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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바로 해도 거꾸로 해도 ‘도솔도’… “우영우와 닮았죠”

노영심 감독이 지난 9일 국민일보와 인터뷰에 앞서 서울의 한 스튜디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조세현 작가·메가히트픽쳐스 제공


“너를 보며 나를 생각했어. 머뭇거리는 그 눈빛으로. 왠지 모를 너만의 것이 있겠다고. 조용히 맴도는 네가, 말없이 말하는 네가 너다웁게 빛나는 걸.”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오리지널사운드트랙(OST) 수록곡 ‘용기’의 가사 일부다. 드라마 주인공인 영우를 표현하는 동시에 영우를 바라보는 이들의 시선을 그렸다. 출발점은 각자가 가진 자기만의 것, 자기다움을 타인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사회적 약자를 바라보면서 자신을 반추하고, 수평적 관계를 만들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고, 내 안의 균형을 찾는 일.

드라마 음악감독을 맡은 피아니스트 겸 작사·작곡가 노영심(55)의 고민들은 그렇게 시청자들에게 스며들었다. 서울 등 수도권에 기록적 폭우가 쏟아진 지난 9일 부암동의 한 카페에서 노 감독을 만났다. 드라마 작업을 통해 그는 요즘 오랜만에 대중과 교감하고 있다.

노 감독은 “드라마 제작사에서 어렵게 나를 찾아냈을 땐 나여야만 하는 확고함이 있었던 것 같다. 그 기대에 부응해야겠다고 생각했다”며 “자폐인 이야기인 걸 알고 나서 그들과 정서적으로 가까이 있어서 일이 내게 주어진 것으로 여겼다”고 말했다.

노 감독은 수년 전부터 발달장애인 음악교육 지원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매년 강원도 평창에서 열리는 발달장애 문화축제 ‘국제 스페셜 뮤직&아트 페스티벌’에서 발달장애인들과 소통하며 무대를 만든다. 이 경험은 영우의 세계를 음악 안에 펼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OST 수록곡들에 쓰인 ‘고래의 날개’ ‘내 방 익숙한 무늬 같아요’ ‘물결처럼 자유롭게’ 같은 표현은 영우 캐릭터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봐온 자폐인들의 사고와 언어구조를 연구한 결과다. 영우가 헤드폰으로 듣는 음악, 세상으로 나가기 전에 안정감을 얻는 음악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 생각했다.

그는 “우리가 알아채기 어렵고 엉뚱해 보이지만 그들에겐 모든 행동에 너무나 많은 이유가 있다. 그들만의 고독한 상상 속에 세상이 펼쳐져 있다”며 “가사 쓰는 일은 늘 그렇지만 이번엔 특히 생각이 많았다. 그 세상을 잘 보여주는 단어들을 조합해보려 했는데, 하나씩 단어를 발견할 때마다 굉장히 기뻤다”고 돌이켰다.

드라마 속 영우의 테마곡인 오프닝 음악에선 ‘도도도도 솔 도도도도 솔’하는 음이 반복된다. ‘똑바로 해도 거꾸로 해도 우영우’라는 콘셉트 안에서 연구해낸 것이다. 스타카토 리듬은 통통 튀는 듯한 영우의 걸음걸이에서 착안했다.

노 감독은 “거꾸로 해도 똑바로 해도 같은 음을 사용했다. 어떻게 해도 ‘도솔도’”라며 “영우의 엉뚱 발랄함을 보여주는 음악을 고민하던 어느 날 밤 자다가 ‘혹시 이걸까’ 번뜩했다. 음악하는 친구들한테 ‘그거 알았냐’고 물으면 소름 끼친다고 한다”며 웃었다.

실제로 영우가 돌고래를 찾으러 간 서귀포 대정읍 모슬포 앞바다는 곡 작업을 할 때마다 찾는 곳이다. 노 감독은 “대본을 받고 깜짝 놀랐다. 늘 그 동네에 머물며 음악을 만든다. 아침에 일어나면 멍 때리며 습관적으로 고래가 어디 있나 찾게 된다”며 “이번에 작업한 곡들도 고래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썼다”고 했다. OST 수록곡에 들어간 피아노 연주는 모두 노영심이 직접 했다.

선우정아, 원슈타인, 수지 등 후배들과 작업도 오랜만이다. 성시경의 ‘당신은 참’ 이후엔 거의 드라마나 영화 작업, 연주곡 작업만 했다. 노 감독은 “사실 오랫동안 휴면계좌처럼 있었다. 이제는 후배들에게 음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앞으로 영유해야 할 건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않는 자유로운 삶”이라며 “아무 데서나 이렇게 차를 마실 수 있는 ‘텐션 없는 삶’을 살면서 한편으로는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고 조심스레 말했다.

