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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이건숙 (10) 신앙 두텁고 다재다능 어머니… 자녀 교육에 전심전력
소설가 이건숙(왼쪽) 사모가 1963년 서울대 사범대 졸업식에서 어머니와 함께 서 있다.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머리가 좋고 총명한 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붓글씨도 명필이라 전시회에 가끔 출품도 했다. 지금도 우리 형제들 집에는 병풍 액자 족자 심지어 도자기에 쓴 글들이 유물로 남아있다. 뜨개질도 잘해서 내 옷을 시집간 뒤에도 조끼랑 덧옷까지 손수 떠서 입혔다. 눈이 아주 안 보일 때까지 내가 출판한 책이나 사위가 낸 책 모두를 한 권도 빠짐없이 읽고 평을 하셨던 분이다. 어머니는 한문을 혼자 공부해 터득했고 일찍부터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교회에 ...
입력:2022-02-22 03:05:02
[역경의 열매] 이건숙 (9) 유치원 일찍 들어갔다가 아버지의 애물단지 되다
소설가 이건숙(앞줄 오른쪽 두 번째) 사모의 1944년 가족 사진. 뒷줄이 아버지와 어머니다. 아버지는 밀수업자들을 맡은 검사라 무엇이 그리 위험한지 베개 밑에 권총을 감추고 주무셨다. 안방에서 아버지 어머니 옆에 막내 남동생이 눕고 나란히 나와 오빠가 누워서 잤다. 부엌일 하는 처녀는 다른 방에서 자고 진돗개와 더불어 송아지만큼 큰 개가 집을 지켰다. 초등학교 1학년 때인데 적산가옥인 안방 창가에 자색 목련꽃이 핀 봄날이었다. 머리맡 요강에서 오줌을 누던 나는 목련꽃 옆에 서서 방안을 엿보는 검은 모자를 쓰고 검은 천으로 입을 가린 남자를 보았...
입력:2022-03-17 09:55:44
[역경의 열매] 이건숙 (8) “누가 너더러 교회 나가라고 했어” 호통치며 볼기짝
소설가 이건숙 사모가 1941년 첫 돌에 촬영한 기념 사진. 오른쪽은 판사가 된 오빠. 내 유년의 숲에 보이는 아버지의 서재는 바닥부터 천장까지 사면이 책으로 꽉 차 있었다. 책 좋아하고 낙천적인 아버지였다. 법조인 중에서도 검사였다. 그가 산 시대는 가장 격렬한 전쟁을 통과하는 불운의 시대였다. 아버지는 굉장히 가정적이어서 휴일이면 가족들을 데리고 산속의 호수나 냇가로 가서 낚시를 했다. 지독한 낚시꾼으로 신혼 첫날밤 신혼부부가 사라져서 할머니는 일꾼들과 함께 횃불을 들고 찾아다녔더니 깊은 산속 호숫가에서 신랑이 신부를 곁에 앉혀놓고 낚...
입력:2022-02-18 03:05:03
[역경의 열매] 이건숙 (7) 새벽엔 작품 구상, 모두 잠든 후엔 번개 같은 집필
소설가 이건숙(뒷줄 왼쪽) 사모가 2006년 남편 신성종 목사 및 충현교회 장로였던 김영삼 대통령 내외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문제 있는 교회만 맡아서 목회하는 남편 신성종 목사는 언제나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하나님이 쓰시는 스페어타이어야. 문제 있는 교회를 맡아서 해결하면 떠나서 또 다른 문제 있는 교회로 옮겨야 해.” 어떤 때는 견딜 수 없이 너무 힘들어서 나도 따지고 든다. “그러면 어쩌자고 식구들 다 고생시키면서 40세까지 미국에서 그렇게 힘든 공부를 했어요.” “그래서 목회하면서 그렇게 받은 박사학...
입력:2022-02-17 03:05:03
[역경의 열매] 이건숙 (6) ‘문맥’ 동인 결성… 고된 훈련이지만 악착같이 배워
소설가 이건숙(가운데) 사모가 지난해 12월 서울 종로구 수운회관에서 열린 2021 PEN문학상 시상식에서 소설부문 상을 받고 있다. 하나님께서 풀어가는 세 번째 단계는 ‘문맥’ 동인 결성이었다. 40대에 소설을 쓰기 시작한 늦깎이들의 모임이었다. 정건영 김용철 신상성 류순하 등 전부 남자였고 나 혼자만 여자였다. 모두 국문학을 전공한 선생님들로 지금은 소설가로 잘 알려진 분들이다. 매달 단편을 써서 각자의 작품을 놓고 토론하고 각 가정을 돌면서 모이기도 했다. 얼마나 작품 비평이 거셌는지 어떤 때는 화가 치밀어 힘들었으나 나로서는 배우...
