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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김의식 (5) 결혼 후 독립선언… 신혼여행 다녀오니 13만원이 전부
김의식(왼쪽) 목사와 문채성 사모가 1981년 광주제일교회에서 결혼예배를 드리고 있다. 김 목사와 문 사모는 가난한 신혼생활 중에도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했다. 성서침례신학교를 졸업한 나에게 포스터 선교사님께서는 군대를 마치고 미국에서 석·박사학위 과정을 전액 장학생으로 다니도록 해줄 테니 유학 준비를 하라고 권면하셨다. 장로교회 출신이었던 나로서는 고민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전남노회장까지 역임하셨던 아버지는 “어떻게 부자간에 장로교와 침례교로 나뉠 수 있겠냐. 네가 그렇게 좋다 하는 복음을 장로교회에 와서 전하면 ...
입력:2022-01-13 03:10:02
[역경의 열매] 김의식 (4) “주님, 저 좀 살려주세요” 간절한 기도에 성령 임재
김의식(화살표) 목사가 1978년 서울 성서침례신학교(현 성서침례대학원대) 입학식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김 목사는 한양대 재학 시절 성령을 통한 병 고침을 받고 야간에 신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나는 숭일중학교와 광주제일고등학교를 거쳐 1977년 한양대 공대에 입학했다. 슈바이처 선교사의 삶에 감명을 받아 재수하며 의대에 입학하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때부터 방황이 시작됐다. 춤을 배우고 술을 마셨다. 그해 11월 종강 파티를 마치던 날 밤 서울 마포구 집으로 돌아와 쓰러졌다. 처음에는 몸살감기 정도로 여겼다. 그런데 2주 동안 약국에서 ...
입력:2022-01-12 03:05:03
[역경의 열매] 김의식 (3) 금고 손대려다 아버지께 들켜 “커서 뭐가 되려고…”
김의식(뒷줄 오른쪽 두 번째) 목사의 아버지가 1998년 전남 나주 영산포중앙교회에서 원로장로로 추대될 당시 찍은 가족사진. 내가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외로움 속에 살고 있을 때 나를 붙잡아 주신 분은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내가 어머니에게 야단을 맞고 방구석에서 혼자 울고 있을 때마다 다가와 “의식아, 엄마가 네가 미워서 그랬겠냐? 다 너 잘되라고 하신 거야!”하면서 위로해 주셨다. 아버지의 사랑은 당시 나를 붙들어 주는 가장 큰 힘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아버지에게 큰 실망을 안겨 드리는 일이 터졌다. 아버지가 약방에서 ...
입력:2022-01-11 03:05:04
[역경의 열매] 김의식 (2) “의식인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 어머니의 폭탄선언
김의식(오른쪽) 목사가 초등학교 시절 부모님, 두 여동생과 함께 찍은 사진. 김 목사는 어릴적 큰 약방을 운영하시던 아버지 덕에 윤택한 가정 환경에서 살았으나 학교와 교회에서 문제아였다. 부모님은 슬하에 2남 3녀를 두셨다. 내 위로 누나와 형, 그리고 아래로 두 여동생이 있다. 모두 부모님의 신앙을 이어받아 교회를 섬기며 각각 의사 약사 한의사 간호사 그리고 목사 가정을 이뤄 복되게 살아가고 있다. 문제는 셋째인 나에게 있었다. 부모님은 약방이나 교회 일로 늘 바쁘셔서 여러 자녀에게 깊은 사랑을 쏟아 주기 힘들었다. 더욱이 나는 남매 중 한가운데...
입력:2022-01-10 03:05:04
[역경의 열매] 김의식 (1) 치유 목회 원동력은 ‘지역 의식 뛰어넘은 십자가 사랑’
김의식 치유하는교회 목사가 지난달 8일 서울 영등포구 국민일보빌딩에서 자신의 삶을 바꾼 예수님의 은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 내 고향은 전라남도 나주시 영산동 262번지다. 1958년 4월 20일 나주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5학년까지 영산포초등학교를 다녔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호남 출신이어서 받은 혜택보다는 상처가 훨씬 크고 많았다.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서울로 대학을 갈 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그러다가 군대에 가서 경험한 지역 차별은 생각보다 심했다. 졸업 후 장신대 신대원에 들어갈 때도 그랬고 이후 목회를 시작할 때도 ...
