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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사랑하며-하주원] 질병의 역할과 이용
질병의 주된 역할은 당연히 악역이다. 사람을 죽게 만들고, 일을 그만두게 하거나, 끊임없이 통증에 시달리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질병이 늘 나쁜 역할만 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때로는 병을 앓게 되면서 쉬지 않고 달리던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 현재를 소중히 하게 되어 가족과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거나 더 큰 병을 예방하기 위해 건강관리를 철저하게 하게 된다. 때로는 하기 싫은 일이나 미운 사람을 피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의 역할도 참 다양하다. 자녀가 ADHD가 의심된다고 하면 마치 암을 선고받은 것처럼 놀라며 펑펑 우는 부...
입력:2018-11-21 04:05:02
[살며 사랑하며-신용목] 우리가 만난다는 것
공간에 대해서라면 아무리 넓혀 봐도 지구쯤일 것이고, 시간에 대해서도 시차의 경험에 비추어 기껏 12시간 차이만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유일한 공간 속에 단 한 갈래의 시간만 상정하고 살 뿐이다. 물리학까지 가지 않더라도, SF 영화에서 종종 시공간이 단일하지 않고 심지어 휘어지기도 하며 어느 지점에서는 건너뛰거나 앞뒤가 하나로 묶여 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내 감각으로는 인지되지 않는, 이 복잡하고 어려운 이야기에 매료되어 나는 가끔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러면 그 말들이 전혀 낯설지 않게 다가오는 ...
입력:2018-11-19 04:10:01
[살며 사랑하며-황시운] 갇힌 존재들
동물원을 좋아하던 시절이 있었다. 동물원이 있는 도시에서 학교에 다닐 땐 일주일이 멀다고 동물원에 갔다. 용돈이 부족했으므로 지출에 우선순위를 정해야 했는데, 당시 내게 동물원 입장료는 언제나 가장 중요한 용처였다. 덕분에 한 달에 두어 번쯤은 동물원에서 꽤 긴 시간을 보내며 좋아하는 동물들을 실컷 볼 수 있었다. 물론 돈이 없을 때도 동물원에 갔다. 그런 날엔 동물원 입구까지 천천히 걸어 올라가 저물녘까지 근처 화단에 걸터앉은 채 넋을 놓고 있다가 돌아오곤 했다. 나는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웃고 떠드는 것보다 혼자서 동물원에 오래 머물며 기린이나 ...
입력:2018-11-16 04:05:01
[살며 사랑하며-하주원] 중용의 지점
20대 시절 내 연애는 잘 못하면서 남들 연애상담은 많이도 했다. 지금 돌아보면 그 사람들이 상담을 빙자해서 실은 자기 연애사를 자랑한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자상하고 관심을 가지면서도, 자기 의견이나 자유를 존중해주는 사람을 원했다. 연애에서 중용은 어렵기에 그런 과도한 기대를 갖지는 말라고 했다. 자상한 사람은 권위적인 면이 있고, 자유를 주는 사람은 때로는 무관심하다고 느껴질 수밖에 없다고. 동전의 양면 중 좋은 것만 취할 수는 없으며 오랜 시간을 지낼수록 뒷면이 드러난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기는 어렵다. 사생활 침해와 안전 문제도 마찬가...
입력:2018-11-14 04:05:01
[살며 사랑하며-신용목] 그냥 가면 돼
지난 7∼9일 광주에서는 제2회 ‘아시아문학페스티벌’이 열렸다. ‘아시아에서 평화를 노래하자’라는 주제로 각국의 작가들이 포럼과 대담, 낭독회 등을 치렀다. 레지던시와 연계된 행사여서 나는 일주일 전부터 몇몇 아시아 작가들과 한 숙소에서 지냈다. 새삼 세계의 복잡한 메커니즘을 깨닫는 시간이었다. 예컨대 팔레스타인에서 온 소설가는 아랍의 여성 차별 문제를 지적하면서도 서구에서 그것만을 부각하여 자신들 변혁의 소스로 삼고 마치 나머지 문제는 없는 것처럼 돌려세우며 식민주의를 강화하는 것을 아프게 생각했다. 장기간 ...
