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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이장식 (30·끝) 평생을 후학 위해 강단에 서… 이들 좋은 목회자 되길
이장식 교수와 박동근 사모가 경기도 화성시 ‘광명의 집’ 앞마당에서 난간에 기댄 채 미소 짓고 있다. 케냐에서 돌아와 무료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하나님께선 내게 마지막 봉사의 자리를 주셨다. 논쟁과 다툼이 많은 한국 개신교계에서 초교파적으로 신학자들을 규합해 신학연구소를 개설했다. 우린 매년 2회씩 연구지를 출판했고, 연구소는 에큐메니컬 신학연구소로 발전하게 됐다. 이 신학연구소는 내 호를 따 ‘혜암신학연구소’라 이름 붙여졌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내 나이 100세가 됐다. 죽음의 공포가 가장 심했던 지난 한 세기를 뜻 있...
입력:2021-07-19 03:05:02
[역경의 열매] 이장식 (29) 케냐서 15년 사역 마치고 안식처 ‘광명의 집’으로 귀국
이장식 교수 아내 박동근 사모가 케냐 키무리던 유치원 원아들과 함께 찍은 사진. 유치원 원아가 늘면서 아내는 유치원 독립 건물을 지을 필요를 느꼈다. 약 4만5000달러의 비용을 들여 유치원 교사를 우리 집 가까운 곳에 지었다. 석조 건물에 기와를 얹은 한국식 유치원이었다. 유치원 건물 정초석에는 아내가 이 유치원을 설립하고 지었다고 기록돼 있다. 유치원 이름은 지역 이름인 키무리(Kimuri)에 ‘Dawn(새벽)’을 붙였는데, 이는 아내의 이름에 들어가는 동녘 동(東)과 뜻이 통한다. 나와 아내는 아프리카 땅에서 단순한 외래 선교사가 아니라 이곳 공...
입력:2021-07-16 03:05:03
[역경의 열매] 이장식 (28) 목회자 양성 위해 신학교 짓다 교단 재정 어려워져
이장식(아랫줄 왼쪽에서 세 번째) 교수와 박동근(아랫줄 맨 왼쪽) 사모가 PCEA신학교 제자 및 동료들과 함께 찍은 사진. 동아프리카장로교회(PCEA) 총회장 무인디 목사와 증경 총회장 키옹고 목사, 직전 총회장이면서 신학교 학장이던 완자우 박사 등을 1992년 봄 우리 집에 초대한 적이 있었다. 이들과 함께 오찬을 즐기던 중 무인디 목사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 PCEA교회가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와 선교 동역자 관계를 맺고 싶다며 내 의견을 물었다. 난 두 교단이 함께 협력하면 선이 되겠다 싶었다. 난 곧바로 무인디 목사의 말을 편지로 당시 기장 총회장인 ...
입력:2021-07-15 03:05:03
[역경의 열매] 이장식 (27) 교회사 강의로 본격 사역… 후원자들에 선교 서신 보내
이장식 교수 부부가 케냐 도고토 동아프리카장로교회 교단 신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머물렀던 집. 이 교수 부부 뒤로 이들의 발이 돼준 자동차가 보인다. 케냐 입국 후 나와 아내는 당분간 나이로비에 있는 성공회교회에 속한 여인숙에 머물게 됐다. 도착 이튿날 유부웅 목사가 케냐인 구미 목사를 대동하고 찾아왔다. 구미 목사는 수년 전 내가 장신대에 출강했을 때 내 강의를 들었던 사람이었다. 우린 유 목사를 따라 리무루에 있는 그의 사택에 가서 유 목사가 가르치고 있다는 성바울 신학대학을 방문했다. 그곳에서 교수 몇 분과 인사를 나눴다. 기억나는 건 이 ...