입력:2022-02-16 03:10:02
[역경의 열매] 이건숙 (5) 소설가로 세우신 주님 뜻 깨달으며 문학세계에 첫발
소설가 이건숙(왼쪽 네 번째) 사모가 1986년 소설가 박완서(맨 오른쪽) 윤남경(오른쪽 세 번째) 작가 등과 함께 여성 문인 성경반 모임을 하고 있다. 신춘문예로 등단은 했지만, 그때까지 문학을 연구하고 공부한 적이 없었다. 좋아서 읽은 문학 작품들 말고는 전문적 훈련을 받지 않았다. 대학 시절 독문학을 했다지만 원문으로 독일 소설을 읽느라고 사전을 끼고 살았던 기억뿐이다. 그런 나를 하나님은 우선 소설가로 세워놓고 앞을 막고 있는 난관을 돌파하도록 몰아가셨다. 고된 훈련 기간이었다. 네 단계의 문을 통과하면서 하나님이 나를 소설가로 세우기 위...
입력:2022-02-15 03:10:02
[역경의 열매] 이건숙 (4) 상금이나 받고 끝날 줄 알았던 공모… ‘소설가’ 이름 달다
소설가 이건숙(왼쪽) 사모가 1986년 직행버스 앞에서 박완서 작가와 서 있다. 박 작가는 사역에 매인 이 사모가 딱하다며 종종 여행길로 이끌었다. 신문사의 면담 요청을 받고 나는 팔십만원을 받을 욕심에 들떠있었다. 혼자 가기 쑥스러워 옆에 살고 있는 선배 언니와 함께 한국일보사에 갔다. 언니랑 돈을 받아 바로 국제가구로 갈 참이었다. 그런데 으리으리하게 큰 사무실에 들어서면서 나는 잔뜩 주눅이 들었다. 문화부장 앞에 앉으니 기자들이 사진을 찍고 야단이다. 겁이 난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서 그의 주머니에서 돈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문화부...
입력:2022-02-14 03:05:03
[역경의 열매] 이건숙 (3) 신춘문예 당선 전화에 “신난다, 호두나무 장롱 산다”
소설가 이건숙(오른쪽) 사모가 198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상식에서 가족들과 함께 서 있다. 맨 왼쪽이 남편 신성종 목사. 목사의 아내가 어떻게 소설가가 되었는가.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할 당시 내 생활은 정말 가난의 구렁텅이였다. 시부모 생활비, 시동생 둘의 대학등록금, 그리고 우리의 생활비까지. 남편이 벌어오는 돈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몽땅 그달 월급을 봉투째 바쳐도 모자라 동네를 돌면서 돈을 꾸러 다녀야 했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아이들은 겨울 간식인 사과를 먹고 싶다고 야단이지만 그걸 살 돈이 없었다. 어쩌다가 딱 한 알, 사과를 사 ...
입력:2022-02-11 03:05:02
[역경의 열매] 이건숙 (2) “목사 사모가 소설 작가라니…” 불평과 충고 이어져
소설가 이건숙(앞줄 왼쪽 세 번째) 사모가 1989년 옛 소련 모스크바에서 열린 국제펜클럽대회에 참석한 문인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목사의 아내가 소설을 쓴다니 지청구도 많이 들었다. 사모란 남편의 뒤에 있는 듯 없는 듯 숨어 살아야만 한다는 보수 교단 풍토에서 소설을 쓴다니 부닥치는 저항은 아주 거셌다. 특히 작가들 사이에서도 친해지면 은근히 다가와 아픈 충고를 했다. “이건숙씨, 이번 글도 또 하나님이 어떻게 했다는 결론을 지었지. 그러니 작품성이 없잖아. 문학은 종교성을 띠면 끝장이라고.” 어느 땐 하나님을 믿지 않는 평론가가 신랄...
입력:2022-02-10 03:05:03
[역경의 열매] 이건숙 (1) 등단 40년 만에 PEN문학상 ‘모두 하나님의 계획’
소설가 이건숙 사모가 지난달 26일 서울 서대문구 자택 서재에서 40년 넘게 기독교 문학에 집중한 여정을 말하고 있다. 신석현 인턴기자 문단에 소설가란 이름을 달고 등단한 지 꼭 40년 만에 2021 PEN문학상을 받았다. 수상작인 단편집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멍’을 심사한 김지연 김유조 소설가는 심사평에서 “남편과 외동딸을 구멍 속에 넣어 묻어버린 뒤에 엄습한 구멍 공포증에서 마침내 벗어나 진짜 아름다운 구멍인 영생의 장소, 천국을 갈망하는 인간의 갈구가 그려져 있는 깊은 사유와 성찰의 내면 심리가 꼼꼼히 기록돼 있다”고 ...
