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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사랑하며-배승민] 하루하루의 꽃
두 손으로 들기조차 버거운 많은 꽃다발을 받았다. 간신히 집에 도착해서 식탁 위에 우르르 내려놓으니 이 많은 것을 어쩐다 싶다. 재주는 없지만 이대로 방치할 수는 없겠어서, 잠시 고심하다 겹겹이 쌓인 포장을 풀고 화병으로 쓸 만한 빈병들을 모아 정리를 시작했다. 어느새 엄청나게 쌓인 색색의 포장지와 리본에, 이 고운 것들을 한 번만 쓰고 버리다니 얼마나 낭비인가 싶어 잠시 기분이 불편해졌다. 예쁜 원래 모습 그대로 자연에 두었다면 더 좋았을 꽃들을 꺾어 이리 장식하는 것 또한 우리네 불필요한 욕심 아닌가 싶은 마음이 들자 서투른 손은 더 미적거려졌다. ...
입력:2019-10-04 04:05:01
[살며 사랑하며-문화라] 친절에 대하여
낯선 도시에서 경험한 친절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20대 후반에 유럽의 작은 도시로 배낭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1층은 작은 술집이었고, 2층은 기숙사형 숙소인 곳에 묵게 되었다. 그날 밤 일행 중 한 명이 우연히 아는 선배를 만나게 되어서 1층에서 담소를 나누었다. 자정쯤 끝내고 숙소로 올라가서 자려는데 문이 잠겨 있었다.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비밀번호를 적은 종이를 방에 두고 나와서 누를 수가 없었다. 가게 바깥으로 나가서 창문 밑에서 일행의 이름을 불렀지만 아무리 불러도 내다보는 사람이 없었다. 난감해졌다. 남은 두 명과 함께 ...
입력:2019-10-02 04:10:02
[살며 사랑하며-문화라] 기억 저 너머의 일
얼마 전 큰아이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있었던 일이다. 아이는 십 년 전 자신이 초등학생 때 일을 들려주었다. 어느 날 밤, 나와 집으로 가는 길에 농구를 하는 고등학생들의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아이는 내게 “이런 늦은 시간까지 열심히 농구를 하다니 대단해요”라고 말을 건넸다. 나는 그 말에 “저렇게 해도 농구선수는 될 수 없을 거야”라고 답했다고 했다. 아이는 내 말을 듣고 상처를 받았다고 한다. 어떤 맥락에서 그런 말을 했는지, 그때 일을 떠올리려고 했지만 도저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사과...
입력:2019-09-11 04:05:01
[살며 사랑하며-김의경] 분식점 아줌마의 고충
자주 가는 분식점이 있다. 작은 체구의 아줌마는 혼자서 메뉴판에 있는 십여 가지의 음식을 빠른 속도로 만들어낸다. 맛도 좋지만 음식을 많이 담아주기 때문에 남는 것이 있는지 궁금할 정도이다. 눈에 띄지 않는 가게인데도 단골이 많은 것은 그런 이유일 것이다. 9월 초, 그곳에 가서 식사를 했다. 나는 아줌마에게 이번 추석에는 고향에 안 내려가시냐고 물었다. 아줌마는 갈까 말까 고민 중이라고 했다. 아줌마는 3년 전 추석날에 가게 문을 열었는데 생각보다 손님이 많아서 놀랐다고 한다. 취업준비생, 외국인 노동자, 독거노인…. 그녀의 고객은 저마다의 사정으...
입력:2019-09-09 04:05:02
[살며 사랑하며-배승민] 저마다의 애도
빼꼼 열린 문틈 사이로 늦저녁의 온기가 따스하다. 낯설지만 평온한, 옹기종기 작은 마을. 할아버지는 두런두런 무슨 말을 하시다 발치의 강아지를 쓰다듬으며 슬쩍 웃으시는 듯하다. 그리고 나는 한동안 목이 메었다. 어린 시절 상당 기간 조부모의 손에서 성장한 나에게 집안의 제일 큰 어른은 언제나 할아버지였지만, 어느 새벽 예고 없이 걸려온 부고 전화로 모든 것이 달라졌다. 정신없이 장례를 치르고 나서 나는 내가 일상으로 돌아온 줄 알았다. 그러나 몇 년 지나 꾼 꿈 뒤에야, 나는 나의 애도가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꿈의 분석은 이론마다 다양...
