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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사랑하며] 해돋이
새해 첫날 아침, 남편과 함께 개를 데리고 산에 올랐다. 해돋이 명소에는 못 가도 동네 산에라도 오르자고 약속했던 터였다. 나는 인터넷으로 해가 뜨는 시간을 확인한 다음 성급히 옷을 주워 입고 집을 나섰다. 아직 어둑해서 산속을 걷는 것이 으스스했다. 어디선가 갑자기 산짐승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개는 나무 위의 청솔모를 보며 짖어댔다. 나는 휴대폰 랜턴으로 길을 비추며 천천히 산을 올랐다. 정상에 가까워지자 이마에 땀이 솟아났다. 앞쪽에 산을 오르는 노부부가 보였다. 할아버지는 지팡이를 짚고 서서히 산을 오르고 있었다. 앞서가던 할머니가 때때로 멈춰...
입력:2020-01-06 04:10:01
[살며 사랑하며] 귀신 잡는 약
“어떤 일로 오셨나요”라는 물음에 소아정신과에서 듣는 답은 일정한 편이다. 발달이 늦어서, 친구나 학교 문제가 있어서, 우울해서, 틱 때문에 등. 그런데 그날은 내 빈약한 상상을 벗어나는 답을 듣게 되었다. “애가 악귀에 씌어서요.” 당황한 내가 눈만 껌뻑이는 동안 쏟아진 아이 아버지의 말을 정리해보면, 요즘 아이가 새벽마다 깨어 부모도 못 알아보고 한참 악을 쓰며 울부짖다가 갑자기 까무룩 기절하듯 다시 잠들기를 반복했다. 그런데 아침이 되면 간밤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니, 주변에서는 애가 귀신이라도 씐 것 아니냐는 말들...
입력:2020-01-03 04:10:01
[살며 사랑하며-문화라] 면을 삶으면서
면 요리를 좋아하는 가족들 때문에 일주일에 몇 번씩은 면을 삶는다. 잡채를 할 때는 당면을 삶고, 비빔국수를 만들 때는 소면을 삶는다. 파스타를 만들 때는 스파게티 면을 삶는다.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다양한 면들이 참 많다. 면을 삶다 보면 면마다 익는 시간이 다르다는 걸 깨닫게 된다. 같은 면이라고 할지라도 굵기가 어떠한지, 성분이 무엇인지에 따라 삶는 시간이 달라진다. 면을 삶을 때는 불 옆에서 자리를 비울 수가 없다. 순식간에 끓어 넘칠 수도 있고, 엉겨붙지 않도록 면을 계속 휘저어 주어야 한다. 면을 뒤적거리며 알맞게 익을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 동안 ...
입력:2019-11-27 04:10:02
[살며 사랑하며-김의경] 셔터 앞
양손 가득 장을 봐 오는 길에 빼먹은 것이 있어 편의점에 들렀다. 편의점에서 물건을 사서 나와 집으로 오는 길에 야쿠르트 아줌마를 만났다. 야쿠르트 아줌마는 야쿠르트만 파는 것이 아니었다. 냉장 카트 안에는 야쿠르트 말고도 종류가 많았다. 나는 야채주스를 골라 계산하면서 편의점에 무언가를 놓고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머, 제가 편의점에 짐을 두고 왔어요. 요즘 정신이 없네요.” 내가 뒤돌아 편의점으로 가려 하자 아줌마는 짐을 두고 가라고, 자신이 맡아주겠다고 했다. 나는 짐을 야쿠르트 아줌마의 전동카트 옆에 두고서 편의점에 갔다가 돌아...
입력:2019-11-25 04:10:01
[살며 사랑하며-배승민] 배려와 시선
“어머 얘가 왜 이래!” 아이가 불쑥 진료실 모니터 선을 잡아 넘어뜨리자 아이 엄마가 외쳤다. 하지만 엄마의 시선이 향한 것은 아이보다도 내 표정이었다. 오랜 진료 기간 동안 아무리 아이 증세가 나빠져도 침착한 대처와 태도로 내심 존경하던 보호자였다. 때문에 그 순간 무너진 태도와 시선이 더 당황스러워, 혹시 내가 화를 낼까 봐 걱정하셨던 걸까. 다른 문제라도 있는 것인가. 의아했지만 답을 알 수가 없었다. 그날의 표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렴풋이나마 이해하게 된 것은 내가 다리를 다쳐 여러 번의 수술과 재활을 시작하게 되면서였다. 태어나 ...