입력:2021-07-14 03:05:04
[역경의 열매] 이장식 (26) 정년으로 은퇴… 케냐 장로교신학교서 인생 2막 열어
이장식 교수가 1986년 한신대에서 열린 은퇴식에서 마지막 말씀을 전하고 있다. 1986년 7월 내 은퇴 시기가 다가왔다. 난 한신대로부터 명예 교수의 명칭을 얻었다. 50년 4월 한신대를 졸업하고 전임강사로 봉직한 후 지금까지 36년간 교편생활을 했다. 그중 대구 계명대에서의 재직 4년 6개월을 빼면 32년간 한신대 교수로 재직한 셈이다. 한신대 전체 교수들은 돈을 모아서 한신대학 이름과 마크를 넣은 굵직한 금반지를 선물로 내게 줬다. 난 이 반지를 항시 끼고 다니면서 교수들의 호의를 늘 되새겼다. 전국신학대학협의회에서는 내 30년 신학교육의 공을 치하...
입력:2021-07-13 03:10:02
[역경의 열매] 이장식 (25) 비기독교 학생들, 교정에 위패 놓고 돼지 삶아 절까지
한신대가 1986년 5월 27일 경기캠퍼스 교정에 세운 류동운 열사 추모비. 한신대 신학과 79학번인 류 열사는 80년 광주민주화운동에 참가했다 희생 당했다. 한신대 제공 서울에 올라온 우리 가족은 한강변에 있는 한강 맨션에 입주했다. 아파트를 살 만한 돈이 없었으나 나이 50이 넘어 전셋집에서 살 수 없다는 장모님의 주장에 따라 장인의 도움과 은행 빚을 얻어 집을 구입했다. 내가 대구 계명대에 있는 동안 한신대에서는 학생들의 반정부 시위가 열렬했다. 학교가 무기 휴학 조치를 받은 일도 있었고, 김정준 학장을 비롯한 교수들이 항의 표시로 삭발을 했으...
입력:2021-07-12 03:10:01
[역경의 열매] 이장식 (24) 반정부적 설교로 학생 소요 부추겼다며 교목서 해임
육영수(가운데) 여사의 계명대 방문 당시 찍은 사진. 오른쪽 위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이 이장식 교수다. 대구로 내려온 지 두 달만인 1971년 9월 29일 아침 어머니께서 76세의 나이로 그만 운명하셨다. 어머니는 세수하고 부엌에 나와 아내 옆에서 말린 생선을 손보다가 그 자리에서 쓰러지셨다. 방으로 옮기고 의사를 불러왔으나 이미 숨을 거두셨다. 어머니 본인은 편하게 눈을 감으셨지만, 자식 된 내겐 너무 충격이 컸다. 나와 아내가 미국에서 돌아와 이제 좀 편하게 모시려고 마음먹었는데, 자식의 소원도 부질없는 것이 됐다. 일찍이 남편과 장남이 세상을 ...
입력:2021-07-09 03:05:02
[역경의 열매] 이장식 (23) 아내의 헌신으로 1년 8개월 만에 박사학위 취득
이장식 교수의 아내 박동근 사모가 세 딸과 함께 미국 두뷰크 집 앞에서 찍은 사진. 두뷰크의 우리 가족은 어느 길가의 집 2층을 얻어 입주했다. 아내는 자동차 면허를 쉽게 딴 다음 500달러를 주고 중고차 한 대를 구입했다. 우린 두뷰크의 장로교회에 다녔고, 아내는 친절한 교인들을 통해 쉽게 직장을 소개받을 수 있었다. 내가 학업에 열중하는 사이 아내는 여러 일을 했다. 첫 일자리는 꽃을 심고 키운 다음 화분에 옮겨 심는 일이었다. 힘든 일은 아니었지만 임금이 적었다. 얼마간 이 일을 하다 아내는 맥도널드 공장 직공으로 채용됐다. 유학생 가족 비자라 ...
