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찬 심진경의 명작은 시대다] 어서 말을 해!







“국가 안보 위해 예술의 자유 제한 정당.”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작성 혐의로 구속된 전 대통령 비서실장 김기춘의 법정 발언이다. 말과 표현의 자유는 안보를 위해(실은 정권의 안위를 위해서지만) 마땅히 제한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전 국민을 통제와 심리전의 대상으로 삼았던 1970년대 유신시대의 사고다. 그런 의미에서 확신범인 김기춘은 아직도 자기가 죽었음을 기억하지 못하는 유신의 유령인 셈이다. 블랙리스트는 감시와 검열의 기제다. 그것은 자기 양심에 따라 발언해야 하는 작가에게 그럼에도 자유롭게 말해서는 안 된다고 강요한다. 문제는 외부의 감시와 검열의 기제는 필연적으로 작가의 머릿속으로 옮겨와 내부화된다는 사실이다. 자기 검열의 고통은 그렇게 시작된다.

머릿속에서 작동하는 감시와 검열의 기제. 그것은 억압적인 통제사회의 산물이다. 그리고 우리는 오랜 군사독재의 시기를 겪으며 그 숱한 사례들을 목격했다. 하고 싶은 말을 하면 처벌받을 수 있다는 공포는 많은 작가 예술가들을 옥죄었고 이는 일반 대중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또 그 공포는 종종 병리적인 형태로 분출하기도 했다. 1988년에 발생했던 MBC 뉴스데스크의 웃지 못할 방송사고가 그 한 사례다. 그때 스튜디오에 난입해 생방송 뉴스를 진행하던 앵커의 마이크에 대고 “내 귀에 도청 장치가 있다”고 절규한 한 선반공의 목소리는 지금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이 사건은 물론 한 피해망상증 환자가 벌인 해프닝일 뿐이지만, 다른 한편 개인의 머릿속까지 감시하는 통제사회의 비극적인 일면을 폭로한 의미심장한 증상으로도 회자된다.

그런데 “내 귀에 도청 장치가 있다”고 외쳤던 피해망상 환자는 그보다 한참 전에 나온 한국소설에도 등장한다. 이청준의 ‘소문의 벽’이 바로 그 소설이다. ‘소문의 벽’에서 도청 장치를 대신하는 것은 ‘전짓불’이다. 이 소설에서 전짓불은 도처에서 출몰한다. 그것은 감시와 통제의 시선이다. 소설의 등장인물인 박준의 머릿속은 온통 번쩍이는 전짓불로 가득 차 있다. 소설가인 박준은 그 때문에 소설을 쓰지 못해 괴로워하고 미쳐버려 결국은 실종된다. 이청준이 ‘소문의 벽’에서 그려놓은 “머릿속의 전짓불”은 17년 후의 미래에 등장하는 “내 귀에 도청 장치가 있다”는 피해망상의 비극을 정확하게 예견한다.

‘소문의 벽’은 1971년에 발표되고 이듬해 책으로 묶여 나온 이청준의 중편소설이다. ‘당신들의 천국’과 ‘서편제’ 등으로 잘 알려져 있는 이청준은 등단 초기에는 억압적인 세계의 폭력 속에서 불안과 신경증에 시달리며 정상적인 삶의 궤도를 이탈하는 인물들을 주로 그렸다. 그들은 앓고 있거나 아니면 지리멸렬한 자기의 상황을 곱씹으며 방황하는 수동적인 인물이다. 즉 그들은 아픈 사람들이다. 이청준의 초기소설은 그 아픈 사람들의 병리적 증상을 통해 그들을 고통으로 몰아가는 세계의 억압과 폭력을 비판한다. ‘소문의 벽’은 그런 초기소설의 총정리이자 종합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소설이다. 이 소설에서 이청준은 소설을 쓰지 못하고 미쳐버린 소설가를 등장시켜 억압적인 세계에서 과연 소설을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묻는다.