입력:2019-09-06 04:10:02
[살며 사랑하며-문화라] 줄임말 문화
몇 해 전 친정 식구들이 휴일 오후에 다 같이 모였을 때의 일이다. 어디선가 걸려온 전화를 받은 오빠가 급히 나갈 준비를 하며 말을 했다. “갑자기 문상할 일이 생겼어.” 그 말을 들은 고등학생 조카가 물었다. “문상? 문화상품권 말이야?” 지금은 이런 대화를 들어도 전혀 당황하지 않지만 처음 들었을 때만 해도 이 상황이 굉장히 낯설었다. 며칠 전 옆에서 책을 읽던 아이가 내게 “엄마, 이제 영숙하러 갈게요”라고 말을 했다. “뭐? 영숙이가 뭐야?”라고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영숙’이라는 단어로 떠오르는 의미...
입력:2019-09-04 04:05:01
[살며 사랑하며-김의경] 성큼 다가온 가을
집 밖으로 나가면 가을이 왔음을 실감할 수 있는 때이다. 과일가게에는 탐스러운 과일이 저마다의 색을 뽐내며 진열되어 있고 하늘은 높고 푸르다. 내가 하늘을 자주 올려다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것도 매해 이맘때다. 그림처럼 펼쳐진 구름과 하늘의 모습에 감탄하며 카메라를 들어 올려 셔터를 눌러대는 사람들을 따라서 나도 하늘 사진을 찍었다. 8월의 마지막 날에는 탄천에 나갔다가 가을이 온 것을 더욱 완연히 느낄 수 있었다. 길가에는 코스모스가 피어 있었고 매미 소리가 크게 들렸다. 땅에는 밤송이가 떨어져 있었다. 나는 밤송이를 몇 개 주워 주머니에 넣고 ...
입력:2019-09-02 04:10:01
[살며 사랑하며-배승민] 원시인의 불안과 우울
블루투스 이어폰으로 스마트폰 음악을 즐기며 과학의 결정체인 차에 타고 있는 당신의 뇌는 원시인의 수준이다. 온라인에 뇌 기능 일부를 아예 맡기다시피 하고 사는 현대인의 뇌는 과거와 달라지고 있다지만, 그것도 고위 기능 중 일부일 뿐. 머리의 깊숙한 곳, 변연계의 감정적인 뇌는 변화무쌍한 겉껍질과는 달리 묵직하게 자리한 대신, 한 번 자극받으면 활화산 터지듯 지각변동이 일어난다. 원시인이 동굴이나 무리에서 쫓겨나면 어떻게 될까. 인류는 구석기였건 현대사회에 살건 무리를 지어 산다. 사냥을 나가도 홀로보다는 무리 사냥을 하고, 사냥이나 전쟁이 끝나...
입력:2019-08-30 04:10:01
[살며 사랑하며-문화라] 의심과 믿음
개학을 하루 앞둔 날, 아이에게 학교에 가져갈 방학 숙제를 챙기게 하였다. 자유 숙제 중 부족한 과목의 문제 풀기가 있었는데 공책에 숙제를 했다고 하는데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 않고 했다고 한 게 아닐까 싶어 빨리 공책을 찾아오라고 했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전에 몇 번 문제지를 풀지 않고도 물어보면 했다고 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숙제를 안 한 거 아니냐고 물었다. 아이는 끝까지 했다고 말했지만 공책은 없고 숙제는 내일 가져가야 했기에 다른 곳에 밤늦게까지 문제 풀이를 하게 시켰다. 개학을 앞둔 소동은 그렇게 끝났고, 거짓말을 했을지도 모른...
입력:2019-08-28 04:10:01
[살며 사랑하며-김의경] 봉숭아 꽃물
문방구에 갔는데 손톱에 봉숭아 꽃물을 들이는 제품이 보였다. 꽃과 잎을 절구에 넣고 빻는 복잡한 절차 없이 가루에 물을 섞어 30분 만에 간단히 꽃물을 들일 수 있는 제품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그것을 사 와서 손톱에 꽃물을 들여봤는데 그럭저럭 어린 시절의 추억을 되새길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물이 들어버리는 봉숭아 꽃물은 왠지 아쉬웠다. 주황색 손톱을 보고 있자니 돌아가신 할머니가 생각났다. 할머니는 매해 여름, 손자 손녀의 손톱에 봉숭아 꽃물을 들여주셨다. 어린 내게는 그것이 얼마나 고대하던 행사였는지 화단에 봉숭아꽃이 피면 가슴이 두근...