입력:2021-07-08 03:10:01
[역경의 열매] 이장식 (22) 한신대 재직 중 안식년 맞아 예일대 연구교수로 유학
이장식 교수의 딸 현이 1969년 미국에서 유학 중인 아버지께 보낸 크리스마스 카드. 이때만 해도 현은 자신이 그해 미국으로 건너가게 될 거라고 생각을 못했다. 아내는 결혼 후 5~6년간을 가사에만 매달리며 어린 아이들을 키웠다. 그러다 어느 정도 아이들이 크자 못다 한 공부를 하고 싶어 했다. 아내는 한신대 대학원에 입학해서 기독교 교육을 전공하기로 했다. 학교와 집이 한 캠퍼스에 있으니 그만큼 공부하는 데 편하긴 했지만 역시 가정을 돌봐야 했기 때문에 힘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 무렵 나는 한신대 10년 근속 후 처음으로 안식년을 맞이했다. 1968...
입력:2021-07-07 03:05:02
[역경의 열매] 이장식 (21) 전국신학대학협의회 설립… 교파 간 교류의 물꼬 터
한신대 수유리 캠퍼스 사택 앞에서 찍은 이장식 교수 가족사진. 1964년 우리 가족은 학교 정문이 바라보이는 곳에 있는 사택 2층집으로 이사했다. 아내와의 사이에 진, 현, 영이가 태어났다. 앞서 태어났던 정이와 철이까지 하면 2남3녀 대가족이 됐다. 한신대 캠퍼스는 공부하기 좋은 곳이었고, 교수 자녀들에게는 꽃동산이었다. 초등학교에 아직 다니지 않던 교수 자녀들이 많았는데 저녁마다 TV를 보려고 우리 집 마루에 모여 앉았다. 이 TV는 손아래 동서 되는 김운용(전 국제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씨가 미국 뉴욕에 있는 유엔대사관 한국 참사로 부임해가면서 ...
입력:2021-07-06 03:05:03
[역경의 열매] 이장식 (20) 상처 후 평생의 조력자 된 지금의 아내 만나 재혼
이장식 교수와 박동근 사모의 1960년 3월 7일 결혼식 당일 사진. 채봉씨와의 사별 후 어머니와 여동생이 서울로 올라와 첫째와 미숙아로 태어난 둘째를 돌봤다. 1년이 지나자 여러 분이 재혼을 권했다. 난 서두를 필요를 느끼지 못했지만, 아이들이 어릴 때 재혼을 하는 게 좋다는 여럿의 권고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아이 둘 가진 홀아비가 재혼하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수원장로교회 이주원 목사님의 소개로 그 교회 중등부 교사였던 박동근씨와 만나게 됐다. 동근씨는 재원이었다. 당시 수원 농업진흥청 청소년 지도과에 재직하면서 4H운동(농업...
입력:2021-07-05 03:05:04
[역경의 열매] 이장식 (19) 전도관 신앙에 빠진 아내와 장모, 아이 아픈데 기도만
전도관 앞에 늘어선 생수통들. 전도관 신도들은 박태선씨가 축복한 이 물을 만병통치약으로 믿었다. 현대종교 제공 아내는 박태선씨의 말만 믿고 나를 속히 귀국시켜 같이 신앙촌에 들어가고자 했다. 여의도 미군 비행장에 마중 나온 아내 얼굴은 무척 수척해 있었다. 그런 그를 보자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아내를 따라 마포 한 언덕 위의 천막집으로 갔다. 그곳엔 여섯 살 정이가 독감으로 열이 심한 채 누워 있었다. 아내는 이 작은 천막 단칸방에서 모친과 여동생과 함께 살면서 ‘마포 오만 제단’이라 이름 붙인 전도관 건축 공사장에 매일 나가서 벽돌을 ...