이번 OST 작업을 하면서 동료들의 반가운 연락을 많이 받았다. 정재일, 선우정아, 이적 등 절친한 선후배들이 있지만 각자의 스케줄 때문에 자주 만나기 어렵다.

그는 “(이)적이한테서 얼마 전 ‘음악 좋다’는 문자가 와서 기뻤다”며 “(이)문세 오빠는 ‘네가 한다던 게 이거였냐, 드라마에 완전히 빠졌다’고 연락해 왔다. 처음엔 내가 작업한 줄 모르고 ‘(선우)정아 노래 너무 좋다’고 했다”는 에피소드도 전했다.

“만남을 통해 안부를 확인하는 경우도 있지만 SNS나 문자를 통해 어떻게 사는지 알게 된다. 자연스럽게 모이는 건 우주의 기운이 동할 때”라며 “10년을 못 만나다가 다시 마주쳤을 때 ‘그래 잘살고 있구나’하며 미소로 안부를 주고받을 수 있는 느낌이 좋다”고 그는 말했다.

많은 음악을 만들었지만 ‘최애’를 꼽긴 어렵다. 1989년 가수 변진섭과 함께 부른 ‘희망사항’은 모든 것의 시작점이라는 의미가, 드라마 ‘연애시대’ OST는 첫 드라마 음악이라는 의미가 있다.

그는 “정말 좋은 음악이 나왔을 땐 ‘그분이 오셨군’ ‘내가 한 게 아니다’ 느껴질 때가 있다. 최근 작업한 기준으로 생각하면 우영우 테마가 ‘원픽’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며 “작업의 과정과 형태를 봤을 땐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때 만든 ‘코이노니아’가 기억에 남는다”고 떠올렸다.

노영심에게 창작의 영감은 비우는 데서 온다. 그는 “음악의 주제를 정할 때는 여러 가지 자료를 많이 찾아보고 듣는데 창작의 시간으로 들어갈 땐 모두 비워버린다. 멜로디가 있는 음악을 잘 듣지 않는다”며 “고스란히 음악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내가 내 몸을 비워야 한다”고 했다.

영감은 숲에서도 온다. 정확히 말하면 ‘숲에서 걷기’다. 노 감독은 “영우가 헤드폰을 쓰고 자기 세상에 들어가는 것처럼 저는 숲에 들어간다. 아무도 없는 공간과 시간을 찾아간다”며 “그래서 자다가 새벽에 일어나 숲에 들어갔다가 집에 와서 다시 자곤 한다”고 조용히 말했다.

한국 음악이 전 세계의 사랑을 받는 시대가 됐지만 선배로서 걱정스러운 부분도 있다. 그는 “음악을 만드는 방식 자체가 많이 달라졌다. 피아노로 시작해 영감을 받고 뭔가 떠올리기 위해 고뇌하는 저 같은 방식보다는 가상악기를 통한 디지털 방식으로 만드는 게 보편화됐다”면서 “음악이 하나의 거래로 구조화됐다는 느낌이 있다. 음악이 단지 밥벌이를 위한 일이 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음악은 꿈꾸고 고뇌하는 과정에서 행복을 누려야 하는 영역인 만큼 안전하고 건강하게 창작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가사를 쓰고 노래를 만드는 일은 뜸했지만 노영심은 계속 바빴다. 발달장애인 음악교육 지원 외에도 소방대원들의 처우 개선을 위한 음악회 등 다른 쪽으로 시선을 두고 살았다. 최근엔 발달장애인을 위한 악보를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드라마 음악으로 만든 것처럼 똑바로 해도 거꾸로 해도 같은 계이름으로 만든 류의 음악이 발달장애인 음악교육에 재밌게 활용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노 감독은 “발달장애인처럼 일반적인 악보를 보기 힘든 사람들을 위해 글과 그림이 함께 있는 악보가 있으면 좋겠다”며 “특히 팝 음악은 전문 센터나 연구소 등과 협업해 5곡 정도 악보를 만들어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또 어떤 계획이 있을까. 그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음악으로 공연을 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영우에겐 동화적인 느낌이 있어서 크리스마스 시즌에 선물처럼 사람들에게 전하면 좋을 것 같다”며 “드라마가 준 평화와 행복감이 대중 속에 계속 살아있으면 한다”는 바람을 이야기했다.

피아니스트인 만큼 연주곡 작업도 계속한다. 그는 “발표하진 않았지만 작업한 앨범이 3개쯤 있다. 이번 겨울쯤에는 녹음 작업을 해볼까 한다”며 “여러 가지를 해보고 나니 나는 그냥 사람들에게 피아니스트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노래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지만, 뭔가 쌓이면 작사 작곡은 또 하게 되지 않을까 한다”고 말했다.

“그때가 되면 다시 고독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아요. 우리 동네는 천지가 숲이거든요.” 여전히 꾸밈없는 소녀의 웃음을 지으며 노영심은 말했다.

임세정 기자 fish813@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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