미에서 강의하는 강 목사. 대화문화아카데미 제공
 
크리스찬아카데미 전경.
 
김성영 목사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수직으로 하늘의 소리와 수평으로 땅의 소리가 만나는 자리이다. 죄로 단절된 인간과 하나님이 만나고, 소외된 이웃과 이웃이 만나는 자리가 십자가다. 종교개혁은 성도들이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소리를 직접 듣고 세상에 그 소리를 바로 전하기 위해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여해(如海) 강원용(1917∼2006) 목사는 교회와 사회의 소통을 위해, 사회로 확장되는 교회로서의 사명을 위해 ‘빈들의 소리’로 살다 간 행동하는 크리스천이었다.

빈들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2004년 6월 21일,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가 주최한 ‘한국교회, 일치를 넘어 갱신으로’라는 주제의 세미나가 있었다. 별세 2년 전 87세의 고령으로 이 자리에 초청받은 강 목사는 ‘교회와 사회의 관계’에 대한 고 옥한흠 목사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는 두 가지 사명이 있습니다. 예배와 교육, 성례전 등 모이는 공동체로서의 에클레시아 사명과 세상을 위해 나아가는 디아스포라 사명입니다. 이런 점에서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의 구분은 무의미합니다. 보수와 진보의 차이도 없습니다.… 루터가 로마서 1장 17절의 말씀(믿음)으로 종교개혁을 시작했다면, 오늘 우리는 골로새서 1장 15∼20절의 말씀(실천)으로 교회를 개혁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개인과 만물의 주인이듯이 교회는 전 우주적인 영역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교단을 넘어 일치와 연합으로 사회를 변화시켜야 합니다.” 아울러 그는 평화통일을 위한 교회의 사명을 특별히 강조했다.

광복과 분단, 전쟁과 가난, 혁명과 독재정권의 격변기를 빈들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살다간 강 목사에게는 예수님 당시의 세례요한 같은 이미지가 있다. 세례요한은 하늘의 메시지를 세상에 전하기 위해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살다 갔다. 그처럼 순교를 당하진 않았지만 강 목사도 불의한 시대 가운데 빈들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살았다. 강 목사는 ‘빈들에서’라는 책에서 자신을 이렇게 고백했다. “당신은 정치가요? 아니요. 사회운동가요? 아니요. 성직자요? 아니요. 그러면 당신은 누구요? 빈들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요.”

강 목사는 자신의 말처럼 살다 갔다. 정치가는 아니었지만 영향력 있는 정치비판자로, 강단에서 말씀을 선포한 명설교자로, 부조리한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투쟁한 기독교 사회운동가로, 독재에 항거한 민주운동가로 헌신했다. 세계교회협의회(WCC) 중앙위원으로 세계교회 발전에 기여하고 ‘평화포럼’을 주도하면서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과 여성인권 등 사회 약자를 위한 봉사에도 힘썼다.

“내가 살아온 한국의 70년은 빈들이었다. 이 빈들은 성경에 나오듯 ‘돌로 떡을 만들라’는 물질만능, 경제제일주의, 악마에게 절하고도 권력만 잡으면 된다는 권력숭배사조,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는 비합리적이고 광신적인 기복종교에 지배된 공간이었다. 그간 한국사회에 역사적 전환도 있었으나 이 악한 영들의 세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이 때문에 강 목사는 교회가 교회에 머물지 않고 빈들로 나아가야 하며 빈들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돼야 한다고 했다.

농촌계몽의 꿈이 기독교 사회계몽으로

강 목사는 일제강점기인 1917년 10월 30일 함경남도 이원군 남송면 원평리에서 출생했다. 전통적 유교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보통학교 졸업 무렵인 1931년 개신교에 입교했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했던 15세 사춘기 시절, 그는 농촌계몽의 뜻을 품었다. 한번 뜻을 정한 그는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아버지가 소를 팔아 마련해 준 노자를 들고 1935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도쿄 메이지학원 영문과에서 공부하고 만주 북간도로 가서 용정 은진중학교에 진학했다.