입력:2021-07-02 03:05:03
[역경의 열매] 이장식 (18) 휴전으로 서울 복귀… 학급 담임 맡다 캐나다로 유학
캐나다 퀸즈신학대 유학 시절 동문들과 함께 찍은 사진. 뒷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이장식 교수. 한국전쟁은 휴전으로 멈추게 됐다. 1953년 8월 신학교가 부산에서 서울로 복귀했다. 나 역시 함께 올라와 개강 준비를 했다. 신학교는 그 이듬해 4월 신입생 30여명을 모집했다. 나는 그들의 학급 담임을 맡았다. 그러나 이들 신입생과 사귈 시간적 여유도 없이 난 캐나다로 유학을 떠나게 됐다. 내가 간 곳은 캐나다 옛 수도 킹스턴에 있는 퀸즈신학대였다. 이 학교 학생회가 내 학비를 부담했는데, 내가 이렇게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던 건 당시 토론토 임마누엘 신...
입력:2021-07-01 03:05:04
[역경의 열매] 이장식 (17) 전쟁의 화마 속 어려움 같이 이겨낸 아내와 결혼
1952년 부산 동구 초량동 피란민 마을 모습. 이장식 교수는 그해 부산으로 피란 와 남부민동에 터를 잡았다. 출처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안국동 수용소에서 풀려나왔지만, 그렇다고 안전한 건 아니었다. 한국신학대학 기숙사에 있는데 한 남자가 들이닥쳤다. 그러더니 나에게 빨리 밖으로 나가 기다리라고 했다. 인민군이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또 붙들렸구나 생각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 머뭇거리며 신발을 신는데, 근처에 있던 성바울교회(현 서울성남교회) 김응락 장로가 내게 도망치라는 사인을 줬다. 나는 신학교 마당을 가로질러 사택들이 있는 골목길을 빠져 ...
입력:2021-06-30 03:05:03
[역경의 열매] 이장식 (16) 서대문형무소로 끌려가기 직전 가까스로 풀려나
서울 용산구 서울성남교회(옛 성바울전도교회)에 세워진 만우 송창근 목사 추모비. 성바울전도교회를 세운 송 목사는 한국전쟁 당시 납북됐다. 서울성남교회 제공 그날 해 질 무렵 우리는 팔이 묶인 채 인민군에 이끌려 산에서 내려왔다. 그렇게 끌려간 곳은 서대문형무소 옆을 지나 안국동 로터리에 있는 한 2층 건물 지하실이었다. 인민군 무리가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우릴 구둣발로 차면서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 우리보다 먼저 산에서 잡혀온 청년이 있었는데 너무 많이 맞아서 얼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한참을 맞은 우리는 어디론가 다시 ...
입력:2021-06-29 03:05:03
[역경의 열매] 이장식 (15) 총성 들려 나가보니 “반동분자 쏴 죽여야…” 위협
완장을 찬 청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시민들이 줄을 서서 배급을 받고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세검정 그 좁은 계곡에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서울 수복의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갖고 온 식량이 다 떨어지게 되자 사람들은 시내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갈 곳 없는 이들은 삼각산 산록 이곳저곳으로 흩어져서 피란생활을 계속했다. 특히 젊은 사람들은 더 깊은 산속으로 피신해야만 했다. 인민군이 전투에 동원하기 위해 젊은 사람들을 보는 대로 잡아가던 때였다. 나도 삼각산 기도원 자리에서 많은 사람과 며칠을 지냈다. ...
입력:2021-06-28 03:05:03
[역경의 열매] 이장식 (14) 기독교를 정적으로 여긴 공산당… 목회자들 박해
한국전쟁 발발 다음 날 서울의 모습. 거리에 인적이 드물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전세를 관망하며 학교에 나오던 학생들도 점점 모습을 감췄다. 고향이 먼 학생들은 어찌할 줄 몰라 했다. 귀향길이 안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친구들 몇몇은 내게 같이 남하하자고 했다. 그러나 나는 학교에 남았다. 피란 갈 노자도 없었지만, 무엇보다 연로한 교수님과 동료들이 학교를 지키고 있는데 최연소자인 내가 살겠다고 떠나는 게 마음에 걸렸다. 남침해 내려온 인민군은 낙동강까지 진격해 가는 동안 교회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반공주의자들로 치부하고 심하게 박해했다. ...
