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유형진] 에어컨 죄책감



작년 여름도 굉장한 더위였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1994년 이후 가장 더운 여름’이라는 수식이 기상뉴스 끝에 붙곤 했었다. 올 여름은 작년보다 더 덥다. 작년엔 집에 에어컨이 있었지만, 실외기에 연결하지 않고 여름을 지냈다. 이사를 겨울에 했었고, 고층의 거실 창문이 맞바람이 통하도록 된 집이었기 때문에 여름을 보내보고 정 덥다 싶으면 그때 실외기에 연결하자 싶은 생각이었다. 게다 2년 후 전세계약이 끝나면 이사를 가야 할 상황인데, 여름한철 잠깐 나자고 거금의 설치비를 들여 에어컨을 연결하는 것도 아까웠다.

재작년 더위는 그럭저럭 지낼 만했다. 하지만 작년 여름엔 26층 아파트로 불어오는 바람마저 ‘불바람’이었다. 전세 만료 반 년을 남기고 에어컨을 설치하자니 100일 중 하루를 버티지 못하고 꽃이 된 ‘백일홍의 전설’처럼 뭔가 좀 억울한 것 같아 오기가 생겼다. 연일 ‘불볕더위’ 뉴스가 들리고, SNS 타임라인에서 더위에 대한 멘션과 포스트를 볼 때마다, 이 더위에도 나는 에어컨 없이 버틴다는 이상한 자부심도 있었다. 돌이켜보면 어떻게 그랬을까 싶다. 이 집에 이사 온 이후에도 넣을 자리를 잡지 못하고 베란다 구석에 놔둔 에어컨을 두고 올 여름도 그냥 버틸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결국, 에어컨 설치를 하고 말았다.

에어컨 설치의 가장 큰 이유는 아이가 학교를 그만두고 홈스쿨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년처럼 낮에 나 혼자 있는 집에 에어컨을 틀어야 하나 라는 ‘에어컨 죄책감’에서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었다. 굳이 신영복 선생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한 구절을 빌려오지 않아도, 한여름 냉방장치 없는 공간에 가까이 있는 사람은 그야말로 걸어다니는 난로다. 지구온난화로 매년 ‘사상 최고’라며 기온을 경신하고 있는 여름, 어디서도 이 더위를 피하지 못하고 버텨야만 할 분들을 생각하면 에어컨 죄책감은 매년 더 커질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누가 뭐라 해도 지구는 어김없이 돌고 있고, 이제 입추와 말복도 지났으니 이 더위도 곧 끝날 것이라는 사실이다.

글=유형진(시인), 삽화=공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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