입력:2019-11-22 04:10:01
[살며 사랑하며-문화라] 다섯 사람의 법칙
얼마 전 후배로부터 요즘 친구를 사귀는 게 쉽지 않다는 하소연을 들은 적이 있다. 아이와 연결되어 만나게 된 관계는 조심스러워서 친구를 맺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동네에서 자주 만나는 분들과 친해지는 것도 한계가 있다. 예전 친구들은 외국에 나가거나 지방으로 가서 일 년에 한 번도 얼굴을 보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리들에게 친구는 어떤 존재일까 고민해보았다. 문득 나이가 들수록 친구의 의미도 변화해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에서 친구가 가장 중요한 시기는 언제일까. 아마도 10대나 20대가 아닐까 싶다. 20대에는 친구라면 모든 일을 ...
입력:2019-11-20 04:05:01
[살며 사랑하며-김의경] 수능 한파
14일 오후, 약속이 있어 집 밖으로 나섰다. 2년 만에 찾아온 수능 한파라더니 바람이 매서웠다. 문득 오래전 수능시험을 치르기 위해 집 밖을 나서던 날이 떠올랐다. 손난로를 주머니에 넣고 만지작거리던 감촉이 손에 생생히 잡히는 것 같았다. 시계를 보니 수능시험이 이미 끝났을 시간이었다. 번화가에 들어서자 시험 이야기를 하며 걸어가는 수험생이 여럿 보였다. 약속장소인 카페로 들어가 친구를 기다리는데 옆 테이블에 앉아 있는 세 명의 여학생이 눈에 들어왔다. 한눈에도 수험생들로 보였다. 모두 표정이 좋지 않았고 한 학생은 울고 있었다. 시험이 어려웠던 모양...
입력:2019-11-18 04:10:01
[살며 사랑하며-배승민] 빈티지와 사람
근처에 빈티지 가게가 생겼다. 이것저것 둘러보다 진열된 그릇에 생긴 실금을 보았다. 무심코 “참 귀한 것일 텐데 금이 갔네요”라고 말을 건네자 주인은 배송 과정에서나 진열되어 있다가 부주의로 상처가 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며 그릇을 살펴보았다. 귀한 것으로 보여 내 것이 아닌데도 아깝다 싶었는데, 주인의 표정은 그다지 속상해 보이지 않았다. 그는 몇 가지 도구로 능숙하게 그릇을 손질하고는 선반에 놓여 있던 장신구를 담아 순식간에 보석 받침대를 만들어냈다. 쓸모가 없어졌다고 생각했던 그릇이 원래부터 보석을 위한 것이었던 양 변신했다. 순...
입력:2019-11-15 04:10:02
[살며 사랑하며-문화라] 각자, 혹은 다르게
큰아이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의 일이다. 미술 시간에 우유팩으로 가구 만들기를 한다고 우유팩 10여개를 준비해 오라고 한 적이 있었다. 우유를 먹은 후 그대로 씻어 보내기만 했는데 다음 주에 참관수업으로 학교에 가서 교실에 전시되어 있는 작품들을 보니 대부분 뒤처리가 깔끔하게 되어 있었다. 입구를 잘라서 본드로 붙여 기본 모양을 만들어서 보낸 분도 많았다. 아이의 거칠고 비뚤어진 의자를 보면서 여러 생각이 교차했다. 대학에서 수업을 할 때, 학생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중심으로 글을 쓰거나 발표를 하는 것의 중요성을 말해 왔다. 팀 과제를 내주면 인터넷에...
입력:2019-11-13 04:05:01
[살며 사랑하며-김의경] 입동
떡집을 지나다가 시루떡을 샀다. 떡에 코를 갖다 댄 순간, 오래전 그곳으로 이동했다. 침대와 책상 하나만 놓인, 겨우 몸만 누일 수 있었던 방. 나는 오래전 작고 좁은 고시원 방에서 겨울을 났다. 그 당시 나는 많은 고시원을 전전했지만 그곳은 유독 기억에 남는 곳이었다. 사람이 정말 사는 건가 싶게 조용했고 거주민들끼리 어쩌다가 마주쳐도 서로 인사를 하지 않았다. 나는 복도에 누군가 다니는 소리가 들리면 그 사람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외풍도 심하고 공기도 탁해서 아무래도 이곳에서는 오래 살지 못하겠다 싶었다. 겨울만 지나면 바로 ...
