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김서정] 진짜 축제



제주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는 유채꽃 축제가 열렸다. 거의 10㎞ 길 양옆으로 뻗어나가는 유채꽃, 그 뒤로 분홍 베일 드리우는 듯한 벚꽃. 작년에 본 그 황홀한 절경이 눈앞에 아른거려 올해도 개막날 나섰다. 난타에 무용에 안성 바우덕이 풍물단 공연까지, 흥겨운 구경거리도 많아 보였다.

그런데, 날씨가 궂다. 흐리고 찬바람 쌩 분다. 가는 길에 희끗한 게 날려 벚꽃잎이려니 했는데, 아니, 아니다. 눈이다! 심지어 차를 대고 행사장 쪽으로 걷는 도중에는, 이게 뭐냐, 우박이다! 사람들이 으아 비명을 지르며 주차장 쪽으로 우르르 뛰어 내려오는데,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꿋꿋이 올라가는 사람도 많다. 어묵탕 판매 부스는 문전성시고, 슬러시 판매 부스는 아무래도 망한 것 같다. 무대와 관중석은 완전히 초토화되어 있었다. 텅 빈 채 바람만 들끓는 행사장. 그래도 풍물단은 챙챙 둥둥 꿋꿋하게 연주를 이어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호된 우박과 무시무시한 바람 속에서, 수만평 땅에 가득한 유채꽃은 드물게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주었다. 형광빛 연두색 꽃들이 일시에 파도에 쓸리듯 누웠다 일어서 다시 달려가는 장관. 그토록 많은 꽃들이 그토록 다이내믹하게 움직이는 모양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거대한 풍력발전기 날개들이 예리하고 힘차게 돌아가는 소리는 바람 소리와 함께 절묘한 배경음악으로 어울렸다. 패딩 코트에 목도리 칭칭 두른 사람들 틈에 어깨 드러낸 원피스 차림으로 사진 찍는 아가씨는, 화룡점정이었다. 갑자기 통쾌한 기분이 든다. 주최 측은 말도 못하게 낙담했겠지만, 이거야말로 진정한 축제 아닐까. 일상을 벗어난 파격과 자유, 거기서 나오는 에너지를 받아안는 게 축제라면 말이다. 꼼꼼하게 짜 놓은 일정표를 일순 날려 버리는 날뛰는 날씨, 그 횡포도 무색하게 만드는 젊은 열기. 이런 것들 덕분에 삶이 다시 탄력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축제란 그저 먹고 마시고 구경하는 일이 아니라 돌발 변수로 정신이 번쩍 나게 하는 일이니, 나는 그날 잠깐이지만 진짜 축제를 본 셈이다.

김서정(동화작가·평론가)

그래픽=공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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