입력:2018-11-12 04:10:01
[살며 사랑하며-황시운] 무지도 죄가 된다
올해 국가 건강검진 대상자여서 더 늦기 전에 건강검진을 받기로 했다. 지정병원 중 한 곳을 선택했고, 내가 이용하기에 적당한지 둘러보기 위해 엄마가 미리 병원을 방문했다. 그런데 병원에서 돌아온 엄마는 잔뜩 화가 나 있었다. “손님이 많아서 바쁘니까 환자가 불구자면 보호자 두 명을 동반하고 내원하라잖아. 아니, 당연히 병원에서 해야 할 일을 왜 보호자한테 미뤄? 그리고 명색이 종합병원에서 일한다는 작자가 무식하게 불구자가 뭐니 불구자가. 요즘 누가 그런 말을 쓰냐고.” 엄마는 금방이라도 울 듯한 얼굴이 되고 말았다. 하반신이 완전히 마비...
입력:2018-11-09 04:10:01
[살며 사랑하며-하주원] 개꿈은 축복
간밤에 안녕하셨는지요. 혹시 무슨 꿈을 꾸셨습니까. 꿈을 꾼 것 같기는 한데 막상 이야기하려니 잘 기억나지 않고 연결도 되지 않고 무슨 이런 이상한 꿈을 꿨나 싶습니까. 그렇다면 괜찮은 꿈을 꾸신 것입니다. 마음이 건강한 상태의 꿈은 원래 줄거리가 엉성하고 제대로 연결되지 않습니다. 꿈을 꾼다고 잠을 제대로 못 잔 것도 아닙니다. 그나마 조금 줄거리가 있는 꿈을 꾸는 렘(REM)수면은 하룻밤 서너 번 옵니다. 낮의 기억이 우리 뇌 안에서 한 차례 다듬어진 뒤 뉴런 사이를 소행성처럼 떠다니다 때로는 충돌하고, 합쳐지고, 멀어지면서 꿈이 만들어집니다. 꿈속에서 ...
입력:2018-11-07 04:10:01
[살며 사랑하며-신용목] 고통을 향해 외친다는 것
건강검진 받으러 갔다가 병원 현관에서 제 가슴을 쥐어뜯으며 “인생이 이런 거냐”고 외치는 사람을 보았다. 누군가 다가와 그를 달랬다, 그 심정 다 안다고. 그리고 그를 이끌었다, 이러면 안 된다고. 그저 지나가던 나는 그 사연을 알 길 없었지만, 눌러 참는 울음이 꺽꺽 토해놓는 것이 고통인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고통은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느낌으로 ‘오는’ 것이다. 바다를 아는 자는 바라보는 자이겠으나 바다를 느끼는 자는 헤엄치는 자이다. 바라보는 자에게 바다는 바다를 가리키는 정의로 이해되겠지만, 헤...
입력:2018-11-05 04:05:01
[살며 사랑하며-황시운] 폭력의 민낯
선생이 아이의 뺨을 올려붙였다. 날카로운 소리가 조용한 교실에 쩌렁쩌렁 울렸다. 선생이 다른 쪽 뺨을 때리자 아이는 뒤로 나자빠졌다. 선생이 아이의 멱살을 잡아채 쓰러진 아이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곤 아이의 뺨과 머리를 닥치는 대로 때렸다. 잘못했다고 빌 틈도 없었다. 아이는 선생이 때리면 때리는 대로 맞고만 있었다. 깡마른 아이의 몸이 헝겊 인형처럼 나풀거렸다. 선생의 구타는 계속됐고 아이는 결국 또다시 넘어져 바닥을 굴렀다. 그제야 손찌검을 멈춘 선생이 가쁜 숨을 고르며 말했다. “반 평균이나 깎아 먹는 주제에 숙제도 안 해오고 말이야!” 아...
입력:2018-11-02 04:05:01
[살며 사랑하며-하주원] 힘들지 않을 의무는 없다
감정은 곧바로 나타나겠지만 기분장애는 그렇지 않다. 어제 교통사고가 나서 오늘부터 잠을 못 자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상황은 간단하다. 납득하기 쉽다. 하지만 정서의 세계에선 이렇게 확실한 경우보다 원인과 결과에 시간차가 생기는 경우가 더 많다. 아동학대 경험이 80대 이후의 우울증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에서 보듯, 차곡차곡 부정적 감정이 끓어올라 우울증이나 불안장애로 흘러넘치기까지 긴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요즘과는 차원이 다른 구박을 수십년간 했던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 때는 별 증상이 없다가 막상 돌아가신 직후부터 오히려 불안과 불면이 나타...