입력:2019-11-11 04:10:02
[살며 사랑하며-배승민] 사랑의 매
“육아서에서 애는 혼내면 안 된다더니 역시 다 틀린 말이에요. 벼르다가 이번에 아주 혼쭐을 냈더니 울고불고 반항하던 애가 다음날 바로 천사가 됐거든요. 일어나자마자 아빠 사랑한다, 자기가 잘못했다며 시키지도 않은 편지를 줄줄 쓰는데~ 얼마나 의젓해졌는지 몰라요.” 아빠의 의기양양함과 달리 엄마 표정은 얼음 같다. 이런 경우 백이면 백, 아빠들은 버럭 화를 내는 자신이 아이들에게 얼마나 무섭게 비치는지 모른다. 장난꾸러기 아이가 (겁에 질려) 얌전히 있으니, 아빠 목소리가 한 톤 더 올라간다. “저 어릴 땐 더했어요. 우리 집은 양반이지.&rdqu...
입력:2019-11-08 04:10:01
[살며 사랑하며-문화라] 방구석 여행자
얼마 전 여행을 다녀온 사진들을 정리하며 절로 여행지의 추억에 빠지게 되었다. 사람들이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여행을 가기 전 준비하면서 느끼는 설레는 마음과 다녀온 후의 추억 때문일지도 모른다. 실제 여행의 과정은 앞과 뒤의 감정에 비해서는 덜할지라도 말이다. 세상 사람들을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두 부류로 나눈다면 나는 좋아하지 않는 사람 쪽에 가깝다.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어릴 적부터 멀미가 심해 차 타는 일이 고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주변에서 여행을 부추기는 사람이 많아 한 해에 한 번 ...
입력:2019-11-06 04:10:02
[살며 사랑하며-김의경] 마음의 상태
2년 전 집에서 가까운 도서관에서 하는 정리 수납 강좌를 들었다. 수강생은 대부분 여성이었지만 사오십대 남성이 두 명 있었고 칠십대 노신사도 있었다. 첫 수업 날 번갈아가며 자기소개를 하고 이 수업을 신청한 이유를 말했다. 대부분은 어려서부터 정리를 잘 못해서 수업을 들으러 왔다고 했고 수납 전문가 자격증을 따서 수납 전문가로 활동하고 싶다는 사람도 있었다. 노신사의 말이 인상에 남았다. 그는 아내를 돕고 싶은데 어떻게 청소를 해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배우기 위해 왔다고 했다. 그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청소를 해본 적이 없다고 솔직히 시인...
입력:2019-11-04 04:10:01
[살며 사랑하며-배승민] 생각의 우물
강의나 회의 차 지방을 오가는 일이 잦아지면서, 막히는 도심보다도 오히려 빨리 오갈 수 있다는 사실에 제법 놀랐다. 체력이 부족해서 그렇지 제주도도 당일 강의 후 바로 올라와 저녁 일정을 이어가기도 한다. 이런 생활을 반복하면서 깨달은 것 중 하나는, 사람이란 자신의 경험에 갇혀 산다는 사실이다. 고속열차에 몸을 싣고 빠르고 편리하게 이동하면서, 학생시절 우리들보다 먼저 운전면허를 딴 한 친구가 으스대듯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운전을 하니 거리의 개념이 바뀐다나. 당시에는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했으나, 나 역시 운전을 시작하고 보니 그 뜻을 알게 되었다....
입력:2019-11-01 04:10:01
[살며 사랑하며-문화라] 시간 부자로 살아가기
대학원 졸업을 위해 논문을 쓰기 시작한 건 큰 애가 세 살 때부터였다. 선배들은 아예 엄마 얼굴을 모르는 신생아 때 논문을 쓰던가 아니면 아이가 큰 다음에 쓰는 게 좋다고 조언을 해주곤 했다. 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당시에 내게 남아있던 시간은 2년밖에 없었다. 아이와 함께 보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맞바꾸었다고 생각하니 조금의 시간도 허투루 보낼 수가 없었다. 극도로 시간 부족에 시달리던 그때, 내게 주어진 시간을 늘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고민하며 지냈던 기억이 난다. 현대인들은 대부분 시간에 쫓긴다. 시간과 관련하여 가장 흔히 하는 ...
