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김서정] 통증 잊는 법



살짝 넘어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왼쪽 엄지발가락을 된통 부딪쳤던 모양이다. 처음에는 조금 욱신거리더니 갈수록 강도가 심해지고, 예닐곱 시간 지나자 발가락이 온통 보라색이 됐다. 신경을 다른 데로 돌려줄 만한 책을 찾아 책장을 훑다가 ‘바퀴벌레 삐딱날개’라는 그림책을 뽑아들었다. 외톨이 바퀴벌레 하나가 음식 재료로 조각품 만드는 걸 좋아하는데, 그 작품은 번번이 도마뱀, 원숭이, 스라소니들이 가로채 먹어버린다. 화가 난 녀석, 자기보다 몸집 작은 잎꾼개미들을 골탕 먹이다가 사로잡혀 군대개미들에게 제물로 바쳐질 처지가 된다. 하지만 재능을 십분 발휘해 개미귀신 모형을 만들어내고 덕분에 평화를 되찾은 잎꾼개미들과 잔치를 벌인다. 바퀴벌레와 잎꾼개미들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겠지.

나는 이 기발한 스토리와 유머 넘치는 그림을 좋아했다. 작가는 인간들이 징그러워하는 동물을 골라 생생한 개성을 부여한다. 뱀, 박쥐, 하이에나, 바퀴벌레들이 그의 그림책을 통과하면 웬만한 반려동물보다 더 사랑스러운 캐릭터로 들어와 안긴다. 그랬는데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새로운 발견을 했다. 이거, 책에서 메시지 찾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장애인 이야기로 볼 수 있겠구나. 두꺼비의 끈끈한 혀를 피해 허겁지겁 도망치다가 날개가 꼬이는 바람에 통증에 시달리고, 삐딱날개라는 별명이 싫어 외톨이로 조각이나 하다가 대모험을 하는 바퀴벌레. 장애를 놀리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 장애가 있어도 자기계발을 꾸준히 하면 그걸로 인생의 전환점을 만들 수 있다는 교훈, 괴롭힘을 받는다고 해서 자기보다 더 약한 존재를 괴롭히면 안 된다는 교훈들이 얼마든지 나올 수 있겠구나.

처음 읽었을 때 이런 교훈들이 떠오르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랬다면 그렇게 좋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건 교훈이 떠오를 여지가 없이 스토리와 캐릭터와 유머와 빛나는 그림으로 독자를 매혹시키는 책이었다. 하지만 멋진 교훈들도 이렇게 많은데, 왜 절판이 된 걸까. 곰곰 생각해본다. 덕분에 발가락 통증이 잠시 잊혔다.

김서정(동화작가·평론가), 그래픽=공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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