입력:2021-06-25 03:05:03
[역경의 열매] 이장식 (13) 졸업 후 모교서 강사 재직… 2개월 만에 한국전쟁
1950년 6월 28일 폭파로 파괴되지 않은 한강교를 그해 7월 8일 미 공군이 폭격하는 장면.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1950년 4월 조선신학대학(현 한신대)을 졸업한 난 계속해서 학교에 머물러 있었다. 당시 교수회 결정이었는데 교수님들은 나를 교수로 키우고자 하셨다. 난 교무과 일을 하면서 신학부에서 영어 고등문법을 가르쳤다. 그리고 저동에 있는 여자신학교에서 서양문화사를 가르쳤다. 당시 신학교는 교수 직급이 제도적으로 제정된 때가 아니었다. 때문에 내 직책이나 직급이 따로 있진 않았지만, 오늘날 제도에 비춰볼 때 전임강사에 해당했다. 아무튼 내 한신...
입력:2021-06-24 03:05:02
[역경의 열매] 이장식 (12) 두 신학교 사이 깊어진 골 결국 메우지 못하고 갈라서
한국전쟁 직전 조선신학대학 이사장 함태영 목사가 말씀을 전하는 모습. 왼쪽부터 이장식 교수, 김재준 목사, 최윤관 목사, 송창근 목사. 내가 조선신학대학(현 한신대) 4학년이던 1949년 장로교 총회는 우리 학교와 장로회신학교 사이 깊어진 골을 메우려 애를 썼다. 두 신학교 합동 위원회를 조직해 절충을 시도했다. 그러나 양측의 입장차는 확연히 달랐다. 조선신학대학 측은 양교의 무조건적인 합동을 내세웠다. 반면 장로회신학교 측은 김재준 교수님의 사퇴와 중요 신학 과목을 선교사들에게 맡기자는 조건을 고집했다. 결국 양교 합동은 좌초됐다. 6·25 ...
입력:2021-06-23 03:10:02
[역경의 열매] 이장식 (11) 송창근·김재준·한경직… 신학대서 세 분의 참스승 만나
1947년 당시 서울 동자동에 있던 조선신학교 전경. 국민일보DB 조선신학대학(이후 한국신학대학, 현 한신대)을 다니면서 송창근 박사님과 김재준 목사님, 한경직 목사님을 만난 건 하나님의 은혜였다. 이 세 분은 교실에서 강의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목회를 통해서도 학생들을 교육시켰다. 송 박사님은 성바울교회(현 서울성남교회)를 신학교 교정에 세웠다. 그는 재래의 한국교회 예배 의식을 혁신했는데 목회기도를 장로들이 맡아 드리던 통례를 버리고 목사가 드리게 했다. 설교와 기도 시간 길이도 제한했다. 예배가 1시간 정도면 끝났다. 당시로선 파격이었다. ...
입력:2021-06-22 03:10:01
[역경의 열매] 이장식 (10) 신학에 대한 열망에… 교사생활 접고 조선신학교로
1950년 4월 6일에 찍은 조선신학대학 학부 1회 졸업생 기념사진. 뒷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이장식 교수. 1년간의 계성중학교 교사생활은 보람도 있고 즐거웠다. 그러나 신학공부에 대한 열망이 계속 내 마음 속에 피어올랐다. 해방 직후였던 1947년에 대학은 몇 군데 되지 않았다. 남한에서 신학을 할 수 있는 곳은 연세대 신학과와 조선신학교, 감리교신학교, 성결교신학교 정도였다. 이런 마음을 품고 있는데 밀양에서 알고 지내던 윤술용 목사님이 나를 서울역전 동자동에 있던 조선신학교 교장 송창근 박사님께 소개해 줬다. 입학시험이 이미 끝난 시점이었...
