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현의 기독문학기행] 삶의 망망대해 떠돌던 조각배 구원을 받다

7일 오후 인천 강화군 하정면 창후리 선착장에서 바라본 바닷가에 노을이 내리고 있다. 조경희 작가는 고향 강화도의 푸른 산과 노을이 내리는 바닷가 그리고 인정이 많은 고향 사람들을 그리워했다.
 
'조경희 수필문학관' 내부.
 
조경희 작가가 어린시절 다녔던 강화 온수리 성공회 성당. 1906년 건축된 성당으로 동서양의 문화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모습이다.
 
인천 강화군 온수길 정족산 자락에 위치한 온수리 성공회 성당 앞 마당에서 아이들이 공놀이를 하고 있다. 왼쪽 건물은 새로 건축된 성당, 건물 오른쪽은 목조로 지어진 옛 성당이다.
 
조경희 작가


‘한국 수필문단의 어머니’로 불리는 조경희(1918∼2005) 문학의 키워드는 끊임없는 자기성찰과 반성이다. 그의 글은 생활에서 우러나온 이야기들이다. 이런 진솔함은 독자들에게 자연스럽게 다가간다.

“나는 일찍이 얼굴이 예쁘지 못해서 비관까지 한 적이 있었다. 여학교 일학년 때라고 생각된다. 나하고 좋아지내던 상급생 언니가 나를 통해서 알게 된 나의 친구를 나보다 더 좋아하는 일이 생겼다. 나는 한꺼번에 두 가지를 잃어버렸다. 지금까지 언니처럼 믿고 의지해 오던 상급생 언니, 그리고 한시도 떨어질 수 없는 절친한 친구를 한번에 잃은 섭섭한 마음에 사로 잡혔다. 그때 나는 내 친구가 나보다 뛰어나게 예쁘기 때문에 패배한 것으로 자격지심을 먹고 그 당시 미국에 계신 아버지에게 ‘왜 나를 보기 싫게 낳아 주셨느냐’는 원망스러운 항의의 글을 보냈다. 그때 아버지는 나 같은 철부지를 점잖게 상대를 해주셨던 기억이 새롭다.”

1978년 중학교 교과서에 실렸던 수필 ‘얼굴’의 한 대목이다. 조경희는 이 수필에서 ‘인간은 얼굴이 예쁜 것으로 잘 사는 게 아니라 마음이 아름다워야 사람 노릇을 한다’고 타이르는 아버지의 격려를 추억하며 ‘존경과 흠모의 대상이 돼야 할 지도자나 교육자의 얼굴에서 야망과 욕심이 불타는 인상을 느끼면 실망하게 된다’는 것으로 이야기를 확장시켰다.

1971년 한국수필가협회를 창립해 초대회장을 지내며 수필문학 발전에 기여한 그는 이화여전 문과를 졸업한 후 오랫동안 언론계에서 활동했다. 한국 최초의 여성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예총) 회장, 정무 제2장관, 예술의 전당 이사장을 역임하며 문화예술계 발전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한 인물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를 청청한 목소리로 장내를 압도한 여장부의 모습으로 추억한다. 이렇게 다양하고 화려한 사회적 경륜을 가진 그가 어떻게 글을 쓰게 됐을까. 그는 자기 성찰을 위해서 글을 쓴다고 했다.

“나는 붓을 들면서 이런 생각을 가졌다. 나의 신변을 정리하고 밝은 내일을 갖기 위해 생활의 반성을 글로 써 보자는 것이었다. 그런 탓인지 몰라도 그동안 나는 어려운 제목을 가지고 글을 써 오지 않았다. 물론 제 사고 능력이 거기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도 우선 눈길을 내 신변에 돌렸기 때문에 어려운 제목에 어려운 내용을 담을 수 없었다.”(‘글을 쓰는 어려움’ 중에서)

들꽃 같은 소박한 향기

수필은 삶의 이야기를 통해 인생을 반성하게 하는 ‘사색의 거울’이다. 자신의 생활로부터 자연스럽게 발원해 나온 삶의 목소리이다. 그래서 다른 장르의 문학과 달리 작가의 삶과 철학을 가까이서 느낄 수 있다. 작가는 평범한 일상의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가 잊기 쉬운 일상의 철학을 이야기했다. 현란한 수사를 피하고 주변세계를 있는 그대로 드러냈고 구김살 없는 투명한 언어로 일상 속에 숨겨진 삶의 진실을 그렸다. 그래서 그의 문학엔 평범한 언어로 빚은 야산의 들꽃 같은 소박한 향기가 있다.

