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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황성주 (5) 3년 내 서울대 복음화 확신… 학우들 전도에 승부 걸어
40년 전 서울대 캠퍼스 복음화의 주역들. 왼쪽부터 이원재 조선대 교수, 홍종인 서울대 교수, 황성주 회장, 소영섭 전 연변과기대 교수. 1976년 10월 15일 서울대 개교 30주년 기념일이었다. 학생회관 뒤쪽 26동 대형 강의실은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정신사의 강은 어디로 흐르는가?’라는 제목으로 김준곤 목사님의 신앙 강좌가 있었기 때문이다. 강연이 끝나고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서울대 한국대학생선교회(CCC) 총무 순장을 맡았던 나는 강단으로 뛰어올라가 ‘서울대 복음화 선언문’을 낭독했다. 그것은 당시 대표 순장이던 박...
입력:2022-03-29 03:10:05
[역경의 열매] 황성주 (4) 세계복음화 비전 영향받고 ‘평생 복음 전하는 의사 되게…’
대학생 시절 황성주 회장(오른쪽 첫번째)과 한국대학생선교회 형제들이 영적 스승인 김준곤 목사(맨 왼쪽)로부터 말씀을 듣고 민족복음화의 사명을 가슴에 아로새겼다. 김준곤 목사님과의 만남은 선물 그 자체였다. 특히 지상명령이라고 불리는 ‘너희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는 말씀에 근거한 세계복음화의 비전은 피 속을 흐르듯 내 일생일대의 신앙 철학이 됐다. 그래서 대학시절 미친 듯이 복음을 전했고, 주님 닮기를 열망하며 최고의 비전인 세계선교에 목숨 거는 ...
입력:2022-03-28 03:10:03
[역경의 열매] 황성주 (3) ‘고통의 심연’을 ‘아름다운 호수’로 만들어주신 하나님
황성주 회장 부부(앞줄)가 2002년 미국 워싱턴 한빛지구촌교회에서 목사 안수식 후 어머니(뒷줄 맨 왼쪽)를 모시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어머니, 이름을 부를수록 그 포근함이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른다. 어머니는 할머니의 반대로 사범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평범한 주부로 아쉬운 일생을 사신 분이다. 아버지와의 불화로 난무하는 폭력과 폭언 등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사셨다. 처절한 고통을 때로는 인내로, 때로는 임기응변으로 극복하셨지만 가슴속에 맺힌 것이 무척 많으신 분이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일이다. 그때는 방과 후에 학교 도서실에서 밤 11시30분까지 ...
입력:2022-03-25 03:05:03
[역경의 열매] 황성주 (2) 영성 학자들 만남 통해 ‘사랑의 혁명운동’ 영적 기초 쌓아
황성주 회장(뒷줄 오른쪽 세번째)이 2007년 8월 미국 콜로라도 록키마운틴공원에서 콜로라도 개척팀과 함께 킹덤드림을 꿈꾸며 화이팅을 외치고 있다. 50세에 미국 콜로라도를 간 것은 엄청난 도전이었다. 자연인의 삶을 누리는 계기가 되었다. 나보다 더 크고 위대한 것을 만나면 인생이 바뀐다. 이른바 ‘타자성’의 경험이다. 나를 객관화하고 상대화시켰다. 콜로라도의 대자연, 산과 들판, 강과 골짜기, 사시사철 계속되는 경이로움에 넋을 잃었다. 그리던 자연인의 삶이 시작되었다. 창조신앙의 본질을 알게 되었다. 이때 비로소 창조신앙과 구속신앙...