입력:2022-02-09 03:05:04
[역경의 열매] 김의식 (20·끝) 나에게 맡겨진 치유의 사명, 충성 다할 수 있기를…
김의식(오른쪽) 목사가 2020년 서울 강서구 치유하는교회에서 국민일보목회자포럼 대표회장에 취임한 후 직전 대표회장 이철 목사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나는 만 20세의 나이에 죽음의 위기에서 하나님의 종으로 소명을 받은 후 어떠한 인간적인 목표도, 계획도 없이 살아왔다. 그저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하시면 ‘덤으로 사는 인생, 언제든 나의 목숨까지도 바치겠다’는 믿음을 가지고 십자가의 주님과 맡겨 주신 영혼들만 바라보면서 모든 열정을 쏟으며 달려왔다. 내가 혼신의 열정을 쏟은 곳은 가장 먼저는 치유하는교회의 치유 목회이고, 둘째는 치유...
입력:2022-02-08 03:05:03
[역경의 열매] 김의식 (19) 부회록 서기로 총회 임원 첫발… 한국교회 위해 헌신
김의식(오른쪽 두 번째) 목사가 2015년 충북 청주 상당교회에서 열린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제100회 총회에서 부회록서기에 오른 후 임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주님은 나의 목회 여정에 늘 동행해주셨지만 총회에서 임원으로 섬길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큰 은혜였다. 2015년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통합 총회 제100회 총회장이신 채영남 목사님께서 부족한 종을 부회록서기로 불러주셔서 처음으로 총회 임원으로 섬기게 됐다. 채 목사님은 전에 듣고 알았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성이 깊으셨고 총회 주제인 ‘주여, 화해하게 하소서!’에...
입력:2022-02-07 03:05:04
[역경의 열매] 김의식 (18) 한국교회에 치유 목회 접목… 해외에서도 크게 부흥
김의식(앞줄 왼쪽 열 번째) 목사가 2019년 서울 강서구 치유하는교회에서 파송 선교사들을 초청해 선교대회를 열고 있다. 나는 치유 목회가 한국교회에 접목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교회마다 크고 작은 불화와 분쟁으로 많은 고통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2013년부터 전국 목사·사모 초청 치유 목회 세미나를 시작했다. 또 2년 간격으로 호남 영남 충청 강원 지역에서 농촌 전도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더 나아가 지금까지 ‘만(1만명 성도 출석), 천(1000명 사역자 양육), 백(100명 선교사 파송), 십(10개 교회 개척)의 비전’을 따라 교회 개척과 농어...
입력:2022-02-04 03:05:04
[역경의 열매] 김의식 (17) 새 성전 ‘치유하는교회’ 입당… 나잇대별 맞춤 목회 펼쳐
2012년 완공된 서울 강서구 치유하는교회 예배당 전경. 김의식 목사는 전 세대에 치유 목회를 접목해 교회 부흥을 일궜다. 10년의 영적 전쟁 속에서도 교회는 기적적으로 부흥해 성도 수가 갑절에 이르렀다. 당시 700석의 예배당과 300석의 소예배실로는 주일 5부 예배까지 드려도 성도들의 수용이 어려웠다. 뿐만 아니라 예배당 건축 후 30년이 지나서 교회당 건물이 낙후돼 비가 오면 누수 현상이 있었고 지하 교육관에는 곰팡이까지 생겼다. 그래서 당회에서 만장일치로 새 예배당 건축을 결의하고 교회 옆의 주택까지 매입했다. 2010년부터 2년 6개월에 걸쳐 현재...
입력:2022-02-03 03:05:04
[역경의 열매] 김의식 (16) 심방 다녀오면 집 앞에 쌀과 고기… 성도들 사랑에 눈물
김의식(오른쪽) 목사가 2015년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영등포노회에서 김학만 원로목사를 노회 공로목사로 추대하고 있다. 화곡동교회 전임 목사님이신 김학만 목사님은 은퇴 후 김포로 가셔서 말씀교회를 개척하셨는데 말씀교회는 독립 교단에 속해 있었다. 그런데 평생을 우리 화곡동교회와 영등포노회, 총회를 위해 헌신한 목사님이 은퇴하신 후 독립 교회를 세웠다는 것이 목사 면직 사유가 됐다. 김 목사님이 그렇게 수모를 겪으시는데도 나는 도와드릴 수 있는 아무런 힘이 없었다. 그래서 묵묵히 인내하며 회복의 시간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부족한 종이 2008...
