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의 현장을 찾아서 <제1편>] ‘성찬론’ 견해 큰 차이… 각기 다른 길 간 츠빙글리와 루터

스위스의 종교개혁자 츠빙글리가 목회했던 취리히의 그로스뮌스터교회 외부 모습.
 
츠빙글리와 후계자 불링거가 사용했던 목양실.
 
츠빙글리 초상화.
 
주도홍 교수


16세기 스위스 종교개혁의 선구자 츠빙글리(1484∼1531)를 만나기 위해 취리히의 그로스뮌스터교회로 향했다.
교회는 츠빙글리가 1519년부터 1531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12년간 목회했던 곳이다.
취리히는 수도 베른에서 동북쪽에 위치한 도시로, 시내에는 맑고 시원하게 흐르는 강이 가로지른다.
이 강을 따라 도심으로 들어가다 보면 어렵지 않게 교회를 만날 수 있다.
교회는 좌편 언덕에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며 우뚝 솟아 있다.


예배당 안으로 들어섰을 때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곳은 독특하게 예배당 내부 사진 촬영이 엄격히 금지돼 눈으로만 감상해야 했다. 강대상 아래로 음침한 공간이 보였다. 중세에 교회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의 시신을 묻은 묘지였다. 강대상 아래에 묘지가 있다니, 한편으로는 섬뜩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활의 소망을 보는 듯 했다. 어쨌든 이곳에서 츠빙글리는 그 혼돈의 시기에 가장 소문난 ‘민중의 설교자’였다.

중세 당시 그로스뮌스터교회는 콘스탄츠 교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교회로 소문이 나 있었으며, 츠빙글리의 설교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츠빙글리는 꾸밈이 없고 명료하며, 모든 사람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설교를 통해 복음을 해석했다. 1520년 취리히 시민과 시의회는 도시와 농촌에서 목회하는 모든 설교자들이 츠빙글리의 주석을 모델로 설교할 것을 공식화했다.

개혁교회를 태동시킨 스위스 종교개혁

츠빙글리를 중심으로 한 스위스 종교개혁은 독일 종교개혁과는 다른 모습을 띈다. 스위스 종교개혁은 독일보다 2년 후인 1519년을 기점으로 1712년 일어난 제2차 빌메르겐(Vilmergen) 전쟁을 통한 신앙고백으로 종결됐다. 스위스 종교개혁은 국가 연합인 연방제의 특성에 따라 다양한 축을 중심으로 여러 종교개혁자들이 이끌었다. 독일의 종교개혁으로 루터교회가 형성됐다면, 스위스는 개혁교회를 태동시켰다.

츠빙글리가 1523년부터 취리히에서 활약했던 것처럼 장 칼뱅은 1536년부터 제네바를 ‘개신교의 로마’로 만들려 했다. 츠빙글리의 후계자 불링거는 1549년 칼뱅과 더불어 성찬론에서 갈라졌던 츠빙글리주의자와 칼뱅주의자를 ‘콘센수스 티구리누스’로 불리는 신앙고백을 통해 하나로 묶었다.

조금은 복잡하지만 성찬론을 살펴보자. 당시에는 성찬론에 있어 다양한 입장 차가 있었다. 떡과 포도주가 주님의 몸으로 변화한다는 가톨릭교회의 화체설, 예수님께서 떡과 포도주에 함께한다는 루터의 공재설, 처음에는 기념설을 내세웠지만 나중에는 영적 임재설로 하나 된 츠빙글리와 칼뱅의 주장 등을 생각할 수 있다. 루터와 츠빙글리는 이 성찬론에 대한 견해의 차이가 컸다.

독일의 종교개혁이 독일과 북부유럽에만 머물렀다면 스위스 종교개혁은 네덜란드와 영국, 신대륙인 미국으로 확산되며 국제적 영향력을 발휘했다. 무엇보다 츠빙글리와 칼뱅에 의해 주도된 스위스 종교개혁은 성경에 근거를 두지 않은 교회의 모든 전통들을 거부했다. 그 결과 개혁교회는 꾸밈이 없는 예배당을 갖게 됐는데, 최고로 꾸민다는 게 교회당 벽에 성경 구절을 붙이는 장식 정도였다.