입력:2022-01-07 03:10:01
[역경의 열매] 김종생 (15·끝) 소외되고 상처받은 이들의 ‘작은 위로자’ 됐으면…
베트남 출신 여성 윤민주씨의 고향 지인들이 2019년 1월 21일 베트남 현지에서 열린 ‘암소은행 2차 전달식’에 참석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2015년 12월 벌어진 일이다. 당시 서른한 살이던, 베트남 출신 여성 윤민주씨가 남편한테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일곱 살이던 딸도 목숨을 잃었다. 윤씨에게 남편은 편집증 증세를 보였고, 2014년 살해 시도를 했었는데 당시 법원은 접근 금지명령을 내렸지만 허사였다. 남편은 모녀를 살해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윤씨의 한국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부부갈등과 고부갈등, 가정폭력에 시달려야 했다....
입력:2022-01-06 03:05:03
[역경의 열매] 김종생 (14) 위안부 피해 할머니 쉼터 마련… “모두 하나님 은혜”
김종생(오른쪽) 목사가 2012년 10월 위안부 할머니들의 새로운 보금자리가 마련된 것을 기념하는 입주 감사예배에서 발언하고 있다. 2019년 1월 28일 별세한 김복동 할머니는 열네 살 때 군복 만드는 공장에 가는 줄 알고 집을 나섰다가 위안부 생활을 시작했다. 할머니는 이렇게 회고했다. “평일에는 15명쯤, 토·일요일에는 셀 수가 없다. 너무 많아서. 한 50명쯤 됐을 거라. 씻을 시간도 없이 짐승만도 못한 삶을 견뎌냈다.” 그리고 할머니에게 돌아온 것은 가족들의 외면이었다. “내가 나를 찾으려고 하니까 큰언니가 말렸어. 조카들 생각...
입력:2022-01-05 03:05:03
[역경의 열매] 김종생 (13) 지구촌 아픔의 현장 함께한 한국교회… 구호·재건 총력
김종생(왼쪽 다섯 번째) 목사가 2010년 아이티 대지진 당시 현지인들과 대책회의를 열고 있다. 중남미 카리브해에 있는 아이티는 한국인에겐 생소한 나라다. 아이들이 진흙 쿠키로 허기를 달랜다는 이야기까지 있을 정도로 가난한 국가다. 그런데 이런 나라에서 2010년 1월 12일 리히터 규모 7.0의 강진이 일어났다. 지진을 겪어본 나라도 아니고 경제적 기반까지 열악하며, 내진 설계가 제대로 된 건물이 없는 곳이기에 피해는 극심할 수밖에 없었다. 통신 회선이 다 끊겼고 육로로 피해 지역에 접근하기 힘든 곳도 많았다. 구호를 위해 아이티를 찾는 비행기의 행렬...
입력:2022-01-04 03:05:02
[역경의 열매] 김종생 (12) 한국교회봉사단, 참사 희생자와 유족들 상처 보살펴
김종생(가운데) 목사가 2009년 서울 논현동에서 벌어진 고시원 살인 사건과 관련해 유족들과 함께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 한국교회봉사단(한교봉)은 서해안에서 기름띠 제거 방제작업 자원봉사와 함께 지역 주민을 위로하기 위해 쌀과 생필품 지원사업, 무료진료사업, 조손가정 어린이 돌봄 사업도 벌였다. 2008년 5월에는 만리포해수욕장에서 자원봉사자 1만여명과 주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주민 위로와 소망의 날’을 개최했다. 지역 교회를 중심으로 태안 지역에서 생태여름수련회를 가지도록 홍보하고 독려하기도 했다. 기독교 연합단체인 기독교환경운...
입력:2022-01-03 03:05:02
[역경의 열매] 김종생 (11) 태안 앞바다 기름유출 현장서 한국교회 하나로 뭉쳐
한국교회 성도들이 2007년 12월 서해안 기름유출 현장에서 기름띠 제거 작업을 벌이고 있다. 2007년 12월 7일 충남 태안 앞바다에서 유조선과 예인선이 충돌해 원유가 유출되는 사고가 났다. 유조선 탱크에 있던 1만2547㎘(7만8918배럴)의 원유가 태안 인근 해역에 유출돼 태안군과 서산시 양식장, 어장 등 8,000여㏊가 원유에 오염됐다. 온갖 어패류가 폐사했고 짙은 기름띠는 만리포 천리포 모항 천수만 안면도는 물론 전라도까지 퍼졌다. 그야말로 엄청난 재난이었다. 나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 사회봉사부 총무로서 현장에 달려가야 했다. 우리는 만리...
