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윤고은] 엽서의 미학



십 년 전만 해도 여행할 때 종종 엽서를 부치곤 했는데, 언젠가부터 카카오톡이 대신하게 됐다. 엽서를 넣으면 어느 시점에 알아서 보내준다는 우체통도 종종 만났지만 그럴 때도 나는 카톡을 선택했다. 그 우체통 앞에서 사진을 찍어 보내거나, 지금 그 앞에 와 있다 하고 보냈던 것이다. 그러니 방금 산 엽서 몇 장은 어떤 기능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세심하게 엽서를 골랐다. 이 칼럼에서도 종종 알파벳 하나로 압축되는 지인들에게 부치기 위해서다. 여기는 캐나다 프린스에드워드섬이고, 저 앞에는 루시 모드 몽고메리가 일했던 우체국이 있다. 몽고메리는 ‘빨강머리 앤’으로 잘 알려진 앤(Anne) 시리즈를 쓴 소설가다. 그의 흔적이 남아있는 이 우체국에서는 앤 도장이 찍힌 엽서를 부칠 수 있다.

나는 섬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중 하나인 몽고메리의 집터 부근 꽃밭에서 엽서를 썼다. 햇빛과 바람의 동선이 읽힐 만큼 사방이 고요했다. 동행인 L이 엽서를 쓰다가 중얼거렸다. “나 글씨를 좀 못 쓴 것 같아.” 내가 말했다. “나도!” 정말 내 글씨도 별로였다. 엽서 재질이 글씨를 예쁘게 쓰기는 좀 힘들지 않은가. 코팅돼 있어 펜이 미끄러지도록 만드는 느낌이랄까. L이 또 말했다. “내용도 좀 엉망이야.” 나는 L보다 엽서를 몇 장 더 써본 사람답게 이렇게 대꾸했다. “원래 엽서의 생명은 스피드야! 쓰는 사람도 뭔 내용인지 모르고 쓰는 게 엽서의 미학이라고 할 수 있지. 종이가 있으면 그걸 쫙 찢어서 단면을 보여주는 거랄까.” 확실히 내 엽서는 그 미학대로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수신인들에게 필체와 문체를 변명하고 싶을 만큼 말이다.

그러나 쑥스러움을 잊을 때쯤 엽서는 누군가에게 닿을 것이고, 어쩌면 도착하지 않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여행 중에 보내는 엽서는 내용보다도 방향성 자체로 의미가 있는 거니까. 누군가를 향해 날아가는 그 행위 말이다. 여행 엽서란 그 여행의 파편 같은 것이다. 파편은 매끄럽지 않지만 어떤 순간을 온몸으로 증명하는 도구다. 파편을 나누는 마음, 그건 확실히 구애의 일종이다.

글=윤고은(소설가), 삽화=공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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