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윤고은] 이미 애프터



카메라 관련 장비에는 특별한 관심이 없었는데, 그 세계의 애칭들이 눈길을 끌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애기백통→ 형아백통→ 엄마백통→ 아빠백통→ 새아빠백통’으로 이어지는 가계도 같은 것. 작명에 동의하느냐의 여부는 뒤로 미뤄두더라도 애칭은 확실히 눈길 끄는 간판 역할을 한다.

만두렌즈니 카페렌즈니 기발한 애칭들을 보다가 ‘여친렌즈’에서 눈이 멈췄다. 보편적인 여친렌즈가 두어 개 있었고, 많은 사람이 여친렌즈의 위력을 말하고 있었다. 나는 신이 나서 L에게 그 정보를 보여주었다. “여친렌즈라는 게 있다던데. 엄청 뽀샤시하게 나온대.” 내 말에 L이 깔깔대기 시작했다. 그는 이미 갖고 있었고, 내 사진 중 수만 장이 이미 그 렌즈를 통과한 결과물이었다. 나만 몰랐을 뿐.

예전에 친구가 옷가게에서 일을 해서 다른 친구들과 그 가게에 간 적이 있다. 우리 중 누군가가 거울 앞에서 옷을 이리저리 대보더니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이런 데 날씬이거울을 준비해둬야지, 그게 센스인데.” 그 말에 옷가게에 소속된 친구가 대꾸했다. “미안한데, 이거 이미 날씬이거울이거든.” 확실히 그랬다. 날씬이거울로 판명된 그 거울 앞에서 믿을 수 없어 하던 친구처럼, 나 역시 사진들을 이리저리 들여다보았다. 이게 이미 반영된 거란 말이야?

‘비포’라 믿었던 지금이 이미 ‘애프터’라는 사실에 새삼 멋쩍어지는 경우는 종종 있다. 음식 맛이 안 난다고 투덜댈 때 누군가가 조미료를 넣으라고 말해주거나(이미 조미료를 넣었는데!), 피부 상태가 별로라고 말할 때 누군가가 화장을 안 해서라고 위로해주거나(이미 화장했는데!), 가격표가 이미 할인가로 표기되었다는 사실을 계산대에서 알게 될 때(여기서 30% 할인이 들어가는 줄 알았는데!). 내 생각보다 ‘애프터’가 너무 빨리 와버린 상황 말이다. 그럴 때는 “거울이 잘못했네” “렌즈가 잘못했네” 해도 되고, 내가 겪은 착시현상을 누군가와 이런 식으로 공유해도 된다. 이런 소동이 우리를 웃게 하는 건 부인할 수 없으니.

윤고은(소설가), 그래픽=공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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