입력:2022-03-24 03:10:02
[역경의 열매] 황성주 (1) 만남은 축복, 변화의 시작… 하나님은 내 삶의 모든 것
황성주 회장이 2022년 새해를 맞아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삼평동 사랑의병원 진료실 앞에서 ‘사랑의 혁명을 꿈꾸다’라는 하나님 나라의 비전(Kingdom Dream)을 제시하고 있다. 만남은 축복이요, 거룩한 변화의 시작이다. 19세에 만난 김준곤 목사님은 내 삶의 한 복판에 영성의 폭탄을 터뜨린 분이다. 이 분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만남의 축제가 인생을 송두리째 변화시켰다. 진정한 나를 찾았고 이웃을 재발견했다. 민족을 만나고 세계를 만났다. 그토록 찾아 헤맸던 진리를 알고 복음을 미친 듯이 전했다. ...
입력:2022-03-23 03:10:01
[역경의 열매] 이건숙 (30·끝) 주님이 명한 내 소명은 성경과 문학 사이 다리 놓는 것
소설가 이건숙(앞줄 오른쪽 세 번째) 사모가 2018년 크리스천문학나무에서 등단한 작가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다음 시는 내 아들이 아버지 신성종 목사를 어떻게 보았는지 쓴 글이다. 제목은 ‘아버지가 숨겨놓은 리어카’이다. ‘내 앞에서는/ 항상 새 양복을 입으시던 아버지/ 용돈을 왜 이리 많이 주시나/ 아버지께 물어도 대답이 없으시네./ “아버지 부자 상자를 가지셨지요?”/ 말없이 헤어진 아버지를/ 어느 날 길에서 보았네./ 흙 묻은 헌 옷차림으로/ 붕어빵 장사를 하시는 아버지/ 내 앞에서 나쁜 사람이 리어카를 엎어...
입력:2022-03-22 03:05:04
[역경의 열매] 이건숙 (29) 기독 작가의 글은 생명의 양식… 성도들 삶 문학으로 승화
소설가 이건숙(앞줄 왼쪽) 사모가 1998년 남편 신성종 목사, 두 아들, 며느리 및 손주와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다. 한 국가처럼 세상 모든 층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영아 거지 사기꾼 부자 낙오자 정치가 교수 의사 등 모든 층의 사람들이 모인 나라이다. 낙심하고 가난한 병든 사람들을 사랑으로 돌봐야 하고, 거드름을 피우는 가진 자들을 이끌고 천국을 향해 대행진을 하는 곳이다. 사모의 자리는 그 나라의 퍼스트레이디이지만, 존경을 받고 위함을 받는 자리가 아니다. 오히려 맨 밑바닥의 사람들을 섬기며 맨 위의 귀족들...
입력:2022-03-21 03:10:01
[역경의 열매] 이건숙 (28) 부족한 재정 메우려 몸 혹사… 새벽 기도회 도중 쓰러져
소설가 이건숙(왼쪽 두번째) 사모가 남편 신성종(왼쪽 세번째) 목사와 함께 2004년 서울 여의도순복음교회를 방문해 이영훈(오른쪽 두번째) 목사와 환담하고 있다. 몸을 짓누르는 무게에 눌려 간신히 눈을 뜨니 남편 신성종 목사가 내 옆에 엎드려 있었다. 한의사도 다녀갔는지 목 뒤에 자잘한 일회용 침이 꽂혀 있었다. 온몸에 생명구조 장치가 주렁주렁 달렸고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의식이 돌아와 눈을 뜬 나를 보더니 남편은 흐느꼈다. “살아났군.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셨어. 이제 우리 고국으로 돌아가서 치료를 받자. 온전히 당신을 위해서 내가 살 거...
입력:2022-03-18 03:05:03
[역경의 열매] 이건숙 (27) 목회 현장서 얻은 소중한 글감, 소설로 다시 태어나
소설가 이건숙(왼쪽 두 번째) 사모가 2000년 남편 신성종(왼쪽) 목사 및 친정어머니(왼쪽 세 번째)와 미국 LA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남편과 목회하는 동안 기독교 전래 100여년 역사에 켜켜이 스며있는 인물들이 소설 글감으로 넘쳐났다. 목회 현장에서 교인들이 전해주는 선조들의 신앙 이야기를 짧은 스마트 소설 형식으로 월간 새가정에 ‘민초들의 이야기’ 제목으로 연재했다. 세월 속에 살아오고 있는 이들의 믿음은 반드시 남겨야 할 글감들이었다. 나는 심방을 가면 그 집안의 선조들 이야기를 들으려고 귀를 세웠다. 그들은 신이 나서 풀어놓는 통...