‘소문의 벽’의 형식은 추리소설이다. 어느 날 소설이 잘 걷히지 않아 고민 중인 잡지 편집장 ‘나’에게 한 사내가 찾아온다. 누군가에게 쫓기는 듯한 사내는 자기를 숨겨달라고 말한다. ‘나’는 스스로 미쳤다고 주장하는 사내를 얼떨결에 하숙방에 재워주지만 다음 날 아침 그는 말도 없이 사라져버린다. 사내의 정체에 호기심을 느낀 ‘나’는 혹시 몰라 찾아간 정신병원에서 그가 돌연 소설 발표를 중단하고 실종된 소설가 박준임을, 그리고 그가 진술 공포증이라는 증상을 앓고 있음을 알아낸다. 그렇지만 궁금증은 더해간다. 그는 왜 소설을 쓰지 못하고 진술 공포증에 걸렸는가? 그는 미친 척하는 것인가 아니면 진짜로 미친 것인가? 그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이청준의 소설은 대개 병적 증상으로 표출되는 한 개인의 내밀한 비밀에 호기심을 느끼고 그 의문을 차근차근 추리하고 풀어가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소문의 벽’ 역시 마찬가지다. 소설이 진행될수록 호기심은 더 커지고 의문은 증폭된다. 어쩌면 소설이 잘 걷히지 않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는 ‘나’의 잡지 편집장으로서의 예감도 이에 가세한다. 소설에서 ‘나’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궁금증에 대한 해답을 추적하면서 비밀의 핵심에 조금씩 다가간다.

궁금증을 못 이겨 박준의 행적을 좇던 ‘나’는, 정신병원의 김 박사에서 박준이 전짓불을 유난히 강박적으로 무서워했다는 얘기를 듣는다. 그는 왜 전짓불을 무서워하게 된 것일까? 강한 암시에 이끌려 박준이 쓴 소설을 찾아 읽으면서 ‘나’는 전짓불의 비밀과 그의 소설이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아차린다. “전짓불은 소설의 곳곳에서 무섭게 번쩍이고 있었다.” 박준은 그의 소설과 인터뷰에서 끊임없이 전짓불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그 비밀의 전말은 이렇다.

6·25 전쟁이 한창이던 박준의 유년기에 그가 겪은 경험이다. 경찰대와 공비가 번갈아 시골 마을을 점령해 사람들을 서로 다른 편으로 몰아 죽이던 시절. 한밤중에 갑자기 방문이 열리고 환한 전지불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전짓불에 가려 전등을 든 사람의 정체는 알 수 없다. 그는 경찰대 사람인가 공비인가? 그런데 전등을 든 사람이 불빛 뒤에서 묻는다. “너는 어느 편이냐?” 전짓불은 대답을 강요한다. 그러나 대답할 수 없다. 어느 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생사가 엇갈리는 절박한 상황임에도 불빛 뒤에 선 사람이 어느 쪽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선택을 강요하는 전짓불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극도의 공포와 무력감만이 나를 사로잡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말을 해야 한다. 말하기를 강요하는 전짓불의 추궁 때문이다.

‘소문의 벽’은 작가 이청준의 자전적 성격이 강한 소설이다. 실제 검열로 소설 연재를 중단해야 했던 작가 자신의 경험이 그대로 투영돼 있고, 박준이 썼다고 소설 속에서 소개되는 소설들도 대개는 이청준 자신이 이전에 발표했던 소설들이다. 박준이 이야기하는 전짓불의 경험도 마찬가지다. 이도 역시 작가 이청준이 유년시절에 실제로 겪었던(적어도 보거나 들었던) 경험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는 좌우 이데올로기 대립의 와중에서 폭력적인 방식으로 어느 한쪽을 선택하기를 강요당했던 역사적 상처가 녹아 있다. 이청준은 ‘소문의 벽’에서 그 경험을 억압적인 통제사회에서 작가가 처한 글쓰기의 조건으로 번역한다. 그에 따르면 이것은 억압적인 감시의 시선 아래서 정직한 진술을 해야 하는 작가의 상황이다. 박준은 말한다.

