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현의 기독문학기행] 꿋꿋한 마음의 붓대, 신앙으로 세우다

충남 당진시 송악면 부곡리에 있는 ‘필경사’는 심훈 문학의 산실이었다. 정원에 조성된 상록수들이 푸르게 빛나고 있다. 심훈은 1934년 필경사를 직접 설계해 지었고 이곳에서 상록수를 집필했다.
 
필경사의 전경.
 
‘심훈의 집’이란 팻말이 붙어있는 필경사 현관과 소설 ‘상록수’ 주인공 동혁과 영신의 조형물.
 
상록수교회(왼쪽)와 한진포구
 
소설가 심훈


한 자루의 붓, 그것은 그에게 쟁기였고 연장이었다. 그는 붓을 든 ‘심장의 파수병’이었다. 소설가 심훈(1901∼1936)은 농촌 계몽소설 ‘상록수’를 쓴 일제 식민지 시대의 작가이다. 우리에게는 ‘상록수’의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그날이 오면’이란 저항시로 유명한 시인이며, 영화인이었고 언론인이기도 했다. 지난 달 21일 ‘심훈 문학’의 산실인 충남 당진시 송악면 부곡리의 필경사(筆耕舍)를 찾았다. 그는 민족의식과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지닌 당대의 지식인이었다. 1934년 직접 설계해 지은 필경사에서 ‘상록수’를 집필했다. 필경사는 마음의 붓으로 논밭을 일구자는 뜻의 당호이다. 그는 원고지에 농사를 지었다.

“우리의 붓끝은 날마다 흰 종이 위를 갈며 나간다/한 자루의 붓, 그것은 우리의 쟁기요, 유일한 연장이다…우리의 꿋꿋한 붓대가 몇 번이나 꺾였었던고…파랗고 빨간 잉크는 정맥과 동맥의 피 최후의 한 방울까지 종이 위에 그 피를 뿌릴 뿐이다.”(심훈의 시 ‘필경(筆耕)’ 중에서)

마음의 붓으로 논밭을 일구다

필경사는 대지 661㎡에 건평 62㎡인 아담한 팔작지붕의 목조집이다. 벽체는 황토를 짓이겨 바른 전형적인 농촌의 초가이다. 이곳은 한때 교회로 사용됐다. 심훈의 둘째 형 심명섭 목사가 6·25 때 납북되면서 그의 부인 권유회 권사가 이곳으로 내려와 51∼70년까지 심훈가(家) 가족들과 피란민을 중심으로 예배를 드렸다. 이후 심훈의 장조카가 관리해 오다 당진시청에 기념물로 기증해 오늘에 이른다. 필경사 옆엔 심훈의 생애와 문학세계를 돌아볼 수 있는 ‘심훈 기념관’이 있다.

필경사를 둘러싼 우거진 숲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무성한 솔잎들이 바닷바람에 부딪혀 풀 먹인 홑이불 소리처럼 사각거리는 소리를 냈다. 마당에 세워진 ‘그날이 오면’ 시비 앞에 걸음을 멈췄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 끊치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나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우렁찬 그 소리를 한번이라도 듣기만 하면/그 자리에 꺼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소설 속 재회의 장소 큰덕미

이 마을 일대는 소설 ‘상록수’의 무대이다. 소설 속 한곡리는 부곡리와 한진리 두 마을을 합쳐 이름 지은 가상의 마을로 주인공 박동혁이 열정적으로 농촌계몽운동을 펼친 곳이다. 또 소설 속 채영신이 바닷길을 통해 부두(한진포구)로 오는 길은 심훈이 바다를 통해 서울로 가던 길이었다.

“해변에서 새우를 잡아 말리고, 준치나 숭어를 잡는 철이 되면, 막살이를 나오는 술장수에게 빌려주는 오막살이의 방 한칸을 빌렸다” 소설 ‘상록수’에 그려진 마을 풍경이다.

소설 속 기억을 되짚어가며 한진포구로 갔다. 한진포구는 소설에서 말하는 ‘큰덕미’이다. 지금은 부곡국가산업단지로 변했지만 농촌인 부곡리와 갯마을 한진리는 아산만 갯벌과 염전을 가르는 신작로로 연결돼 있다.