입력:2022-03-17 03:05:04
[역경의 열매] 이건숙 (26) 이제 겨우 살만한데… 교수직 버리고 목회 결심한 남편
소설가 이건숙(가운데) 사모가 2004년 남편 신성종(오른쪽) 목사와 교회 수련회에서 피에로와 함께 서 있다. 남편 신성종 목사는 늦은 나이에 안수를 받고 충현교회 대학부를 인도하다가 사임했다. 명지대 교수 겸 대학교회 목회를 했다. 두 가지 사역 모두 전임이라 드디어 강단 위에서 쓰러지는 사건이 나고 하나님은 그제야 귀국할 적에 원했던 그 신학교로 보냈다. 거기서 부교수를 거처 정교수가 되고 대학원장이 되었다. 시동생들도 자립하고 이제 시부모님만 남아 숨통이 트이는데 남편은 갑자기 학교를 버리고 목회를 하겠다는 결심을 했다. 나도 어느 정도 안...
입력:2022-03-16 03:05:03
[역경의 열매] 이건숙 (25) 돈 욕심에 “우리 한국 가지 말고 장사나 해요”
소설가 이건숙 사모가 1989년 대전중앙교회에서 목회하던 남편 신성종 목사와 나란히 서 있다. 우리 부부가 가발가게를 시작한 2년간은 초창기 개척 시기라 호황이었다. 남편 신성종 목사는 돈이 들어오니 오로지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좋은 타자기도 사고 책도 마음대로 사서 공부하는 속도가 빨라 급 스피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가발가게를 하는 동안 내겐 엄청난 유혹이 다가왔다. 세상에! 돈이 술술 들어오니 돈으로 무엇이나 할 수 있었다. “여보! 우리 교수니 목사니 신학자니 다 팽개치고 장사를 합시다. 돈이 이렇게 술술 들어오는데 뭣 하려...
입력:2022-03-15 03:05:04
[역경의 열매] 이건숙 (24) 가게 데리고 나간 아이들 거리에서 “Come in, Try the wig”
소설가 이건숙 사모가 1988년 남편 신성종 목사, 두 아들과 가족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우리 부부는 겁도 없이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게 물어물어 선반을 샀다. 하나씩 둘러메고 와서 사방에 선반을 매달고는 가발을 진열했다. 필라델피아 남쪽에 처음 들어선 가발 가게였다. 금요일 오후와 토요일에 손님이 밀려와서 선반에 진열해놓은 가발이 하나도 남지를 않았다. 몽땅 팔려 돈이 소쿠리에 수북했다. 주말에 팔리는 것이 그 주간의 80%를 차지했다. 주중에는 아이 둘을 데리고 기차와 버스를 번갈아 갈아타고 가발가게에 와서 장사했다. 손님이 적어 아이들을 돌볼 ...
입력:2022-03-14 03:05:05
[역경의 열매] 이건숙 (23) 가발 사업 시작한 지인 “돈 많이 줄 테니 도와줘”
소설가 이건숙 사모가 미국 유학 중이던 1973년 필라델피아의 가발가게에서 선반을 배경으로 웃고 있다. 아이 둘을 거느린 가난한 유학생 부부는 그야말로 사면이 꽉 막힌 상태였다. 그냥 귀국하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하여 열린 문을 찾아야 하느냐 하는 갈림길에 서게 됐다. 그 시기에 뜬금없이 워킹 블라인드에서 함께 일하며 내가 전도해 예수를 믿게 된 P여사가 전화했다. “밤에 양로원에서 일하니 건강도 버리고, 돈도 밑바닥 수당을 받으니 어떻게 살아. 내가 은혜를 입었으니 갚아야지. 가발 가게를 열었는데 손이 모자라니 가장 바쁜 주말에만...