입력:2019-08-26 04:10:02
[살며 사랑하며-배승민] 안녕, 여름. 안녕
여름이 끝물이라는 소식을 전하는 바람이 분다. 지구 온난화 탓일지, 극적인 소식들이 사회를 쓸고 가서인지, 아니면 나도 점점 나이를 들어가고 있어서인지. 어느 계절이나 그 물러감과 다음 계절의 다가옴이 생경하지만, 유독 이번 여름은 그 퇴장이 더 강하게 느껴지는 듯하다. 대다수 실내에서 일하면서도 병원, 학교와 센터를 오가는 중에 몇 번이나 더위를 먹었던 비루한 체력인 주제에 여름이 가는 것이 아쉽다고 하려니 참 계면쩍다. 그것도 그 이유 중 큰 부분이 음식 때문이라니. 해가 어스름 기울면 시장 골목은 거의 인적이 없다. 오래된 철제 셔터가 내려진 가...
입력:2019-08-23 04:10:01
[살며 사랑하며-문화라] 남아 있는 나날을 어떻게 보낼까
얼마 전 친구들과 노후에 어떻게 지낼까 하는 대화를 나누었다. 각자의 개성만큼이나 노후에 대한 꿈도 다양했다. 취미가 같은 사람들과 공유주택에서 살고 싶다는 사람도 있었고, 아이들을 독립시킨 후 여러 나라를 다니며 한두 달씩 머물고 싶은 게 꿈이라는 친구도 있었다. 조용히 애완견을 키우며 지내고 싶다는 경우도 있었다. 나는 여러 곳을 돌아다니거나 다양한 사람들과 지내고 싶기보다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조용히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올해 들어 앞자리 숫자가 바뀌었지만 이를 별로 의식하지 않고 지내왔다. 영원히 청춘으로 살겠다는 바람이라기보다 노...
입력:2019-08-21 04:05:02
[살며 사랑하며-김의경] 타임머신
엄마와 함께 시장에 갔다가 세 아이의 엄마를 만났다. 아이 엄마는 삼십 대 초반으로 보였는데 남자아이는 엄마가 이리 오라고 해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저쪽에서 무언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여자아이는 신이 나서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설상가상으로 힙시트를 착용해 뒤로 업은 갓난아기도 목청껏 울어댔다. 엄마는 옆에서 보다가 사내아이에게 다가가 어서 너희 엄마에게 가라고 참견을 했다. 아이 엄마는 넋이 빠진 듯 멍하니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엄마도 삼 남매를 키웠다. 오래전 엄마도 저 여자처럼 다섯 살도 되지 않은 세 아이를 데리고 시장통을 ...
입력:2019-08-19 04:10:02
[살며 사랑하며-배승민] 공간과 마음
동네에 산책로가 생겼다. 여러 구(區)에 걸친 드넓은 공간으로, 밤낮으로 많은 이들이 찾는 아름다운 곳이다. 나 역시 가끔 늦은 밤에라도 부족한 운동량을 채울 겸, 복잡한 생각들을 자연 속에서 정리할 겸 산책을 나섰었는데, 그날도 그런 밤이었다. 반려동물이나 가족과 산책하는 사람들, 가볍게 운동하는 주민 등 일상의 풍경 사이로 갑자기 이질감이 느껴졌다. 전공이 소아청소년이라 노인분들을 대할 일이 적어 무어라 딱 떠오르진 않았지만, 단정한 차림의 한 할머니가 시선을 끌었다. 미묘하게 흔들리는 걸음걸이, 공기가 서늘한 밤이건만 얼마 동안이나 걸었는지 ...
입력:2019-08-16 04:10:01
[살며 사랑하며-문화라] 별일 없는 삶
얼마 전 후배의 고민을 들은 적이 있다. 그녀는 계획했던 일들이 잘 풀리지 않아 절망감에 빠져 있었다. 친구들은 준비했던 시험에 합격해 직장생활을 시작했는데, 자신만 뒤처져 있다는 생각에 괴롭다고 말하였다. 학교를 잠시 쉬면서 마음을 다잡고 있는데, 주변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져서 힘들다고 하였다. 비슷한 고민으로 많은 시간을 보냈던 지난날이 떠올랐다. 지금의 결과가 인생의 전부를 결정짓는 것은 아니니 너무 실망하지 말고 쉬었다가 다시 시작해보라고 말해주었다. 축 처진 어깨를 하며 걸어가는 후배를 보니 마음이 안타까웠다.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일은...