입력:2022-01-28 03:10:02
[역경의 열매] 김의식 (15) “의술로는 치료할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능히…”
김의식(앞줄 왼쪽 여섯 번째) 목사가 인천 강화군 계명수련원에서 치유동산 프로그램 참가자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치유동산은 성도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고 행복한 관계를 회복시키는 교회 프로그램이다. 심근경색의 위기에서 주님의 은혜로 살아난 후, 계속되는 영적 전쟁에서 받는 온갖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주님께서 부족한 종에게 지혜를 주셨다. 새벽기도를 할 때마다 가장 먼저는 통회와 자복부터 하게 하셨다. 그래서 문제의 원인을 가장 먼저 주의 종인 나 자신에게서 찾게 하셨다. 그다음으로는 교회의 갖가지 문제를 안고 해결을 위한 기도제목...
입력:2022-01-27 03:05:02
[역경의 열매] 김의식 (14) 심근경색으로 죽음 직전까지… 치유의 은혜 체험
화곡동교회는 10여년에 걸친 분쟁을 그치고 부흥을 거듭한 끝에 2012년 새 예배당을 짓고 입당했다. 이름도 현재의 치유하는교회로 바꿨다. 글로리아채플에서 성도들이 예배하는 모습. 화곡동교회의 분쟁은 갈수록 더욱 심해지며 끝이 보이질 않았다. 교회뿐만 아니라 노회 수습전권위원회와 관계도 점점 악화했다. 수습전권위원회 부위원장 목사님이 수습을 전제로 각서를 쓰라고 해서 쓰면, 위원장 목사님이 반대하셨는지 그 후에는 각서 내용을 지키기가 어렵다고 하셨다. 억울하고 원통한 일은 끝이 없었다. 그중에 가장 눈물 나는 일은 수습전권위원회가 불러서 ...
입력:2022-01-26 03:05:02
[역경의 열매] 김의식 (13) 욕설과 몸 싸움장 된 교회… 주일에 설교 가기도 두려워
김의식(앞줄 왼쪽 다섯 번째) 목사가 2000년 서울 화곡동교회 목사 위임예배에서 당회원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2000년 6월 11일 서울 화곡동교회에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부임하기 전부터 한 안수집사님이 화곡동교회에 오면 다치니까 오지 말라는 경고의 메시지를 10여 차례씩 보내왔다. 그런데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의식(義植)이라는 이름 그대로 누가 불의하게 압력을 가하면 더욱 드세게 일어서는 의식(意識)이 있었다. 그래서 ‘얼마나 시끄럽기에 이렇게 오지 말라고 압력을 가할까’ 궁금한 마음으로 부임했다. 교회에 막상 와서 보니 장난이 아...
입력:2022-01-25 03:05:03
[역경의 열매] 김의식 (12) 담임목사 청빙에 고민하자 “아빠, 목사는 고생을 해야…”
김의식(왼쪽) 목사가 딸 안나(가운데)의 초등학교 졸업식에서 가족들과 함께한 모습. 1998년 1월 호남신학대에 부임했다. 내려갈 때는 유배지로 떠나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고향이 좋았다. 강의 전에는 항상 찬양과 통성기도를 했다. 미국 신학대학원에 ‘Seminary is a cemetery’(신학교는 무덤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나라도 신학대학원에 입학할 때는 뜨겁던 신학생들의 신앙이 졸업할 때가 되면 재로 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학생들의 영성에 불을 지피기 위해 강의 10분 전부터 찬양과 통성기도를 하면서 성령님의 불을 붙이는 ...
입력:2022-01-24 03:10:02
[역경의 열매] 김의식 (11) “배경 없고 돈 없는 사람은 신학대 교수도 못되나”
김의식(앞줄 왼쪽 여덟 번째) 목사가 지난해 서울 강서구 치유하는교회에서 열린 치유상담대학원대학교 총장 취임예배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1997년 5월 시카고한인연합장로교회 교인들의 성대한 환송을 받으며 귀국했다. 그런데 뜻밖의 시험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교수 임용 1순위로 이사회에 올라갔는데 유력 이사의 조카였던 2순위 후보와 순위가 뒤바뀌고 말았다는 것이다. 나는 ‘배경 없고 돈 없는 사람은 신학대 교수도 못 되는가?’ 하고 또 한 번의 상처를 받고 말았다. 그런데 세상이 얼마나 좁은지, 그 교수의 손위 동서가 내가 한양대를 다...