입력:2022-03-11 03:10:02
[역경의 열매] 이건숙 (22) 낮엔 육아와 교회 일, 밤엔 양로원서 간호 보조로
소설가 이건숙(왼쪽) 사모가 198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상식에서 단편 ‘양로원’으로 소설부문 상을 수상하고 있다. 둘째 아들을 낳고는 워킹 블라인드에서 시각 장애인들과 일할 수가 없어 나는 남편 신성종 목사와 의논해 한국에 두고 온 큰아들을 데려오기로 했다. 연년생의 두 아들을 낮에는 내가 교회 일을 하면서 돌보고, 학교에서 돌아온 남편이 밤에 교회 일을 하면서 아이들을 돌보는 시간에는 내가 또 밤에만 일하는 직업을 구하기로 했다. 그 방법이 아니면 우리는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신문 구인광고를 보니 밤에만 일할 수 있는 곳은 양...
입력:2022-03-10 03:05:03
[역경의 열매] 이건숙 (21) 군용 가방공장 취직… 시각장애인 틈에서 재봉틀과 씨름
소설가 이건숙(왼쪽) 사모가 1971년 미국 필라델피아의 출석 교회에서 남편 신성종 목사와 두 아들을 안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미국 필라델피아에 와있던 유학생 부인 셋이서 직장을 구하러 다운타운으로 나갔다. 도시락으로 감자를 삶아 핸드백에 넣고 셋이서 무조건 직장 구하기 작전에 뭉쳤다. 1960년대 한국은 너무 가난했다. 얼마 안 되는 유학생과 그 아내들은 모두 막노동을 해야 할 지경이었다. 아침 집을 나설 적에 남편 신성종 목사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 무조건 ‘예스, 아이 캔’(Yes, I can)이라고 대답해. 그래야 능력이 있다고 인정하...
입력:2022-03-09 03:10:01
[역경의 열매] 이건숙 (20) 산욕열로 죽을 고비 넘긴 후 유학간 남편 따라 도미
소설가 이건숙 사모의 아들을 돌봐주신 친정어머니가 1969년 서울 정릉의 아파트 앞에서 손자를 안고 있다. 시어머니는 17세에 남편 신성종 전도사를 낳았지만, 나는 서른이 가까운 노산이었다. 그런데도 시어머니의 충고를 따라 기저귀도 빨고 찬물에 목욕도 했다. 하루는 학교에서 돌아온 남편이 혼수상태에 빠져 누워있는 나를 보고 장모에게 전화했다. 일이 이렇게 되니 오빠는 어쩔 수 없이 친정어머니를 내게 보내면서 투덜댔다. “이러다가 내 동생 죽이겠다. 어쩔 수 없지. 어머니가 가서 돌볼 수밖에 없네요.” 급히 간 병원의 진단은 산욕열이었다. ...
입력:2022-03-08 03:10:02
[역경의 열매] 이건숙 (19) 고단한 생활에 영양부족으로 2.2㎏ 작은 아이 출산
소설가 이건숙 사모와 신성종 목사의 1967년 서울 충현교회 결혼식 기념사진. 서울 사당동 총신대는 ‘헐떡고개’라고 부를 정도로 가파른 곳에 있었다. 아스팔트가 깔리지 않은 진흙 길이라 비라도 오는 날이면 구두끈만 남겨놓고 온통 진흙으로 뒤범벅이 될 정도였다. 누가 보면 간첩이 산야를 헤맨 것 같다고 의심할 지경이었다. 쌀을 봉지로 사 나르면서 주로 밑반찬으로 살아가야 했다. 시누이와 남편 신성종 전도사의 등록금을 내고 살자니 무조건 아껴야 했다. 고추를 소금에 삭혀 잘게 썰어 먹고, 꼴뚜기를 상자째 사다가 소금에 삭혀 그걸 한두 ...
