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배승민] 저마다의 애도



빼꼼 열린 문틈 사이로 늦저녁의 온기가 따스하다. 낯설지만 평온한, 옹기종기 작은 마을. 할아버지는 두런두런 무슨 말을 하시다 발치의 강아지를 쓰다듬으며 슬쩍 웃으시는 듯하다. 그리고 나는 한동안 목이 메었다. 어린 시절 상당 기간 조부모의 손에서 성장한 나에게 집안의 제일 큰 어른은 언제나 할아버지였지만, 어느 새벽 예고 없이 걸려온 부고 전화로 모든 것이 달라졌다. 정신없이 장례를 치르고 나서 나는 내가 일상으로 돌아온 줄 알았다. 그러나 몇 년 지나 꾼 꿈 뒤에야, 나는 나의 애도가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꿈의 분석은 이론마다 다양하고 복잡하지만, 여기에서는 고인의 꿈을 이야기해보자. 애도와 상실을 겪는 이들을 위한 책 ‘우리는 저마다의 속도로 슬픔을 통과한다’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고인의 꿈은 회복으로의 새로운 길을 열어주기도’ 하지만 ‘감정이 너무 북받치면 꿈의 재료로부터 차단되어 꿈을 꾸지 않을 수도 있다’고. 그래서인가 나 역시 한참이 지난 뒤에야 할아버지의 꿈을 꾸었던 것 같다.

우리의 뇌는 너무 강한 혼란과 충격의 감정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컴퓨터 하드를 분리하듯, 뇌의 일부에 보호막을 친다. 그리고 한참 뒤에야 조금씩, 천천히 그 보호막이 걷히며 물이 불어나듯 감정에 휩쓸린다. 고인이 좋아했던 음식, 함께 보던 드라마 배경음악, 집안 청소 중 나온 고인의 철 지난 옷 등. 평범한 모든 것이 충격이 되는 당황스러움. 그리고 ‘산 사람은 살아야지’라는 주변의 시선에 나만 이상한가 싶어 도움을 구하기도 어려운 것이 현대사회에서 애도를 겪는 이들이 겪는 혼란이다. 기념일반응(anniversary reaction)처럼 일반적인 애도 기간이 한참 지난 뒤인 고인의 생일이나 기일 등의 특정 시기에 더욱 심리적 고통이 커질 수 있건만, 이마저 바쁜 현대에서는 무시된다. 괜찮다. 나는 나의 속도대로 애도하고 슬퍼한다. 그래도 괜찮다. 애도로 고통에 잠겨 병원을 찾는 이들에게, 또는 병원에 올 기회조차 갖지 못한 이들에게, 책의 문구를 빌려 위로를 전한다. 애도는 극복할 대상이 아니며 옳고 그름이 없다. 우리는 저마다의 속도로 슬픔을 통과한다.

배승민 의사·교수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플러스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