입력:2021-12-31 03:10:01
[역경의 열매] 김종생 (10) 사랑의 연탄 나누기 운동… ‘마을 목회’로 발전
김종생 목사는 ‘목회자 유가족협의회’가 만들어지는 데 일조한 일에 대해 큰 보람을 가지고 있다. 사진은 2007년 8월 30일 서울 종로구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에서 열었던 ‘목회자 유가족 실태조사 연구발표회’. 우리 교단이 선택과 집중을 할 수 있는 영역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구세군의 자선냄비처럼 ‘브랜드화’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어야 했다. 고민 끝에 ‘사랑의 연탄 나누기’ 사업을 시작했다(총회는 지금도 이 사업을 계속하고 있다). 이런 일을 벌일 수 있게 해준 분이 연탄은행 설립자인 허기복 목사다. 나...
입력:2021-12-30 03:05:03
[역경의 열매] 김종생 (9) 예장통합 사회봉사부 총무로 선출… 소외된 현장 찾아
김종생(오른쪽) 목사가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 사회봉사부 총무로 재직하던 시기, 인천에서 ‘북한 콩기름 75t 지원 감사예배’에 참석해 예배를 드리고 있다. 대전에서 월평종합사회복지관과 정림종합사회복지관, 대덕자활지원센터, 유성구노인복지관 등을 성공적으로 운영했다. 이들 기관에 몸담으면서 늘 자문한 것은 ‘일반 사회복지’와 ‘기독교 사회복지’의 차이점이었다.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깊었기에 복지 기관을 위탁받아 운영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이런 이유 탓에 10여년간 여러 기...
입력:2021-12-29 03:05:03
[역경의 열매] 김종생 (8) 사회 복지 사역 현실은 ‘막노동’… 일 잘하고 욕먹기도
김종생(가운뎃줄 왼쪽 두 번째) 목사가 월평종합사회복지관에서 일할 당시 직원들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공부방 사역을 하면서 이웃을 돌보는, 좀 더 ‘종합적인’ 일에 뛰어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리고 그 즈음 접한 소식이 달동네 빈민에게 주택을 제공하는 영구임대주택사업이 대전에서도 시작된다는 것이었다. 장소는 대전의 월평동이었다. 주택 단지에는 빈민들을 돌보는 사회복지관이 2곳 들어서는데, 이곳들을 민간에 위탁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다. 우여곡절을 겪은 뒤 ‘대전노회유지재단’이라는 종교법인이 월평종합...
입력:2021-12-28 03:05:04
[역경의 열매] 김종생 (7) 달동네 공부방 열고 공부는 물론 무료 진료·급식 제공
김종생(왼쪽 네 번째) 목사가 대전에서 공부방 사역을 하던 시절 동료들과 찍은 단체 사진. 신학교 재학 중이던 시절, 나는 대전 낭월교회에서 교육 전도사로 일했다. 이곳에서 나는 사회 선교의 중요성을 알게 됐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 사회봉사부에서 총무를 역임하신 고(故) 박창빈 목사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나는 사회 선교에 대한 훈련도 받기 시작했다. ‘도시사회선교권 강화훈련’의 수강생이 됐다. 나는 ‘대전지역사회선교협의회’에서 실무를 담당했다. 협의회는 노회의 전문성이 부족한 것을 보완하기 위해 2~3개 노회...
입력:2021-12-27 03:05:03
[역경의 열매] 김종생 (6) 출소 후 대전신학대 편입, 신학 공부에 몰두하는데…
김종생(왼쪽 두 번째) 목사가 대전신학대 재학 시절 교수, 동료들과 찍은 사진. 교도소 생활을 하면서 참으로 많은 배움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우리의 삶과 역사 가운데 개입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됐고, 그분을 의지하게 됐다는 게 가장 큰 소득이었다. 나는 출소하면서 신학 공부를 곧바로 시작하기로 했다. 이전에 다니던 학교는 나의 전과 사실을 부담스러워 했다. 그래서 나는 새로운 곳을 찾아야 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소속인 대전신학대에 편입할 수 있는지 문의했고, 그곳에 있던 김진영 교수님이 환대해 주셨다. 지금의 내가 있게 된 데는 김 ...