입력:2022-01-21 03:05:04
[역경의 열매] 김의식 (10) 암 치유 기적… 힘들게 하던 교인들에 경종 울려
김의식(오른쪽) 목사가 1996년 미국 시카고신학대학원 학위수여식에서 문채성 사모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시카고한인연합교회 목회 시절 기억에 남는 성도는 김진해 안수집사님과 김계자 집사님(현 권사님) 부부다. 남편 집사님은 내가 처음 부임했을 때부터 교회에 대한 불평과 불만을 터뜨리다가 6개월을 교회에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인 집사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유방암이 재발해 6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는 것이다. 남편 집사님이 방황하던 6개월이 뇌리를 스쳤다. 부인 집사님을 위해 매일같이 기도하던 중 고난주일을 맞이했다. 집사님...
입력:2022-01-20 03:05:04
[역경의 열매] 김의식 (9) 첫 목회지 성령께 묻자 “가라”… 눈물의 이민 목회 시작
김의식(원 안) 목사가 1992년 미국 시카고한인연합장로교회 위임예배에서 성도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김 목사에게 이민 목회는 눈물의 시간이었지만 잊지 못할 첫 사랑을 경험한 시간이기도 했다. 1989년 미국 프린스턴신학대학원에 장학생으로 입학한 후 1년 동안 열심히 일하며 공부한 결과 보스턴대학교(Th.D.), 에모리대학교(S.T.D.), 드류대학교(Ph.D.), 클레어몬트신학대학원(Ph.D.), 시카고신학대학원(Ph.D.)의 입학 허가를 받았다. 다른 대학들은 다 목회상담이 전공이지만 시카고신학대학원은 가족치료 전공이었다. 당시 시카고신학대학원은 종합대...
입력:2022-01-19 03:05:03
[역경의 열매] 김의식 (8) “쉴 틈 없이 충성 다했는데 왜 딸을 데려가시나요”
김의식(왼쪽) 목사가 1986년 서울 노량진교회 전도사 시절 문채성 사모, 큰 딸 한나와 함께 휴가를 떠난 모습. 노량진교회에서의 목회가 전부 다 행복했던 것은 아니었다. 내 일생에 가장 후회되고 가슴 아픈 일이 터지고 말았다. 아내는 내가 심방 전도사이던 시절 나의 유학을 위해 북아현동에서 약국을 경영하고 있었다. 우리 집은 같은 동네 3층 옥탑방이었다. 당시 내가 맡은 5교구에는 경기도 외곽에 사는 교인들이 많았다. 새벽 일찍 교회에 가서 승합차를 몰고 심방을 다니다가 저녁 늦게 교회에 도착해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 오후 10시 안팎이었다. 19...
입력:2022-01-18 03:10:01
[역경의 열매] 김의식 (7) 림인식 목사의 신앙과 삶 보며 치유 목회의 틀 다져
김의식(왼쪽) 목사가 2008년 림인식 노량진교회 원로목사와 함께한 모습. 김 목사는 1984년 노량진교회에서 전도사 사역을 할 때부터 림 목사를 영적인 아버지로 섬겼다. 1983년 10월 군대 전역 후 봉사할 교회를 찾아 기도를 시작했다. 누나의 시아버지인 김두현 광주 서석교회 장로님이 당시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통합 회계였고 총회장은 림인식 목사님이었다. 그래서 아버지를 통해 김 장로님께 림 목사님이 담임으로 계시는 노량진교회에서 봉사할 수 있는지 알아봐 달라고 부탁드렸다. 당시 림 목사님은 한경직 영락교회 목사님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으셨는...
입력:2022-01-17 03:05:03
[역경의 열매] 김의식 (6) 괴롭히던 선임이 싸놓은 더블백엔 ‘폐의류만 가득’
김의식 목사가 1983년 수도경비사령부에서 군종 사병 생활을 하던 모습. 김 목사는 군 생활이 영성은 물론 체력과 정신력을 연단하는 시간이었다고 고백했다. 1981년 7월 삼복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 논산훈련소에 입소했다. 그 후 수도경비사령부 30경비단(청와대 경호부대)으로 배치를 받았다. 내가 30경비단에 가게 된 데는 잊을 수 없는 사연이 있다. 야간 신학교를 졸업한 후 혜성교회 전도사로 있으면서 금요철야 기도회를 인도할 때였다. 칠순이 넘고 몸도 불편하신 김순례 권사님이 나를 위해 기도하실 때마다 “우리 전도사님, 서울 시내 한복판에 배치돼 ...
입력:2022-01-14 03:0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