주교청이 사라진 교회 조직은 총회와 노회, 공동의회로 구성됐다. 츠빙글리는 한동안 교회에서 오르간 등 악기 사용을 금했다. 자신이 뛰어난 바이올린 연주자였음에도 츠빙글리는 오르간과 같은 악기는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이유로 금지했다.

취리히대학교 신학과

그로스뮌스터교회 예배당과 연결돼 있는 취리히대학교 신학과는 츠빙글리의 종교개혁 사상에 입각해 신학생을 교육하는 대학이다. 크지 않은 정사각형 건물은 정사각형 정원을 가운데 두고 사방으로 둘러가며 강의실과 도서관 그리고 교무실로 구성돼 있다.

마침 츠빙글리를 전공하는 교회사 교수 한 명을 현장에서 만났다. 페터 오피츠(Peter Opitz)라는 교수로, 그는 한국을 방문해 강의한 경험이 있다고 했다. 오피츠 박사는 매우 친절하게 스위스 종교개혁에 대해 설명해줬다.

그의 아담한 연구실 중앙에는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사면의 책장엔 고서들이 즐비했다. 특히 19세기에 출판된 츠빙글리 전집이 눈에 띄었다. 중앙에 놓여있는 책상에는 얼마 전 출간했다는 자신의 새 책 ‘울리히 츠빙글리(Ulrich Zwingli)’가 20권 가량 쌓여 있었다. 그는 자신의 책 한 권을 선뜻 집었고 서명까지 해서 내게 선물했다. 츠빙글리를 개신교의 선구자로 연구한 118쪽 분량의 아담한 교회역사책이었다.

스위스 종교개혁 500주년은 2019년

그와 대화를 하는 중 정신이 번쩍 들었다. 스위스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내년이 아니라 2019년에 기념한다는 말 때문이었다. 독일 종교개혁과 스위스 종교개혁은 확연히 다르며, 2년의 차이를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독일 종교개혁이 역사에 새로운 전환을 가져왔다는 의미에서 2017년 종교개혁 500주년을 함께 기념하면 안 되겠느냐고 물었는데, 그는 너무도 태연하게 “스위스는 2019년 스위스 종교개혁 500주년을 지낼 것”이라고 답했다. 그는 “독일 종교개혁과 스위스 종교개혁은 전혀 별개 사안”이라며 “많은 사람들이 독일의 종교개혁 500주년에 들떠 있는데 우리 스위스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이어 “(개혁교회는) 여러 나라에 분산돼 있어 구심점이 약하다”면서 “독일처럼 거대 잔치로 500주년을 지내는 것은 어렵다”고 덧붙였다.

루터와 츠빙글리가 1529년 성찬론 문제로 멀어져 각기 다른 길을 걷게 됐다는 점을 기억할 때, 어느 정도 이해가 갔지만 그의 발언은 꽤 충격적이었다. 필자는 장로교도로서 신학적으로 스위스 개혁교회에 속해 있다. 그런데도 독일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이렇게 연구여행을 하고 있는데 오페츠 교수의 생각은 완전히 달랐던 것이다.

그의 말을 듣고 생각해보니 츠빙글리와 칼뱅이 만든 스위스 개혁교회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처럼 2019년 스위스 종교개혁 500주년이 더 자연스럽고 맞는 것 같기도 했다. 지금까지 루터의 종교개혁 현장을 돌아보며 가슴이 뛰었는데, 취리히 츠빙글리의 종교개혁 현장의 분위기는 이렇게 완전히 달랐다. 이로 인해 갑자기 마음이 식어가는 듯했다. 그러면서 16세기 역사의 한 장면이 눈앞을 스쳐지나가는 듯 했다.

츠빙글리는 1529년 성찬론 때문에 독일의 마부르크를 찾아왔다. 루터는 그와의 악수도 뿌리치며 “당신은 나와 다른 영을 가졌다”고 저주했다. 이후 스위스 종교개혁과 독일의 종교개혁은 함께할 수 없는 길을 가고 말았다. 칼뱅 역시 이러한 루터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글·사진=주도홍 교수(백석대·역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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