그런데 나는 요즘 나의 소설 작업 중에도 가끔 그 비슷한 느낌을 경험하곤 한다. 내가 소설을 쓰고 있는 것이 마치 그 얼굴이 보이지 않는 전짓불 앞에서 일방적으로 나의 진술만을 하고 있는 것 같다는 말이다. 문학 행위란 어떻게 보면 한 작가의 가장 성실한 자기진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지금 어떤 전짓불 아래서 나의 진술을 행하고 있는지 때때로 엄청난 공포감을 느낄 때가 많다.

이청준은 감시와 통제의 시선 아래 발가벗겨진 저 작가의 공포를 ‘전짓불의 공포’라고 불렀다. 전짓불은 개인의 진실을 용납하지 않는 폭력적인 세계에서 “한 작가로 하여금 끝끝내 정직한 진술을 할 수 없게 만든 방해 요인의 상징”이다. 물론 전짓불은 박준 한 사람만의 것이 아니다. 누구나 자기의 전짓불을 가지고 있으며 그가 정직한 진술을 하려고 할수록 그것은 두렵고 공포스런 빛을 쏘아댄다. 그것은 억압적인 사회에서 모든 작가가 스스로 짊어져야 하는 수형의 고통이다. 그에 따르면 “작가란 괴로운 일이지만 그 정체가 보이지 않는 전짓불의 공포를 견디면서도 끝끝내 자신의 진술을 계속해 나갈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 운명을 짊어진 사람”이다.

전짓불로 상징되는 감시와 통제의 시선은 진실을 말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놓고 진실을 말하기를 강요한다. “어서 말을 해!” 이것은 감시자의 명령이다. 이는 분명 외부의 폭력적인 강요이며 딜레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작가가 자기 것으로 떠안아야 할 피치 못할 작가의 운명이기도 하다. 작가는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그를 무릅쓰고 진실을 말해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소문의 벽’은 그렇게 자유를 억압하는 폭력적인 사회에서 소설을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숙고하고 성찰하는, ‘소설로 쓴 소설론’이다.

‘소문의 벽’의 소설가 박준은 결국은 미쳐서 실종됐다. 그리고 ‘소문의 벽’이 책으로 묶여 나온 해인 1972년, 대통령에게 초헌법적 권한을 부여한 유신헌법이 공포되면서 길고 긴 유신의 공포정치가 시작됐다. 소설가 박준은 박정희 유신체제의 억압과 폭력과 감시의 공포를 미리 앞당겨 제 몸으로 앓았던 사람이었다. 또한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말해야 하는 작가의 운명을 자신의 비극적 파멸로 증명한 사람이었다. ■ 이청준은
억압·폭력 비판하다 실존주의적 문제작 다수 발표


1939년 전남 장흥에서 태어나 서울대 독문과를 졸업했다. 1965년 ‘사상계’에 단편 ‘퇴원’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온 이후 40여 년간 수많은 작품들을 남겼다. 1968년 ‘병신과 머저리’로 제12회 동인문학상, 1978년 ‘잔인한 도시’로 제2회 이상문학상, 1986년 ‘비화밀교’로 대한민국문학상, 1990년 ‘자유의 문’으로 이산문학상을 수상했다. 초기작에서는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소외된 삶을 살아가는 인물들의 불행과 상처를 주로 관념적 상징적 수법으로 그리면서 그들의 삶에 지배력을 행사하는 억압적 세계의 폭력을 비판한다. 이후 이청준은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사회의 메카니즘을 다방면으로 다루는 소설들을 쓰는 한편 언어의 진실과 말의 자유, 인간 존재와 삶의 실존적 본질을 천착하는 문제작들을 연이어 발표하면서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중요한 작가로 자리잡는다. 대표작으로 장편소설 ‘당신들의 천국’ ‘낮은 데로 임하소서’ ‘씌어지지 않은 자서전’ ‘춤추는 사제’ ‘이제 우리들의 잔을’ ‘흰옷’ ‘축제’ ‘신화를 삼킨 섬’ 등이 있고 소설집 ‘별을 보여드립니다’ ‘소문의 벽’ ‘가면의 꿈’ ‘자서전들 쓰십시다’ ‘살아 있는 늪’ ‘키 작은 자유인’ ‘서편제’ 등이 있다. 2008년 7월 지병으로 별세했다.

<문학평론가 김영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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