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배승민] 안녕, 여름. 안녕



여름이 끝물이라는 소식을 전하는 바람이 분다. 지구 온난화 탓일지, 극적인 소식들이 사회를 쓸고 가서인지, 아니면 나도 점점 나이를 들어가고 있어서인지. 어느 계절이나 그 물러감과 다음 계절의 다가옴이 생경하지만, 유독 이번 여름은 그 퇴장이 더 강하게 느껴지는 듯하다. 대다수 실내에서 일하면서도 병원, 학교와 센터를 오가는 중에 몇 번이나 더위를 먹었던 비루한 체력인 주제에 여름이 가는 것이 아쉽다고 하려니 참 계면쩍다. 그것도 그 이유 중 큰 부분이 음식 때문이라니.

해가 어스름 기울면 시장 골목은 거의 인적이 없다. 오래된 철제 셔터가 내려진 가게들, 길고양이만 어슬렁거리는 어두운 골목 속에 따듯한 불빛을 내는 동네 술집이 있다. 술집이라지만 주인도 ‘술도 파는 요릿집’이라고 말할 만큼, 어떨 때는 따듯한 흰밥에 얹어 먹는 고구마줄기 김치, 따로 끓여 차갑게 식혀 내는 찻물, 갓 튀겨 소스에 버무려 나오는 접시들이 다양하다. 술을 거의 못하는 나이건만, 낮의 공기가 유난히 뜨거웠거나 일에 더 치였던 퇴근길이면 우리 부부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간단한 늦은 식사를 위해 그곳으로 간다. 뜨거운 낮의 열기가 어슷어슷 식어가는 조용한 동네, 자그마한 가게 안에서 젊은 주인이 바로 해주는 요리와 손님들끼리 반 농담처럼 부르는 ‘숨은 부엌의 장인’, 주인장 어머니에게서 공수된 다양한 밑반찬을 곁들여 속이 뻥 뚫리는 시원한 맥주 한 모금을 넘긴다. 순간 뜨거운 공기 속에서 머리를 싸매던 한낮의 고민들까지 쏙 잠긴다. 다른 계절에도 여기는 또 그만의 매력이 있지만, 이번 여름의 맛과 기억은 끝나간다. 계절마다, 장소마다 우리의 추억은 생생한 냄새, 소리, 감촉, 그리고 맛과 함께 저장된다.

과거와 같은 혹한과 굶주림, 극한의 생존 위협에 시달리는 시절은 조금 비켜나 있을지언정 우리는 여전히 그리고 실제로, 또는 뉴스와 주변을 통해 상당한 고통과 불안, 몸과 마음이 아픈 시기를 마주하고 있다. 그때마다 엉뚱하지만 나를 위로해 주는 음식과 곁들여진 추억을 마음속 한 귀퉁이에서 잠시 꺼내어 본다. 감사하게도 나에게 온전히 주어졌던, 순간이나마 행복했던 추억과 감각들을.

배승민 의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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