소설에서 “큰덕미는 하루 한 번 똑딱이(석유 발동선)가 와 닿는 조그만 포구로, 주막 몇 집과 미루나무만 엉성하게 선 나루터”로 그려졌다. 동혁이 영신을 기다렸던 곳이었다. 현실 속의 ‘큰덕미’는 한진리 해변의 조그만 산이었으나 공단이 들어서면서 지금은 사라졌다.

“이른 아침 동혁은 찢어진 지우산을 숙여 쓰고 ‘큰덕미’로 갔다. 쇠대갈산 등성이 위에 올라 머리를 드니, 구름과 안개에 싸인 바다가 눈앞에 훤하게 터진다. 무엇에 짓눌렀던 가슴이 두 쪽에 쩍 뻐개지는 것 같은 통쾌감과 함께, 동혁은 앞으로 안기는 시원한 바람을 폐량껏 들이마셨다가 후우 하고 토해내고는 휘파람을 불며불며 나루께로 내려갔다.”

동혁이 영신을 기다렸던 한진포구엔 실제로 70년대 초반까지 인천을 왕래하는 여객선이 드나들었고, 80년대 초까지 경기도 평택을 오가는 배가 운행됐다.

그 포구에 서니 멀리 서해대교가 한눈에 들어왔다. 소설에서처럼 파란 뺑끼칠을 한 똑딱이가 선체를 들까불며 들어올 듯하다. 갑판 위에서 손수건을 흔드는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가 보일 때 동혁은 손을 높이 들고 흔들었을 것이다.

욕망에 맞서는 가장 강력한 무기

심훈이 ‘상록수’를 쓰게 된 직접적 계기가 된 것은 당시 신학교를 졸업하고 경기도 산골에서 농촌운동을 하다 과로로 숨진 최용신에 대한 신문기사였다.

‘상록수’가 쓰일 무렵 이 나라의 농촌은 무지와 빈곤 속에 극도로 피폐해 있었다. 이러한 극한 상황 속에서 문맹 퇴치와 빈곤 타파에 목표를 둔 농촌계몽운동이 일어났다. ‘상록수’를 통해 작가는 농촌의 빈곤과 무지의 원인을 가진 자의 횡포와 없는 자의 고통으로 대립시켜 시대적·사회적 맥락에서 천착했다.

기독교정신으로 농촌계몽활동에 앞장섰던 상록수의 두 주인공은 상록수처럼 변치 않는 사랑과 믿음으로 나라와 민족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 전 생애를 바쳤다. 채영신의 실제 인물 최용신은 경기도 반월 샘골 마을에서 천곡학원 등을 세우며 농촌계몽운동을 한 인물이며 박동혁의 실제 인물 심재영은 심훈의 조카로 역시 농촌운동을 했다. 두 사람은 실제로는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였다.

심훈은 경성농업학교를 졸업한 후 고향에 돌아와 ‘공동경작회’를 만들어 농사개량과 문맹퇴치운동을 벌이던 자신의 장조카 심재영을 박동혁으로, 최용신을 채영신으로, ‘공동경작회’를 ‘농우회’로 바꾸었으며, 그밖에 지명도 이름만 바꾸었을 뿐 실제 지역을 토대로 작가의 창조적 상상력을 결합해 한편의 작품을 완성했다.

필경사 인근엔 ‘심재영의 고택’이 있다. 심재영씨가 30년에 짓고 95년 소천할 때까지 평생을 산 한옥이다. 심훈은 32년 이 고택으로 낙향해 34년 필경사를 지어 이주할 때까지 이곳에서 ‘직녀성’과 ‘영원의 미소’를 집필했다. 심훈은 애국가 곡조를 붙인 ‘부곡리 애향가’(농민 애국가)를 만들어 보급했다. 이 노래는 부곡리 주민들에게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고택 안의 소나무 숲을 거닐었다. 숲 사이로 상록수교회가 보였다. 상록수교회는 51년 9월 23일 필경사에서 첫 예배를 드림으로 교회의 기초를 세웠다. 그 후 21년간 필경사를 교회당으로 사용했고 2차 교회당을 거쳐 2001년 4월 16일 현재의 자리에 3차 교회당으로 신축 봉헌됐다. 심훈의 이모 윤병영 전도사가 초대와 제8대 담임교역자로 사역했다. 부곡교회로 설립되었으나 2007년 심훈의 농촌계몽운동을 신앙적 계몽운동으로 이어가려는 뜻을 담아 상록수교회로 개명했다.

