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김서정] 떨치고 일어나는 사람들



함께 동화 쓰는 동지들의 모임이 있었다. 비가 부슬부슬 오는 저녁이었다. 밥은 맛있었고, 술기운이 아니어도 대화는 왁자했다. 60대부터 30대까지 연령도 성별도 다양한 우리가 그날 특히 신나서 몰두한 소재는, 초등학교(일부는 국민학교) 시절로 되돌아간 듯 귀신 이야기였다.

놀랍게도 거의 대부분 귀신 체험이 있었다. 도깨비불, 가위눌림, 귀신 목격, 그림자 습격, 소리와 냄새와 촉감 체험 등등. 어린 시절 그 일이 얼마나 공포스러웠는지에 대한 토로는, 자라서 그 공포를 어떻게 극복했는지로 이어졌다. 종교적 방식으로, 과학적 납득으로, 건강 회복으로 등등. 그리고 한 사람이 이런 말로 마무리를 지었다. 사람 기운이 훨씬 세답니다. 정신 차리고 쫓아내면 그까짓 귀신, 못 당한대요.

미투 운동에 나선 사람들은 공포에 시달렸을 것이다. 몇 년에서 몇 십 년 동안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왜 싫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그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느냐, 죽을힘을 다해 저항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은 뭘 몰라도 너무 모르는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 문제는 머리와 몸만이 아니다. 정신과 혼이 무너진다. 아픔, 두려움, 수치, 모멸, 자책, 절망, 이 모든 것들이 뒤섞인 강력한 공포의 회오리 속으로 빨려들어가서 철저히 무력해진다. 그런 상태를 가해자와 잠재 가해자들은 죽어도 모를 것이다.

사실 그 공포는 귀신에 대한 공포처럼 불합리하다. 그런 공포는 있어서는 안 된다. 생기더라도 즉시 떨쳐내야 한다. 이제 떨치고 일어나는 사람들이 있으니 모두 도와야 할 일이다. 그 오랜 세월 얼마나 참담했을지 알아주고 위로해야 할 일이다. 그까짓 귀신, 우리 사람들보다 훨씬 약하다, 벌벌 떨며 주저앉고 꽁무니를 빼는 꼴 보이지 않았느냐, 이런 말을 건네고 싶어진다. 어리고 약해서 고스란히 떠안았던 공포를 떨쳐낼 만큼 자라고 강해진 거라고 하면 위안이 될까. 그들만의 성장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성장이 함께 가야 더 큰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 가볍게 떠들썩했던 귀신 이야기 뒤끝이 이렇게 무거워진다.

김서정(동화작가·평론가)

그래픽=공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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