입력:2021-06-21 03:10:01
[역경의 열매] 이장식 (9) 모교 계성학교서 배운 적도 없는 국어 가르치게 돼
계성학교 개교 30주년 기념으로 1936년 10월 16일 열린 체육대회 모습. 당시 계성중 학생이었던 이장식 교수는 10년 뒤인 1946년 9월 계성학교 국어교사로 다시 체육대회에 참가했다. 계성고 제공 밀양 집으로 돌아와 보니 세상이 달라져 있었다. 1년 전만 해도 세력을 부리던 일본인들의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정미소나 수리조합, 면사무소 등 기관이 다 한국인들 손으로 넘어와 있었다. 다만 치안은 어수선했다. 지방별로 자치적인 민간단체가 생겨서 치안을 챙겼지만, 교육도 훈련도 받지 않은 마을 청년이 치안대원이랍시고 모인 게 다였다. 이들이 총을 ...
입력:2021-06-18 03:10:01
[역경의 열매] 이장식 (8) 징용 끌려가 사지를 헤매다 그리웠던 어머니 품으로
해방직후 일본 야마가다현의 조선인 아이들. 이장식 교수는 야마가다현 조선인연맹본부에 취직해 이들의 명부 작성하는 일을 했다. 출처 블로그(gen4n) 캡처 초기 조선인연맹은 좌우 색깔 없이 순수하게 일본 내 거주하는 조선인을 보호하는 데 초점을 뒀다. 나는 요네자와 지부에서 야마가다현 조선인연맹본부로 전근됐다. 교포들의 명부를 작성해 그들의 실정을 살피는 게 내 일이었다. 이때 일본 사회는 그야말로 암흑이었다. 그들이 그렇게 부르짖고 자랑하던 ‘야마토 다마사이’(일본 혼)라는 말도 쏙 들어갔다. 조선과 만주, 대만에서 높은 벼슬을 갖고 ...
입력:2021-06-17 03:10:01
[역경의 열매] 이장식 (7) 굶주림과 밤마다 폭격 있을 거란 소문에 공장서 탈출
일본 도쿄 시민들이 1945년 8월 15일 히로히토 천황의 항복 선언을 라디오를 통해 듣고 있다. 출처 Japan’s Longest Day 가와사키와 시나가와는 하룻밤 사이에 폐허가 됐다. 폭격으로 공장의 변전소가 불탔고 식당도 반파돼 공장 기능이 마비됐다. 난 공장으로 돌아갔다. 흩어졌던 동료들도 며칠 지나자 하나 둘 공장으로 돌아왔다. 폭격 이후 공장에서의 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하루 식량은 주먹밥 한 덩이가 다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힘들었던 건 B29 폭격이 밤마다 있을 거란 소문이었다. 우린 밤이면 가까운 산으로 가서 밤을 지새우고 아침이면 공장...
입력:2021-06-16 03:10:01
[역경의 열매] 이장식 (6) 징용돼온 야금 공장에 B-29 폭격 ‘온 도시가 화장터’
미군이 1945년 3월 도쿄대공습 때 사용했던 B-29. 이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에도 사용됐다. 출처 미국육군항공대(USAAF) 대학에 재학한 조선인 학생들은 학병이라는 이름으로 일본군대 지원을 강요당했다. 어떤 사람은 중국 땅으로, 또 어떤 사람은 동남아로 끌려갔다. 내가 만일 일본에서 어느 학교에 입학했더라면 학병으로 어느 곳인가로 끌려갔을 것이고, 또 어떻게 됐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계속되면서 나 역시 징용을 피하지 못했다. 1945년 1월 징용명령서를 받았다. 마을 내 24세 남자들을 모조리 잡아가는 소위 횡단 징용이었다. ...
입력:2021-06-15 03:05: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