작가는 늘 고향의 푸른 산과 노을이 내리는 바닷가 그리고 인정이 많은 고향 사람들을 그리워했다. 그는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393번지, 정족산이 멀리 바라보이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13세까지 성장했다. 그의 삶의 흔적을 만나기 위해 지난 7일 강화도를 찾았다.

“나는 외국에 나갔다가 한국 땅에 들어설 때마다 왠지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끼게 된다. 솔밭 등성이를 넘어서 타박타박 걸어오는 소녀의 모습을 다시 찾아본다. 작은 성당은 소녀인 나를 지켜주었다. 학교보다도 오히려 작은 성당이 지나간 날의 전부인 것처럼 나를 사로잡고 있었다. 우리 마을에 이 작은 성당이 없었다면 나는 어느 곳을 더듬고 다닐 것인가. 내 주 예수 하나님을 어디서 만날 수 있었을까. 나는 망망대해의 풍랑에 밀려 떠도는 조각배처럼 삶의 방황에서 헤어나지를 못했을 것이 아닌가.”(‘작은 성당’ 중에서)

그의 조부모는 성공회 신자였고, 부친 조광원 신부는 강화도 온수리 성공회 사제였다. 조 신부는 목회생활과 더불어 일제에 빼앗긴 나라의 독립을 위해 활동했으며 교회일치운동을 벌였던 인물이다.

작가가 어린 시절 다녔던 온수리 성공회 성당에 들어서는 순간 시간여행자가 된 듯했다. 대문은 솟을대문 형식의 삼문인데 가운데 칸을 높이 들어 올려 종을 달았다. 삼문을 통과해 마당으로 들어서니 왼편엔 새로 건축된 성전이 웅장한 모습으로 자리 잡고, 오른편엔 목조로 지어진 옛 성당이 있었다. ‘성안드레성당’이란 팻말이 붙은 성당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오래된 나무의 체취가 났다. 성당은 1906년 영국인 주교 조마가가 지은 건물로 동서양의 문화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모습이다.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52호이다.

‘글밭’의 밑거름은 하나님 사랑

작가는 일상생활 자체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본다. ‘굴뚝 청소부’나 ‘걸인찬(乞人讚)’ 등에서 그냥 지나쳐 버리기 일쑤인 삶의 단면을 예리하게 표착해 인간에 대한 보편적 애정을 진득하게 녹였다. 그 자신의 이러한 풍모는 어렸을 때부터 생활의 중심이 됐던 기독교 교리에 기초한 인생관 때문이라고 말한다.

“나는 어려서부터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나의 인생관이란 기독교 교리를 기초로 해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적 인생관이란 나보다도 남, 신을 위한 생활이다. 아침 자리에서 일어날 때와 밤 잠자리에 눕기 전 베갯머리에 꿇어 엎드려 묵상하는 시간. 나의 일거일동은 진하고 끊임없는 대화 속에서 진행되는 생활이라 할 것이다.”(‘치자 꽃’ 중에서)

그는 말씀을 사랑했다. “우리의 신앙을 키워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가장 크게 강조하신 사랑의 정신이야말로 두꺼운 성경 속의 어떤 말씀보다도 가장 큰 말씀이 아닌가 싶다. 사랑이 큰 정신이라는 것을 깨달으면 그 다음은 실천에 옮기는 일이다. 그것도 한 손이 하는 일을 다른 손이 모르게 하라는 대목을 보자. 얼마나 아름다운 말씀인가.”(‘고백’ 중에서)