입력:2018-10-31 04:10:01
[살며 사랑하며-신용목] 마음이 있는 곳
생각이 머리의 작용이라는 데는 모두 동의한다. 그러나 ‘마음’으로 오면 조금 애매한 구석이 있다. 마음이 머리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슴에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호르몬의 작용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으니 마음의 경로는 생각보다 복잡해진다. 마음은 어디에 있을까. 어쨌든 산속에 숨은 샘처럼 내 몸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믿었다. 얼마 전 지하주차장에 떨어져 있는 인형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노란 실을 가늘게 꼰 머리카락과 까만 단추를 얽어 눈을 단 헝겊인형이었다. 누가 버리고 간 것인지, 실수로 잃어버린 것인...
입력:2018-10-29 04:05:02
[살며 사랑하며-황시운] 시선을 돌리면 보이는 것들
돌이켜보면, 정말로 고통스러웠던 순간은 내 욕심에 내가 치일 때였다. 외부적인 요인으로 힘들었던 적도 많지만, 그런 건 문제를 해결해 나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회복됐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일어난 것뿐이라는 자기 위안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욕심에 짓눌리기 시작하면 얘기가 달라졌다. 내 발에 내가 걸려 넘어진 것이니 남을 탓할 수도, 내 만족에 관한 문제이니 적당한 회복의 기준도 없었다. 그런 순간과 직면할 때마다 나는 내 안에 동굴을 파고 숨어들었다. 실패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정상에 오르고 싶었다. 가진 것에 비해 지나치게 큰 ...
입력:2018-10-26 04:05:02
[살며 사랑하며-신용목] 마음을 생각하는 마음
나는 경기도 일산 외곽 아파트에 산다. 교통편이나 편의시설은 부족하지만 지대가 높아 앞이 탁 트였다. 좌로는 북한산이 우로는 계양산이 다 보인다. 우리나라 도시 외곽의 운명처럼 공사장 소리가 끊임없지만, 나는 먼 곳까지 보이는 이 집이 좋다. 대체로 행복한 풍경이 보이지만 간혹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다. 열흘 전, 바로 눈앞에서 치솟아 오른 검은 연기 기둥을 온종일 걱정스레 쳐다보아야 했다. 그 후론, 풍등을 날려 고양 저유소에 불을 낸 스리랑카인에 관한 처분을 또 조마조마 지켜보았다. 이제 좀 시들해진 일이지만 나는 많이 화가 났고 조금 기뻤지만 사...
입력:2018-10-22 04:05:02
[살며 사랑하며-황시운] 새로운 출발
여자 친구들과 결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누군가는 반드시 말했다. “난 우리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 그 말을 하는 사람이 나일 때도 있었고 다른 사람일 때도 있었지만 함께 있던 모두는 똑같이 고개를 끄덕이며 결연한 표정을 짓곤 했다. 누군가 훌쩍이기 시작해서 결국 울음바다가 되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무엇이 우리 엄마들의 삶을 그토록 눈물겹게 만들었는지 잘 모르던 때부터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을 때까지, 비슷한 상황은 되풀이됐다. 그 시절 함께 훌쩍이던 친구들은 대부분 결혼을 했고 엄마가 되었다. 그들이 그토록 닮지 않겠...
입력:2018-10-19 04:10:02
[살며 사랑하며-하주원] 치매 예방주사
얼마 전 한 어르신이 작년에 다른 병원에서 치매 예방 주사를 맞았는데 비쌌지만 올해도 맞고 싶다며 병원을 찾아왔다. 치매는 나빠지는 속도를 늦추거나, 운이 좋으면 더 진행되는 걸 막을 수 있는 약이 있긴 한데, 먹거나 패치를 붙일 수 있을 뿐 주사제는 없다고 말씀드렸다. 어르신은 분명히 있는데 왜 모르냐고 하시다 결국 다시 작년 그곳을 찾아가야겠다고 하셨다. 화요일마다 노인복지관 어르신들과 만나보면, 노인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질환은 암이나 심장병이 아니라 치매다. 특히 80대 이상은 죽음 자체보다 그 과정에서 품위가 손상되거나 인간의 약한 면이 드러...