입력:2019-10-30 04:05:01
[살며 사랑하며-김의경] 쓰레기 낭독회
북카페에서 열리는 시 낭독회에 초대받았다. 낭독회 제목은 ‘쓰레기 낭독회’였다. 재미있게도 낭독회 입장료는 ‘손바닥만 한 작은 쓰레기’라고 했다. 정작 쓰레기를 고르려니 무얼 골라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너무 적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였다. 책상 위에 놓인 영수증과 껌 종이가 보였다. 그것들을 주머니에 넣는 중에 또 다른 쓰레기가 눈에 들어왔다. 며칠 전 약국에서 지어온 감기약이었다. 감기가 다 나았으므로 그것 역시 버려야 할 쓰레기였다. 유통기한이 지난 영양제도, 한쪽만 남은 귀고리도 모두 쓰레기라고 할 수 있었다. 사놓고 ...
입력:2019-10-28 04:10:01
[살며 사랑하며-배승민] 쉼표
테러, 전쟁의 피해자를 치료해 온 해외 학자의 강의 시간이었다. 잠시 쉬는 시간, 그분은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농담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고통받는 사람들을 매일 보면서 정작 본인은 괜찮냐는 질문을 종종 받아요.” 나를 비롯한 한국의 학자들 역시 같은 질문에 쌓여 있던 터라 모두 귀를 쫑긋 세웠다. “전 괜찮다고 했어요. 실제로도 그렇게 믿었고요. 수십 년간 일에 익숙해진 데다가 훌륭한 동료들과 일하고, 나름 웃을 일도 많고. 행복하다고 생각했거든요.” 다들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충격적인 사건에 잠을 설치며 척박...
입력:2019-10-25 04:10:02
[살며 사랑하며-문화라] 책을 추천해드립니다
얼마 전 수업 준비를 위해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있었을 때의 일이다. 도서관 문이 열리더니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학교지킴이 한 분이 들어왔다. 서가 앞에서 책들을 보며 잠시 서성이더니 내 쪽으로 와서 말을 걸었다. 책을 읽고 싶은데 어떤 책을 골라야 할지 모르겠으니 혹시 읽을 만한 책을 추천해줄 수 있는지를 물었다. 잠시 당황했지만 어떤 책을 읽고 싶은지, 어떤 책을 좋아하셨는지를 여쭤보았다. 어렵지 않으면서 감동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사항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다 박완서 작가님의 소설을 소개해드렸다. 재미없다고 하면 어떡하지 속으로 걱정...
입력:2019-10-23 04:05:01
[살며 사랑하며-김의경] 감정휴지통
지난봄, 친구와 함께 서점에 갔다. 서점 한쪽에는 흥미로운 코너가 마련되어 있었다. 탁자 위에 커다란 휴지통이 놓여 있었는데 휴지통에는 ‘감정휴지통’이라고 적은 종이가 붙어 있었다. 감정휴지통이라는 글자 밑에는 작은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묵은 고민이나 버리고 싶은 감정을 종이에 담아 던져보세요.’ 감정휴지통 앞에는 볼펜과 종이가 놓여 있었다. 감정휴지통 주변에는 정리나 자존감에 관련된 책들이 놓여 있었다. 새삼 많은 사람들이 감정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곳...
입력:2019-10-21 04:10:01
[살며 사랑하며-배승민] 아이를 찾습니다
아이가 사라진 것은 순간이었다. 오랜만에 단 둘의 외출이라며 들뜬 아이는 평소 좋아하던 빵집에 가자고 했다. 빵을 고르고 계산하며 포장을 부탁하느라 등을 돌린 사이, 아이는 가게 안에 모기가 있으니 밖에 있겠다며 나갔다. 그 말에 당연히 두세 걸음 앞의 문밖에 있을 줄 알았던 내 실수였다. 처음에는 종일 집에 있다 나왔으니 주변을 구경하느라 잠시 시야에서 벗어난 것뿐이려니 했다. 1분 정도가 지나자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직업상 범죄 피해자와 사건들을 일상으로 대하건만, 막상 내게 일이 벌어지자 머릿속은 먹통이 된 컴퓨터 화면처럼 쓸모없어...
