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김서정] 나를 울린 남자



한 모임에서 ‘나를 울린 남자’가 화제로 나온 적이 있었다. ‘어떤 남자 때문에 울었다’가 하나씩 풀려나왔는데, 내 차례에 나는 네로를 입에 올렸다. 외국인을 사귄 적이 있었단 말이냐, 이탈리아 남자냐, 자리가 떠들썩해졌다. 그게 아니라 ‘플란더스의 개’에 나오는 네로다. 네로와 파트라슈가 얼어 죽는 마지막 장면에서 거의 통곡을 했다. 아마 중학교 2학년이었을 것이다. 나의 대답이었다. 나는 그때 하마터면 맞아 죽을 뻔했다.

나이 탓인지 더위 탓인지, 요즘 책을 읽어도 별 감흥이 안 생긴다. 주목의 대상이라는 소설을 의무감에 챙겨들어도 끝까지 읽기 힘들다. 어렸을 때는 얼마나 책을 재미있어 하면서 읽었는데. ‘국민학교’ 때는 빨강과 파랑 표지로 유명했던 계몽사 전집, 중고등학교 때는 정음사 세계문학전집, 대학 졸업 후 새롭게 동화의 신세계를 열어주었던 에이브, 에이스 전집. 이 굵직한 금맥들 외에도 강바닥의 사금처럼 빛나던 한 권 한 권의 책들이 떠오른다. 그 탐닉의 시간들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득하다.

하지만 그 아득한 시간을 번쩍 하는 사이에 되돌려주는 책도 있다. 몇 권의 그림책이 그렇다. 예를 들면 ‘잃어버린 줄 알았어’. 장난감 굴삭기를 갖고 놀던 아이가 흙을 파헤치다 잃어버린 줄 알았던 삽, 공, 모자를 찾아낸다. 점점 더 땅속으로 들어가면서 점점 더 어린 시절의 물건을 발견하는 아이는 아기침대에까지 닿은 뒤 깊은 잠에 빠져든다. 그리고 퍼뜩 깨어난 아이. 내려온 길을 되짚어 뛰어 올라가서는 굴삭기를 끌어안는다. 와, 다행이다! 잃어버린 줄 알았지! 아이의 얼굴에 희색이 가득하다. 기억 저 바닥의 과거와 풍요롭게 만나게 해주고, 거기서 얻은 기운으로 현재를 끌어안게 해주는 힘을 이 그림책은 선사한다. 사실은 새삼 이 그림책을 들여다보다가, 주룩주룩 내리는 비 때문이었을까. 갑자기 네로가 떠오른 것이다. 또 누가 날 울렸더라. 까맣게 잊고 있던 책 속 인물들이 계속 되살아난다. 잃어버린 줄 알았던 책읽기의 감흥을 이렇게 다시 찾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글=김서정(동화작가·평론가), 삽화=공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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