입력:2019-08-14 04:10:01
[살며 사랑하며-김의경] 여름 나기
입추라는데 여전히 밖에 나가기가 두려울 정도로 무더운 날씨가 이어지고 있다. 더위를 피해 수영장에 갔다가 몇 달간 수영장에서 얼굴을 마주치던 분들과 처음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물론 처음이란 말은 어폐가 있다. 긴 대화를 나누지 않았을 뿐이지 늘 눈인사를 나누었고 수영 동작이 틀리면 서로 지적해주기도 했기 때문이다. 샴푸나 물안경을 빌려주기도 했고 누군가 오랜만에 수영장에 나오면 집안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묻기도 했다. 우리 네 명은 함께 강습을 받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늘 같은 시간에 마주치는 자유수영 회원이었다. 그런 우리가 지난주 처음으로 ...
입력:2019-08-12 04:10:02
[살며 사랑하며-배승민] 더위와 망상
얼음이 가득한 잔을 들고 선풍기 앞에 앉으니 아이고 이제 좀 살겠다 소리가 절로 나온다. 한 모금 들이켜며, 고질적인 습관인 멍 때리며 엉뚱한 생각에 빠진다. 현실에 치여 복잡한 일들로 머리가 아프면 이 고질병이 더 도진다. 선풍기는 무슨, 얼음 한 조각도 왕이나 접하던 시대에 태어났다면. 전쟁통이라 시원한 물은커녕 당장 죽고 사는 위협에 쫓기고 있다면. 수십 ㎞를 조금이라도 덜 더러운 물을 긷기 위해 걸어야 하는 곳에 살고 있다면. 언제부터 이런 습관이 들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어렸을 때 어디에선가 ‘인간은 생각하는 대로 느낀다’ 등의 글을 ...
입력:2019-08-09 04:10:01
[살며 사랑하며-문화라] 즐겁게 살아가려면
대학생 때, 화장대 거울 맨 위에 ‘즐겁게 살자’라는 글자를 써놓았던 적이 있다. 왜 그런 문구를 쓰게 되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즐겁게 살지 못한다고 느꼈기 때문이지 싶다. 학과 공부, 아르바이트, 학회 활동 등에 쫓기며 심리적으로 여유가 없어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오히려 대학을 졸업하고 난 뒤에 여행도 가고, 취미생활도 하면서 즐겁게 살기 위해 노력했다. 만약 지금 방에 그때의 거울이 있다면 뭐라고 글을 써놓을까. 삶을 슬로건대로 살아나가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어떤 태도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의미가 ...
입력:2019-08-07 04:05:01
[살며 사랑하며-김의경] 폭탑방
지난봄부터였던가. 매일 같은 시간, 내 방 창문 앞에 동네 노인들이 모여들어 담소를 즐기기 시작했다. 쉼터라도 되는지 의자도 대여섯 개 놓여 있었다. 나는 반지하집에 사람이 사는 것을 모르나 싶어서 부러 창문을 여닫아 봤지만 그들의 모임은 계속되었다. 짜증이 났지만 매몰차게 남의 방 앞에서 시끄럽게 하지 말라고 말하기가 힘들었고 결국 말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언젠가부터는 본의 아니게 그들의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 요 며칠간은 날씨가 더워서인지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 대신 커다란 라디오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남의 방 앞에서 ...
입력:2019-08-05 04:10:01
[살며 사랑하며-배승민] 마음의 장면
몇 해 전 짧은 여행을 갔다. 일정 중 반나절이 비던 차에 요가 무료체험 수업 안내문을 보고 호기심에 혼자 숙소 밖 요가스튜디오를 찾아갔다. 숲 한가운데에 자리한 오두막의 문을 열자, 제각각의 언어로 소곤거리는 투숙객들이 보였다. 그들이나 나나 낯선 수업에 우연히 떨어진 초보 중의 초보들이었다. 그러나 전면의 창으로 숲이 보이는 요가스튜디오에서 우리는 어설픈 동작일지언정 강사의 한 호흡, 한 호흡을 따라가며 자연의 거대함 속에 함께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학교와 병원 외에 트라우마 피해자들을 위한 곳에서 일을 한다. 이곳에 오는 이들에게...