입력:2021-12-24 03:05:02
[역경의 열매] 김종생 (5) 며칠째 ‘쉰밥’ 나오자 집단 단식… 주동자로 찍혀 ‘독방’
김종생(왼쪽) 목사가 육군교도소에서 함께 생활한 동료들과 훗날 찍은 기념 사진. 한울회 사건으로 나는 헌병대 유치장에 감금됐다. 조사는 보안부대에서 이뤄졌다. 국가보안법을 어겼다는 혐의가 적용됐다. 나는 징역 10년을 선고 받았다. 육군교도소로 이감됐다. 억울함을 삭히면서 10년이라는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매일 고민했다. 그러던 중, 교도소 원목의 위로 방문을 통해 뜻밖의 제안을 받게 됐다. 내가 있던 특별 사동의 주중 예배를 인도해줬으면 한다는 제안이었다. 나의 죄목이 국가보안법 위반이니 사상적인 언급은 절대 엄금이라는 조건이 있었다. 그 ...
입력:2021-12-23 03:10:02
[역경의 열매] 김종생 (4) ‘기독교로 위장한 국가전복단체’ 누명에 30개월 옥고
김종생(맨 뒷줄 왼쪽) 목사가 네비게이토선교회에서 활동하던 당시 동료들과 찍은 단체 사진. 대학생을 상대로 한 네비게이토선교회에서는 세 가지에 관심을 두었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신앙이었다. 둘째는 사람의 변화가 교육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믿음이었다. 셋째는 생활을 같이하는 공동체를 통해 기독교 신앙과 가치를 구현하자는 거였다. 그래서 대안 교육을 하는 거창고와 풀무고, 오산학교 등의 사례를 통해 신앙과 철학을 배웠다. 가족 단위로 공동체를 이룬 원경선 선생 중심의 풀무원, 문동환 목사 중심의 도시 공동체인 새벽의 집, ...
입력:2021-12-22 03:10:01
[역경의 열매] 김종생 (3) 3박 4일 부흥회 참석 후 등교… ‘김 목사’라 비아냥거려
김종생 목사가 20대 초반, 집 앞 감나무 옆에서 찍은 사진. 김 목사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집안에서 자랐지만 10대 시절 하나님을 만나 신학교 진학을 결정했다. 중학교 2학년 성탄절에 같은 학교에 다니는 선배로부터 성탄절 행사에 오라는 말을 듣게 됐다. 이웃 동네인 송촌리에 있던 금암교회(현 동부제일교회)였는데, 처음 간 자그마한 교회에선 까까머리 학생들이 학생회라는 이름으로 자치회 모임을 하고 있었다. 여학생부터 남학생까지 나이도, 성별도 다양했다. 이들은 스스럼없이 새벽송을 같이 돌았다. 나는 이들과 섞여 교회 속 일원이 됐고 신앙심도 갖게 ...
입력:2021-12-21 03:10:01
[역경의 열매] 김종생 (2) 어머니와 다섯 누이만 남게 된 집… 집안일 도맡아
어린시절 살던 집에서 찍은 부모님 사진. 우리 가족은 당시 대전 변두리에 있는 대덕군 회덕면에 살았고 부모님은 모두 농부였다. 우리가 가진 땅은 종중 땅 산비탈의 밭이 대부분이었다. 아버지는 고욤나무에 감나무 접을 붙여 감나무 100여 그루를 심어 돈을 벌었다. 그 까닭에 우리 집은 ‘감나무집’으로 불리곤 했다. 감나무를 지키기 위해 과수원에 집을 지었고, 이곳은 처음엔 원두막처럼 사용하다가 결국엔 우리 가족의 보금자리가 됐다. 아버지는 고욤나무를 심어 키운 뒤 여기에 감나무 접을 붙이곤 했다. 고욤나무를 대목(代木)으로 삼아 접을 ...
입력:2021-12-20 03:05:03
[역경의 열매] 김종생 (1) 어린 시절 가난은 큰 아픔… 친구·선생님 방문 소식에 기겁
지난 9일 서울 종로구 한국교회봉사단(한교봉)에서 만난 김종생 한교봉 상임이사. 그는 “만약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가난을 원망하며 잘못된 삶을 살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신석현 인턴기자 나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가장 많이 되새긴 단어는 ‘가난’이다. 예수님을 믿지도 않는 가난한 집안에서 나고 자랐지만 나는 가난 덕분에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고, 가난한 사람들 곁을 지키려는 마음이 있었기에 내 삶은 풍요로워질 수 있었다. 가난을 통해 나는 주님의 긍휼이 무엇인지 배웠다. 가난한 이들을 찾아간 주님의 사역에 동참할 수 ...