그는 그곳에서 스승 김재준 목사를 만나 기독교 신앙에 눈을 떴다. 그의 꿈은 농촌계몽에서 사회계몽으로 바뀌었다. 조선신학교(한신대 전신)를 마치고 미국 유니온신학교와 뉴스쿨대학교 및 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하며 신정통주의 신학자 폴 틸리히와 기독교 윤리학의 대가인 라인홀드 니버를 만났다. 이들의 가르침을 통해 목회와 사회참여의 신학적, 윤리적 토대를 확립했다.

일제 말기 일경의 감시를 피해 북간도 마창에 피신해 있던 강 목사는 1945년 8월 15일 광복과 함께 귀국, 그해 12월 김재준 목사와 함께 야고보교회(경동교회)를 설립하기에 이른다. 평소 복음의 실천과 크리스천의 행동을 중시한 그는 ‘행동하는 믿음’을 강조한 야고보 정신의 교회를 세우고 스승인 김재준 목사를 초대 목회자로 모셨다. 공교롭게도 경동교회 설립기인 1945년 12월에는 한경직 목사에 의해 베다니교회(현 영락교회)와 송창근 목사의 성남교회가 동시에 세워졌다. 일제의 압제로부터 해방을 주신 하나님께서 이 민족의 구원을 위해 한국교회사에 중요한 위치에 있는 교회들을 동시에 세우신 것이리라.

다시 생각하는‘사이’와 ‘너머’의 교회 사명

강 목사의 교회관은 크게 두 영역으로 나뉜다. ‘모이는 교회로서의 사명’과 ‘흩어지는 교회로서의 사명’이다. 이를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위해 그는 경동교회와 크리스찬아카데미를 세웠다.

이 점에 대해 강 목사의 경동교회 후임이자 사상적 계승자인 박종화 목사는 “많은 교회들이 교회의 대사회적 역할과 사명을 말한다. 그러나 그것의 효과적이고 체계적인 교육(훈련)을 위한 시스템은 전무한 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실정이다. 강 목사는 이미 반세기 전에 교회와 사회의 가교로서 크리스찬아카데미를 세웠다. 그의 구상과 준비를 기점으로 보면 70년 전에 시작한 크리스찬아카데미 운동은 가깝게는 독일교회의 모델이며, 나아가서는 종교개혁가 루터와 칼뱅의 목회철학을 이은 것”이라고 설명한다.

칼뱅이 제네바아카데미에서 복음사역자를 훈련시켜 사회변혁을 시도한 것처럼 강 목사도 교회를 통한 사회변혁의 기제로 아카데미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이 운동이 한국교회 권역별로 다시 시작된다면 교회개혁과 사회변화에 큰 동력이 될 것이다. 크리스찬아카데미는 이후 ‘대화문화아카데미’로 변경돼 아들인 강대인 박사가 이어가고 있다.

강 목사의 이러한 사상은 ‘사이(between)’와 ‘너머(beyond)’라는 말로 함축된다. 즉 교회와 사회 ‘사이’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잇고 이를 영원한 생명의 진리로까지 나아가게 하며 ‘너머’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일견 그의 너머 개념은 추상적인 것 같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교회가 성도와 성도 사이, 교회와 사회 사이에 소통하고 협력하는 가교 역할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수평적인 ‘사이’ 역할은 사회의 다른 봉사단체에서도 할 수 있는 것이기에 교회는 여기에 머물지 않아야 한다. 교회는 이웃과 사회를 궁극적인 자리, 즉 영원한 생명의 자리인 하나님에게로 인도해야 한다. ‘너머’의 자리로까지 수직적으로 올라가야 하는 것이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는 한국교회는 교단과 교단 사이, 교회와 사회 사이, 성도와 소외된 이웃 사이를 잇고, 현실 저 너머의 세계를 바라보며 이 땅에 그리스도의 나라가 임하도록 교회의 사명을 더욱 힘 있게 감당해야 할 것이다.

글·사진=김성영 목사(전 성결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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