입력:2019-08-02 04:10:01
[살며 사랑하며-문화라] 나만의 공간
처음으로 내 방을 가지게 된 건 고등학교 때였다. 새로 이사를 가게 된 주택은 이층집이었다. 아래층에는 안방과 주방이, 이층에는 방이 세 개 있던 구조였다. 이사 가기 전 집을 구경하러 갔는데 이층의 방 중 하나를 내 방으로 쓰라는 말에 뛸 듯이 기뻤던 기억이 있다. 나만의 공간이 없어진 건 결혼하고 나서부터였다. 몇 번의 이사를 하고 난 후 서재가 생겼지만, 서재도 온전히 나만의 공간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쌍둥이를 낳은 후 몇 년 동안 서재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잤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아이들은 그때부터 따로 잠을 자기 시작했다. 2년 전 큰 애가 학교...
입력:2019-07-31 04:10:01
[살며 사랑하며-김의경] 영상통화
나는 집 앞 골목에서 매일 저녁 같은 사람과 마주쳤다. 서너 달 전부터 마주쳤지만 가끔 눈인사를 했을 뿐 대화를 나눠본 적은 없었다. 그가 외국인이기 때문이었다. 스무 살이 넘었을까 싶게 앳되어 보이는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누군가와 영상통화를 했다. 통화 상대는 대체로 여성이었다. 어머니로 보이는 중년 여성일 때도 있었고 청년과 비슷한 나이의 어린 여성일 때도 있었다. 이어폰을 꽂지 않고 통화를 하는 것을 보니 그 역시 타인이 자신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가 영어를 사용했더라면 용기를 내어 말을 걸어봤을지도 모르겠다...
입력:2019-07-29 04:10:01
[살며 사랑하며-최주혜] 소확행
에어컨도 선풍기도 없던 옛날 우리 선조들은 무더운 여름을 어떻게 보냈을까. ‘동국세시기’에는 선비들의 여름 나기로 탁족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탁족은 강물이나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자연의 경치를 감상하는 피서법이다. 시린 계곡물이 열기를 내리고 흐르는 물살이 발바닥을 자극해 건강에도 도움이 되는 일석이조의 여름 나기 비법으로 조선시대 선비들 사이에서 성행했다. 주로 남산과 북한산 계곡에서 탁족을 많이 했고 가장 유명한 곳으로는 세검정 일대였다고 한다. 지난 주말, 후텁지근한 날씨 탓에 손가락 하나 꼼짝 하기 싫을 때였다. 요리 프로...
입력:2019-07-26 04:10:02
[살며 사랑하며-문화라] 세 가지 소원
얼마 전 영화 ‘알라딘’을 보았다. 램프의 요정 지니는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말한다. 누군가 소원을 들어준다는 설정은 낭만적이며 희망적이다. 만약 지니가 나에게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말하면 어떤 소원을 이야기할까 생각해보았다. 얼마 전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루어졌으면 하고 바라는 소원을 종이에 적은 후에 몇 년을 보관해둔 뒤 종이를 꺼내어 보니 그때 적은 소원 대부분이 이미 이루어졌다는 이야기이다.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소원을 종이에 써서 오랫동안 보관해두는 방식은 아니었고, 주변 사람에게 ...
입력:2019-07-24 04:10:02
[살며 사랑하며-김의경] 여름의 맛, 묵사발
‘여름의 맛’ 하면 떠오르는 음식이 많지만 찌는 듯이 더운 날에는 묵사발이 떠오른다. 수년 전, 나는 단기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지낸 적이 있다. 당시 나는 장기적으로 할 일을 구하고 있었는데 적당한 일을 찾기 힘들어 단기알바를 하면서 생활비를 벌고 있었다. 하루는 아르바이트 구인 사이트에서 당일알바 구인 공고를 보고 연락을 해서 그들이 알려준 장소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스무 명 남짓의 젊은이들이 모여 있었다. 담당자로 보이는 남자는 정보가 잘못 전달되어 열다섯 명 모집인데 스무 명을 모집했다면서 미안하지만 다섯 명은 교통비를 포함한 위...
입력:2019-07-22 0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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