입력:2022-03-07 03:10:02
[역경의 열매] 이건숙 (18) 유학 떠나게 된 신 전도사, 약혼부터 하자고 막무가내
소설가 이건숙(오른쪽) 사모가 1967년 서울 충현교회에서 열린 결혼식에서 남편 신성종 목사와 행진하고 있다. 어머니는 신성종 전도사의 가정을 파악하기 위해 집배원을 따라 어렵게 달동네에 사는 그의 집을 방문하고는 기절할 정도로 놀라셨다. 결혼은 절대 아니라고 못을 박았다. 그렇게 가난한 가정을 본 적이 없다고 어머니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럴 즈음 신 전도사는 미국 국무부 초청으로 왕복 비행기 삯과 2년간 모든 학비와 식비를 받고 유학을 떠나게 됐다. 그러자 약혼을 하고 떠나겠다고 강하게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 시험에 합격한 사람은 딱 ...
입력:2022-03-04 03:10:02
[역경의 열매] 이건숙 (17) 사윗감 반대하던 어머니 “귀가 커 장수는 하겠네”
소설가 이건숙(오른쪽) 사모가 1965년 서울의 한 음식점에서 신성종 목사와 약혼식 도중 인사하고 있다. 대학 졸업 후 충남 논산여고에 배치돼 부임했다. 1963년도엔 취직이 하늘의 별 따기였다. 서울사대에서 학비를 싸게 받고 공부를 시킨 대신 배치된 학교에서 3년을 근무하는 것이 의무였다. 논산여고는 연무대가 가까워서 훈련병들이 많았다. 군인들의 도시이기에 여학교는 학생들 보호에 만전을 기했다. 방과 후엔 선생님들이 조를 짜서 논산극장과 시내를 순찰하며 학생들을 감시했다. 여학생들은 어찌나 영화 보기를 좋아하는지, 논산극장에 들어가보면 어머...
입력:2022-03-03 03:05:03
[역경의 열매] 이건숙 (16) 친구 따라 성가대 가입… 유치부서 찬송·율동 가르쳐
소설가 이건숙(앞줄 왼쪽) 사모가 1957년 서울대 사범대 재학 중인 정신여중고 동문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정신여고 시절엔 서울 미아리 천막 교회에 다녔고, 대학교 1학년부터 다닌 교회는 동도교회였다. 1959년 청량리는 그냥 시골이었다. 서울대 사범대학은 당시 용두동에 있었고 나는 학교 근처에서 살고 있었다. 고등학교 단짝이 나를 그 교회로 데려갔다. 성가대가 그때 처음 조직돼 나도 친구를 따라 성가대에 섰다. 교인들은 가마니 바닥에 앉아서 예배를 드렸고, 최훈 강도사님이 목회하고 있었다. 청량리 시장 곁에 있어 몹시 가난한 동네 교회였다. ...
입력:2022-03-02 03:10:01
[역경의 열매] 이건숙 (15) 슈바이처처럼 의료선교 꿈꾸다 “험난하게 여자가…”
소설가 이건숙(왼쪽 세 번째) 사모가 서울대 사범대 재학 중이던 1960년 서울 동도교회 교회학교 아이들과 소풍을 떠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나의 제복 시절 꿈은 오직 하나였다. 의사가 되고 싶었다. 정신학교 근처에는 서울대학병원과 의과대학이 있었다. 그 앞을 지날 적마다 하얀 가운을 입어 눈에 띄는 의사들과 학생들 모습은 나를 황홀하게 만들었다. 나는 이과로 가서 의대를 목표로 공부를 했다. 급우들은 거의 이화여대나 숙명여대 쪽으로 지원해 서울대, 특히 의대의 시험 과목과 완전히 달랐다. 이과에서 3명이 의대를 가려고 준비했다. 한 사람은 서울 ...