입력:2018-10-17 04:05:02
[살며 사랑하며-신용목] 그의 이름을 앞에 놓고
대개 책이 나오면 인사차 주변 사람들에게 돌리곤 한다. 이사를 가면 새 이웃들에게 떡을 돌리는 일과 비슷하다. 그간 도움을 주신 분들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이기도 하고, 소원했던 시간을 대신해 일종의 기별을 전하는 것이기도 하다. 작가들끼리는 물리적으로 가깝지 않더라도 책을 보내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때도 이유는 비슷하다. 선배든 후배든 그로부터 직접 배우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사람의 책이나 문장에 빚진 바가 아예 없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만난 적 없고 특별히 주고받은 사연이 없다 하더라도 그의 작품을 통해 이미 많은 대화를 나눈 듯한...
입력:2018-10-15 04:10:01
[살며 사랑하며-황시운] 축제
“거긴 고통 같은 거 없는 세상이라니까 무서워하지 말고 편히 가요. 가서 엄마, 아버지 만나 그간 못 나눈 얘기도 나누고 맛있는 것도 해 먹으며 재미나게 지내고 있어요. 그렇게 잘 지내고 있으면 나도 곧 갈 테니까. 응?” 숨이 잦아드는 아빠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엄마가 말했다. 나는 아빠가 가려는 그곳이 이곳보다 아름답기를, 엄마의 말처럼 고통 없는 세상이기를 빌고 또 빌었다. 그래야만 아빠를 떠나보낼 수밖에 없는 현실을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차갑게 식어가는 아빠를 하릴없이 지켜만 봐야 했던 시간은 말할 수 없이 슬프고 두려웠다. 그런데 ...
입력:2018-10-12 04:10:01
[살며 사랑하며-하주원] 시험을 위한 적당한 불안
대학수학능력시험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수시 등 다른 전형이 없던 예전보다는 덜하지만 많은 학생들이 시험에 대한 불안을 해결하지 못해 큰일이라고 한다. 큰일이 아니다. 시험 때문에 불안한 것은 당연하다. 불안하지 않다면 지겨운 공부를 계속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불안은 우리를 버틸 수 있게 하고, 불안 때문에 우리는 눈앞의 즐거움을 참는다. 적당한 불안과 긴장은 먼 목표를 위해 긴 호흡을 해야 할 때 꼭 필요하다. 불안이 어느 정도까지는 최고의 결과를 나오게 하지만, 정도를 넘어서면 집중력을 떨어뜨리므로 적당한 것이 좋다. 불안해서 잠을 ...
입력:2018-10-10 04:10:01
[살며 사랑하며-황시운] 함께 걷기 좋은 길
집에서 아빠가 입원해 있는 호스피스 병원까지 거리는 겨우 3㎞ 남짓이다. 건강한 사람이라면 하루에도 몇 번씩 오갈 수 있는 거리다. 그러나 몸이 불편한 나는 가족 중 누군가가 데리러 와주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장애인 콜택시를 예약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건 꿈도 못 꿀 일이었으며, 혼자서 휠체어를 타고 가기엔 도로 사정이 너무 나쁘다. 그렇게 아빠를 뵙고 돌아올 때마다 누군가가 나를 데리러 오기 전에 아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떡하나, 임종조차 지키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불안했다. 엄마와 동생은 구시가의 인도가 ...
입력:2018-10-05 04:10:01
[살며 사랑하며-하주원] 10월이 기회다
습관을 바꾸기는 어렵다. 우리 몸은 항상성(homeostasis)을 유지하고 싶어 하는, 즉 기존의 상태를 더 좋아하는 습성이 있기에 외부 자극이 오면 그 상황에 맞게 타협(신항상성, allostasis)은 하되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려 한다. 문제는 뇌의 부위마다 각기 다른 지자체와 같은 특성을 갖고 있어서 전두엽이 결심하는 새로운 내용이나 노력하려는 의지도 원시적인 뇌에서 받아들이기에는 관성을 깨뜨리는 일종의 ‘외부 자극’일 뿐. 나를 포함해 체중을 감량하고 싶은 사람들이 실패하는 까닭은 뇌가 예전의 체중으로 자꾸 돌아가려는 장치를 만들기 때문이다. ...