입력:2021-12-17 03:05:03
[역경의 열매] 장순흥 (30·끝) ‘하나님의 대학’ 한동대, 세계 선교의 전초기지로 키워
장순흥(왼쪽 네 번째) 한동대 총장이 지난 1일 경북 포항 한동대에서 온라인으로 세계선교 전략가인 루이스 부시 박사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하고 있다. 한국의 기독교가 부흥할 수 있었던 비결은 복음을 전해준 미국 선교사의 선교 전략이 탁월했기 때문이다. 미국 선교사들은 직접 활동하면서도 한국 목사와 선교사를 육성, 후원했다. 이들이 다시 목회와 선교 활동에 뛰어들면서 재생산 구조를 만들었다. 한인세계선교사대회를 준비하며 새로운 선교 전략과 선교사의 현지 문제 해결이 절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복음의 내용은 영원히 변하지 않지만, 선교 방...
입력:2021-12-16 03:05:04
[역경의 열매] 장순흥 (29) 한국 최초 선교사대회 개최… 희망과 은혜 나눠
지난 7월 15일 경북 포항 한동대에서 개최된 ‘2021 한인세계선교사대회’에서 전 세계 한인 선교사들이 함께했다. 지난 40여년간 한인세계선교사대회는 미국 휘튼대와 아주사대에서 열렸다. 2016년 미국에서 열린 제15차 대회 현장에서 이런 의문이 들었다. ‘대회 이름에 한인이라는 말을 넣어 놓고 세계선교사대회를 한국에서 한 번도 개최하지 않았다니.’ 미국에서 만난 한인세계선교사회(KWMF·Korean World Missionary Fellowship) 선교사로부터 그 이유를 들었다. “재정적 이유로 한국에서 개최하는 게 어렵습니다.” 한동대는 &lsqu...
입력:2021-12-15 03:05:04
[역경의 열매] 장순흥 (28) 코로나 19 어려운 상황 겪으며 주님의 예비하심 알게 돼
장순흥(앞줄 오른쪽 세 번째) 한동대 총장이 2017년 4월 경북 포항 한동대 캠퍼스 내에 설치된 '보아스 메디컬' 개원 예배에서 관계자들과 함께했다. 장 총장 왼쪽이 장응복 장로, 오른쪽은 고준태 원장. 2020년 3월 세계보건기구(WHO)는 코로나19의 세계적 대유행, 즉 팬데믹을 선언했다. 국내외 대학은 비대면 수업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2020년 1학기 개강 연기를 시행했다. 초유의 사건이었다. 학사 운영, 교수학습, 방역 및 학생 관리에 큰 변화가 있었다. “주님, 우리에게 닥쳐온 이 위기 상황을 주님의 지혜와 용기로 슬기롭게 잘 해결하게 인도해주십시...
입력:2021-12-14 03:05:05
[역경의 열매] 장순흥 (27) 한동대 재건 눈물로 기도… 국내외서 도움의 손길 이어져
20년 넘게 무밭으로 방치됐던 한동대 서쪽 지역에 2019년 5월 준공된 ‘김영길그레이스스쿨 및 반기문글로벌교육원’ 전경. 지진 후 순간마다 하나님께 이 위기를 극복할 방법을 알려 달라고 눈물로 간구했다. 집, 학교뿐 아니라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나의 기도는 온통 한동대 재건에 맞춰져 있었다. 하루는 아내와 함께 무너진 학교를 위해 뜨겁게 기도했다. 기도 중에 2015년 베트남 출장 때 만난 ‘NIBC’(Not I But Christ) 동문이 떠올랐다. NIBC는 한동대 공간환경시스템공학부(건축, 토목, 도시환경 전공) 출신 졸업생들로 구성된 기업이다. 베...
입력:2021-12-13 03:05:03
[역경의 열매] 장순흥 (26) 포항의 미래 걸린 지진 원인 규명… 촉발 지진으로 확인
장순흥(오른쪽 두 번째) 한동대 총장이 2018년 4월 경북 포항 한동대에서 열린 ‘지진·지열발전 관련 공동연구단 출범식’에서 포항 지진의 원인을 설명하고 있다. 지진으로 학생들은 각자 집이나 안전한 곳으로 대피했다. 교내에서 대면 수업을 진행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차피 모든 건물을 보수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차선책으로 온라인 수업을 시작했다. 이때 시작한 온라인 수업이 훗날 코로나19에 큰 도움을 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팬데믹 상황 속 많은 대학이 개강을 늦추고 겨우 온라인 수업 시스템을 구축해 학기를 늦게 시작했다. ...
입력:2021-12-10 03: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