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배승민] 쉼표



테러, 전쟁의 피해자를 치료해 온 해외 학자의 강의 시간이었다. 잠시 쉬는 시간, 그분은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농담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고통받는 사람들을 매일 보면서 정작 본인은 괜찮냐는 질문을 종종 받아요.” 나를 비롯한 한국의 학자들 역시 같은 질문에 쌓여 있던 터라 모두 귀를 쫑긋 세웠다. “전 괜찮다고 했어요. 실제로도 그렇게 믿었고요. 수십 년간 일에 익숙해진 데다가 훌륭한 동료들과 일하고, 나름 웃을 일도 많고. 행복하다고 생각했거든요.” 다들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충격적인 사건에 잠을 설치며 척박한 상황에서 어떻게든 치료를 이어가고자 끙끙 앓는 우리와 달리, 그분의 태도와 표정은 시종일관 온화하고도 편안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어진 이야기는 예상을 빗나갔다. “그런데 그날 잠자리에 누우려던 순간 그만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어요. 난 전혀 괜찮지 않았어요! 매년 열리는 좋아하는 공연이 있어 그때가 되면 무슨 일이 있어도 꼭 가는 게 저만의 취미였는데, 이 일을 시작한 후로는 단 한 번도 간 적이 없더라고요. 세상에, 그걸 깨닫지도 못하고 있었다니….”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전문가로 살아왔건만, 자신이 취미를 잊은 채 살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는 고백이었다. 우리의 심각한 표정에 그분은 장난스레 윙크를 하더니 덧붙였다. “그래서 올해는 표를 샀어요.”

바쁜 일상 중 어디선가 낯익은 음악의 전주가 들려오는 순간, 일상에서 벗어난 듯 느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 음악을 줄곧 듣던 그때, 함께했던 사람들. 모든 것이 마치 영화 장면이 바뀌듯 순식간에 떠오르고, 지친 지금의 내가 아니라 때론 반짝이고 때론 고통스러웠던 조금은 젊었던 나. 그 당시로 돌아간다. 거창한 것일 필요는 없다. 음악이든 그림이든 춤이든, 때론 차 한 잔이든, 일상에서 벗어나 온전히 즐길 시간이 잠시라도 없다면 삶은 팽팽히 당겨진 여유 없는 활인 셈이다. 당겨질 뿐 놓아지지 않는 활은 쓸 수가 없다. 일상으로 당겨진 활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는 쉼표의 시간이 필요한 것은, 전장의 피해자를 돌보는 전문가나 일상의 전쟁 속에 살고 있는 우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배승민 의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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