입력:2018-10-03 04:05:01
[살며 사랑하며-신용목] 보자기에 싸여 있는 것
알고 보면 모든 것들은 ‘보자기’에 싸여 있다. 모과를 보고 알았다. 모과 껍질은 보자기의 주름이 내용물의 결을 따라 볼록볼록 당겨진 것 같고 마침내 꼭지에 이르러 오목한 매듭을 지어 꽉 묶어놓은 것 같다. 이렇게 야물게 싸놓았지만 냄새까지 봉할 수는 없어서 방 안 가득 모과향을 풀어놓는 노란 보자기. 사과는 빨간 보자기에 싸여 있고 감은 주황 보자기에 싸여 있는데, 이 보자기들을 풀면 가을이 쏟아져 나온다. 그러고 보면 가을도 높고 푸른 하늘 보자기에 싸여 있어서 우리는 그걸 풀어보려고 자꾸 문을 열어놓는지도 모르겠다. 보자기에 물건을 ...
입력:2018-10-01 04:10:01
[살며 사랑하며-황시운] 그들은 만나야 한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선물한 2t의 송이버섯이 고령의 이산가족 4000여명에게 추석 선물로 전해졌다. 지난 며칠간 북녘에서 온 버섯을 선물 받은 이들에 대한 신문 기사나 뉴스 영상을 여럿 접할 수 있었다. 송이버섯을 어루만지며 눈물짓는 노인들의 손길은 한없이 애틋해 보였다. 그들은 버섯을 단순한 먹거리가 아닌 고향 그 자체라 느끼는 것 같았다. 고향에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고 살아왔음에도 가슴 한구석이 저릿해지면서 울컥 눈물이 솟았다.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할 때마다 상봉 신청을 했지만 한 번도 선정되지 못했다는 노인의 사연은 더할 수 없이 쓸쓸...
입력:2018-09-28 04:05:01
[살며 사랑하며-황시운] 모두를 위한 명절
SNS 타임라인에 가짜 깁스 광고가 올라왔다. 그걸 보니 추석이 다가오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탐스러운 과일 사진이나 한복을 차려입은 가족의 사진이 아니라 가짜 깁스 광고를 보고서야 추석임을 실감하다니, 어쩌면 삶은 그 자체로 한편의 블랙코미디인지도 모를 일이다. 몇 년 전 가짜 깁스에 대한 얘기를 처음 접했을 땐, 이런 것까지 동원해 눈속임할 만큼 싫을 건 뭐고, 이렇게까지 싫다는데 굳이 불러모아 복닥거릴 건 또 뭔가 싶었다. 그저 먼 세상 얘기라고 생각하며 구경하듯 바라봤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비혼인 데다 우리 집은 명절에도 별다른 ...
입력:2018-09-21 04:10:01
[살며 사랑하며-하주원] 어른의 유행어
요즘 “자기혐오 때문에 왔어요”라며 첫 상담을 시작하는 사람이 늘었다. ‘혐오’라는 단어는 원래 있었지만, 그 표현은 분명 요즘 더 자주 쓰이고 있다. 단순한 미움이나 싫음보다도 더 강해서 “저 자신이 싫어요”보다도 더 세게 들리는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때로는 그런 말을 쓸수록 감정이 말을 따라 깊이가 더 심해지는 것은 아닐까 염려스럽다. 우울증은 단지 슬픈 것이 아니라 세상과 내 존재에 대한 인식의 변화다. 스스로를 과도하게 비난(self-criticism)하고 끊임없이 과거를 곱씹는 생각은 우울증을 더 심하게, 오래 계속...
입력:2018-09-19 04:10:01
[살며 사랑하며-신용목]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
사랑에는 언젠가 끝나고 말 운명과 그것이 남길 상처에 대한 각성이 미리 도착해 있다. 사랑에 빠진 자는 유리잔 속에 감춰진 금들을 벌써 보고 있어서 달콤한 술에 취해 있는 순간에도 깨진 유리 위를 맨발로 걷는 상상을 쉬이 놓을 수 없다. 사랑이 고통스러운 상상을 동반하는 게 아니라 그 상상까지 포함해 사랑이라고 말해야 한다. 사랑은 그렇다. 사랑을 조여 왔던 불안이 마침내 파국을 불러왔는지 사랑이 필연적으로 맞게 될 파국이 앞서 불안을 앓게 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렇기에 사랑은 그 시작과 끝이 서로를 껴안고 만드는 소용돌이처럼 유유히 흘러가는 생...
입력:2018-09-17 0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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