입력:2019-10-18 04:05:01
[살며 사랑하며-문화라] 심우장을 다녀오며
몇 해 전, 문학 창작을 가르치면서 학생들과 현장 체험학습을 다녀온 적이 있다. 수업시간에 접한 작가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보며 어떤 삶을 살았는지 살펴보고 작품세계를 더 폭넓게 이해하자는 취지였다. 시인의 경우는 만해 한용운의 집인 심우장과 윤동주문학관에 가보기로 했다. 윤동주문학관은 시의 언어를 공간의 언어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내부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우물이 전시되어 있어서 인상적이었다. 심우장(尋牛莊)은 성북동에 있었다. 서울지하철 한성대입구역에서 내려 걸어갔는데 근처에 최순우 옛집, 수연산방, 길상사 등 의미 있는 곳이 많았...
입력:2019-10-16 04:10:02
[살며 사랑하며-김의경] 오잎클로버
시월의 첫째 날 엄마가 가족단톡방에 사진을 올렸다. 여러 개의 네잎클로버가 벤치 위에 놓여 있는 사진이었다. 엄마는 일터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벤치에 앉아 잠시 쉬는 중에 무심코 발밑을 내려다봤는데 네잎클로버가 한 개 보였다고 했다. 알고 보니 한 개가 아니었다. 한 개를 따면 그 옆에 하나가 더 있었고 그것을 따면 옆에 한 장이 더 보였다. 황금이라도 발견했다는 듯이 빠른 속도로 네잎클로버를 따서 벤치 위에 늘어놓고 세어 보니 무려 열일곱 개였다. 엄마는 그것들을 작은 잡지에 끼워 집에 들고 오면서 가족들을 떠올렸다. 아들, 딸, 사위, 며느리 모두에게 ...
입력:2019-10-14 04:10:01
[살며 사랑하며-배승민] 따끈한 어린 시절
체크인을 하려는데, 직원이 투숙객에게 무료 사우나가 있다고 안내한다. 어릴 적 이후로는 목욕탕에 가본 적이 거의 없고 시간 여유도 없어 망설이는데, 고장에서 나름 유명하다는 숙소 직원의 말에 경험 삼아 가보기로 했다. 오래 세월이 묻어나는 낡은 시설이었지만, 직원의 자랑이 사실이었는지 안은 꽤나 북적였다. 장난치며 놀 생각뿐인 아이들, 본인 챙기기보다 아이들을 씻기느라 바쁜 젊은 엄마들, 가정과 아이들을 건사해 온 흔적이 온몸에 훈장처럼 부항 자국으로 남은 나이든 어머니들, 아픈 관절을 뜨끈한 물에 담그고 지인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할머니...
입력:2019-10-11 04:10:01
[살며 사랑하며-문화라] 버킷리스트
올봄 운전을 하며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마침 봄꽃들이 화사한 색을 뽐내며 피어 봄날의 경치를 만끽할 수 있었다. 창밖 풍경을 감탄하며 바라보다가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도 저 밖의 풍경은 변함없이 이어지겠지. 이런 생각을 하자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근래 죽음에 대한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가족의 죽음을 경험하게 되니 추상적으로 생각했던 일이 구체적으로 와 닿을 때가 많다. 평소에 우리는 죽음을 생각하고 준비하고 살펴보는 시간을 충분히 갖지 못한다. 문화적으로도 죽음을 입에 담는 것을 금기시한다. 인간...
입력:2019-10-09 04:10:01
[살며 사랑하며-김의경] 상인들의 가을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데 가게 앞에 널어놓은 커피찌꺼기 냄새가 기분 좋게 번졌다. 필요한 분 가져가라고 적힌 종이가 붙어 있었고 행인들이 모여들어 커피찌꺼기를 옆에 놓인 일회용 플라스틱 컵에 담고 있었다. 그걸 어디에 쓰느냐고 묻자 한 할머니가 이걸 냉장고에 넣으면 냄새가 나지 않는다고 했다. 할머니는 내 것도 한 통 담아 손에 들려주었다. 나는 그것을 손에 들고 카페 안으로 들어가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카페 주인이 말했다. “뜨거운 걸로 드릴까요? 찬 걸로 드릴까요? 이번 주부터 아이스 아메리카노보다 뜨거운 아메리카노 주문이 더 많이 들어...
입력:2019-10-07 04: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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