상록수와 함께 운명을 다하다

심훈은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3남 1녀의 막내로 자랐다. 서울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그는 경성제1고등보통학교 4학년에 재학 중 3·1만세운동에 적극 가담해 4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출감 후 상하이로 이주, 항저우의 치장대학에 진학해 3년간 수학한 뒤 23년 귀국했다. 이때부터 문필활동을 시작했다. 신극 연구단체인 극문회(劇文會)를 조직했고 이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기자로 일했다. 27년엔 영화 ‘먼동이 틀 때’를 원작·감독해 개봉했다.

장편 ‘상록수’(1935)가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기념 현상소설로 당선, 작가로서 크게 부상되기 시작했다. 당선상금 500원 중 일부로 ‘상록학원’을 설립했으며 ‘상록수’의 영화화를 계획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포기했다. 그는 ‘상록수’의 출판 교정을 보느라 한성도서 주식회사 2층에서 기거하다 장티푸스에 걸렸는데 대학병원으로 옮겨진 후 급서했다. 서른여섯 살이었다. 상록수는 심훈의 마지막 작품이 됐다. 상록수처럼 늘 푸르고자 했던 그는 항일 민족문학의 영원한 청년이었다.

[심훈처럼 생각하기]
청빈과 무소유 그리고 자유와 평등


세찬 비바람에 꺾이지 않는 당당함과 역사의 억압에 굴하지 않는 푸른 절개. 그 어떤 역경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상록수(常綠樹)’ 정신은 기독교 정신과 맞닿아 있다.

심훈(사진)은 청빈과 무소유, 그리고 자유와 평등에 기반한 정신을 이기적 욕망에 맞설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로 여겼다. 그래서 ‘상록수’의 주인공 동혁의 입을 통해 기독교에 대한 분명한 신념을 말한다. “신념을 굳게 하기 위해서나 봉사의 정신을 갖기 위해서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좋겠지요. 그렇지만 자본주의에 아첨을 하는 그따위 타락한 종교는 믿고 싶지 않아요.”

소설 속에서 영신은 시종일관 독실한 기독교신자로 그려지는 데 반해 동혁의 사상은 모호하게 처리된다. 이에 대해 박헌호 문학평론가는 “동혁의 말대로 자본주의에 아첨하는 기독교 세력으로부터 민족적이며 진보적인 기독교 세력을 분리하고 이들과의 제한적 연대 속에서 농촌 운동을 활성화하려는 욕구가 투영된 것”이라고 말했다. 좀 더 진보적인 쪽과 연대함으로써 운동의 실리를 취하고자 했던 심훈의 의도가 기독교에 대한 동혁의 어정쩡한 태도 속에 녹아 있다고 보는 것이다.

영신은 기독교적 휴머니즘 정신에 따라 농촌계몽운동을 실천해 나갔다. 흔히 기독교적 휴머니즘이라고 하면 개량주의적 자세라고 비판하지만 그녀는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며 문맹퇴치를 주장하면서 동시에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먹지 말라” “우리를 살릴 사람은 결국 우리뿐이다”에서 보듯이 난관을 극복하려는 자립적이며 적극적인 자세를 내보이고 이를 실천했다.

심훈은 헌신적인 농촌봉사 끝에 과로로 목숨을 바친 영신의 희생양적인 이미지를 부각했다. 예수의 사랑을 이론이 아닌 대지에 뿌리박은 꿋꿋한 상록수처럼 실제적인 현실과 결합 한 것이다.

당진=글·사진 이지현 선임기자 jeeh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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