입력:2022-03-01 03:05:03
[역경의 열매] 이건숙 (14) 성경과 내 삶을 연결… 문학적 기초 닦은 여고시절
기독 여성 교육에 힘쓴 서울 종로구 옛 정신여학교 본관 건물. 국민일보DB 나는 학교도서실 책들을 조금이라도 자투리 시간이 나면 열심히 읽었다. 비 오는 날이나 험한 날씨엔 교실에서 체육 수업을 했다. 정말 재미없었다. 그런 날은 소설을 책상 밑에서 감추고 읽곤 했었다. 한번은 심훈의 ‘상록수’ 끝부분을 읽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어 흐느끼고 말았다. 당황한 체육 선생님은 어디가 아프냐고 다가왔고 내가 소설을 읽다가 우는 것을 안 급우들은 배가 아파 운다고 합창해서 양호실로 쫓겨나 아픈 척 몇 시간을 누워 있던 적도 있었다. 눈코 뜰 새 ...
입력:2022-02-28 03:10:05
[역경의 열매] 이건숙 (13) 철저한 신앙훈련으로 10대의 나를 예비하신 주님
소설가 이건숙(오른쪽) 사모가 1957년 서울 정신여고 교정에서 친구 손을 잡고 계단에 서 있다. 정신여중에 들어가서야 친구들 대부분이 장로나 목사 딸인 걸 알게 됐다. 부모가 교회에 나가는 크리스천 가정에서 이 학교를 선택해 보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하나님은 10대 초반에 나를 여기에 데려다 놓고 장차 쓸 인물로 훈련을 시키셨다. 그 당시에는 그걸 모르고 고등학교는 반드시 경기여고로 가서 오빠에게 보란 듯이 고개에 힘을 주겠다는 결심을 하기도 했었다. 정신여중·고는 아무래도 하나님의 딸들이 모인 곳이라 다정한 분위기였다. 여기서 나는 ...
입력:2022-02-25 03:10:02
[역경의 열매] 이건숙 (12) “그 학교 떨어진 건 기적… 하나님의 큰뜻 있는 듯”
소설가 이건숙(오른쪽) 사모가 1955년 서울 정신여중 교정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6·25전쟁 당시엔 부서진 창고에서 가마니를 깔고 모두 양반다리를 하고 공부했다. 피난 시절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1년 반을 월반하여 6학년이 되었다. 피난민들 틈에 끼어 학업을 중단하고 있다가 내 나이에 맞게 뛰어오른 셈이다. 구구단을 배우지 못하고 6학년에 들어갔으니 산수 시간은 곤혹 그 자체였다. 오빠는 내가 구구단을 못 외운다고 어찌나 머리에 알밤을 먹이는지 머리가 온통 부어올랐다. 3살 위의 오빠는 자신도 월반해서 힘든 판에 내가 가르쳐달라고 자꾸 ...
입력:2022-02-24 03:05:02
[역경의 열매] 이건숙 (11) “여자도 많이 배워야”… 남다른 어머니의 교육열
소설가 이건숙(왼쪽) 사모가 1962년 막냇동생 졸업식에서 어머니(오른쪽)와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어릴 적 내 집은 늘 책을 읽는 분위기였다. 아버지 서재는 마치 도서실 같았고 어머니는 공부방에 내 나이에 맞는 책들로 채워 주셨다. ‘피터 팬’을 읽고 며칠 밤을 자지 못하고 밤에 창문을 열어놓고 주인공을 기다렸던 유년의 숲이 그립다. 그림자를 두르르 말아 칼로 잘라먹는 마귀할멈 이야기는 얼마나 공포심을 안겨주었던지! 나이든 지금도 어둠이 내리면 그 비슷한 무서움이 불시에 엄습한다. 그 당시 방학 책은 우툴두툴 흑색지라 지우고 ...
입력:2022-02-23 03: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