수필은 사색의 거울

작가는 1938년 ‘한글’지에 ‘측간단상’으로 당선돼 70여년간 10권의 수필집과 1권의 자서전을 출간, 일상생활의 정감과 세상사를 소박하고 쉬운 문장으로 담아냈다. 나이 듦과 광복 후 전쟁과 피란 그리고 전후 사회에 대해 감각적으로 사색하며 수필을 썼다. 그의 수필은 주로 인간애를 불러일으키는 휴머니즘에 바탕을 두고 생활인들의 아름다운 마음을 형상화했다. 대표 수필집으로 ‘우화’를 비롯해 ‘가깝고 먼 세계’ ‘음치의 자장가’ 등이 있다. 75년 한국문학상, 82년 서울시문화상, 87년 대한민국문화예술상을 수상했다.

인천시 강화읍 관청리 강화문학관 2층에 있는 ‘조경희 수필문학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작가의 육필원고와 생전에 사용하던 책상, 안경 등과 미술품 등이 정갈하게 전시돼 있다. 전시관 중앙에 재현된 작가의 서재는 평소 소박하고 강직한 작가의 성격을 고스란히 담아낸 듯했다. 시편 23편이 쓰인 병풍이 눈길을 끌었다. 자기반성을 위해 글을 쓰며 늘 말씀을 묵상했던 작가의 모습이 그려졌다.

“푸근하고 오래 앉아있어도 권태가 나지 않고 편안한 자기에게 알맞은 의자를 만들어 내기는 과히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일생을 두고 이와 같이 어울리는 꿈의 의자 이상의 의자란 좀처럼 만들기 어려운 것이 아닌가 싶다.”(‘의자고’ 중)

■ [조경희처럼 생각하기]
“유다 배신 알면서도 모른척한 예수 마음으로”


조경희 작가의 글을 읽으면 ‘수필은 정직한 삶의 이야기’란 게 명징하게 와 닿는다. 삶의 고백이 묻어나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을 의심하기보다 믿는 것이 행복하다 여겼다. 유다의 배신을 알면서도 모른척했던 ‘예수님의 관심법(觀心法)’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의 관심법은 사람의 결점과 의심스러운 행위를 알게 된다고 해서 그것을 탓할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잘못을 덮어줌으로써 서로에게 힘이 되는 것으로 활용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천 년 전 예수를 팔아넘긴 유다는 하나였지만 지금은 유다가 너무나 많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배반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나 역시 깜짝 놀랄 정도로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당하는 배신은 실망이 커서 화도 나지 않는다. 그러나 어찌 충신 같은 우정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기대한 만큼 가슴 아픈 일이기에 그런 일이 생기지 않게 사는 것이 현명한 일이 아니겠는가.”(‘관심법’ 중에서)

작가는 길에서 마주치는 걸인들을 그냥 보내지 않는 따뜻한 심성을 가졌다. “내가 한 푼을 던졌다고 해서 그들의 형편이 더 나아지기야 하겠는가. 이것은 상대방에게 기쁨이 되기 이전에 내 마음이 점점 평안해지는 일이다.”(‘광채 나는 해여’)

평소 작가와 가까이 지낸 소설가 정연희 권사는 그를 철저한 신앙인이었다고 한 추모의 글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선생님은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철저한 신앙인이었다. 선생님은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나에게 ‘기도해 주어, 기도뿐이야!’라며 간절하게 기도를 부탁하셨다. 때로는 전화로 기도문을 외워드렸다. 만나뵈었을 때는 선생님의 손을 잡고 기도했다. 그렇게 기도하면 어린아이처럼 기뻐하셨다. 선생님의 철칙은 남의 말을 하시지 않는 것이었다. 칭찬할 일이 아니면 그가 누구며 무슨 일을 했든지 절대로 제삼자와 남의 이야기를 하시는 일이 없었다. 남에게 무슨 박해를 받아도 그 사람을 원망하는 말이나 그 사람의 흠을 드러내어 말씀하는 것을 들은 일이 없다.”

인천=글·사진 이지현 선임기자 jeeh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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