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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진도엔 집마다 장구… 법대 다니다 국악에 빠졌죠”

국립창극단의 신작 ‘리어’를 작창한 한승석 중앙대 교수. 작창은 판소리 다섯 바탕을 기본으로 민요 정가 등의 소리를 스토리와 캐릭터에 따라 전통 장단과 음계에 맞춰 새롭게 짜는 것으로 한 교수는 손꼽히는 작창가다. 올해 국립창극단이 작창가를 발굴·육성하기 위해 시작한 ‘작창가 프로젝트’에 멘토로 참여한다. 국립극장 제공


한승석 교수가 국립창극단에서 고선웅과 호흡을 맞춘 ‘변강쇠 점 찍고 옹녀’ ‘귀토’(왼쪽 사진)는 큰 인기를 끌었다. 이번에 배삼식과 호흡을 맞춘 ‘리어’(오른쪽)가 오는 17~27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공연된다. 셰익스피어 ‘리어왕’을 토대로 한 이 작품은 김준수 유태평양 등 젊은 배우를 내세웠다. 국립극장 제공


2010년대 들어 국립창극단은 다채로운 창극으로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덕분에 노인들이나 보는 고리타분한 장르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창극이 공연계의 핫한 장르로 자리매김했다.

새로운 창극을 위해 창작진을 구성할 때마다 국립창극단의 고민은 늘 작창가의 부족으로 귀결된다. 작창은 판소리 다섯 바탕을 기본으로 민요 정가 등의 소리를 스토리와 캐릭터에 따라 전통 장단과 음계에 맞춰 새롭게 짜는 것이다. 하지만 좋은 작창을 할 수 있는 작창가는 손에 꼽을 정도다. 판소리 민요 무속음악 타악까지 두루 섭렵한 전방위 국악인 한승석(54) 중앙대 전통예술학부 교수는 늘 섭외 0순위 작창가다. 한 교수는 국립창극단에서 극작가 겸 연출가 고선웅과 콤비를 이뤄 ‘변강쇠 점 찍고 옹녀’(2014년 초연) ‘귀토’(2021년 초연)를 흥행시켰다. 오는 17~27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선보이는 국립창극단 신작 ‘리어’에서 작창을 맡은 한 교수를 만났다.

한승석이 ‘작창의 신’으로 불리는 이유

“작창을 잘 모르는 사람은 ‘노가바’, 즉 노래 가사 바꿔 부르기처럼 기존 다섯바탕에서 가사만 바꾸면 된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만들면 작품의 분위기나 캐릭터에 맞지 않기 때문에 어색해서 들을 수가 없습니다.”

작창가는 판소리 다섯바탕을 비롯해 다양한 소리를 알아야 대본과 캐릭터에 맞는 음과 박을 제대로 만들 수 있다. 아무리 소문난 명창이라도 작창까지 잘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에 작창에 대한 한 교수의 자부심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실제로 국악계에서 그는 ‘작창의 신’, 제자들 사이에선 줄임말인 ‘작신’으로 불린다. 별명만 보면 예인 집안 출신 같지만 그는 서울대 법대 입학 후 뒤늦게 국악을 시작했다. 다만 ‘민속문화의 보고’ 진도에서 자라 어릴 때 국악을 접한 것이 지금의 그를 있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제가 어릴 땐 진도의 집집마다 장구가 있어서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었어요. 대나무 깎아서 장구채도 많이 만들었죠. 우리 집 마당에서 김대례 선생님의 씻김굿이나 조공례 선생님의 입춤을 보고 자랐습니다.”

김대례(1935∼2011) 조공례(1925∼97) 선생은 모두 중요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다. 흔히 인간문화재로 불리는 이들과 같은 지역에 살며 그는 초등학교까지 다녔다. 신동으로 소문났던 그는 광주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닌 뒤 서울대 법대 87학번으로 입학했다. 입학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선배 소개로 전통춤 동아리 ‘한사위’에 들어간 게 그를 국악의 길로 이끌었다.

“동아리 안에 장구가 있어서 쳐봤는데, 몇 년 만에 채를 잡았지만 꽤 쳤던 것 같아요. 따로 배운 적 없어도 다양한 주법을 구사할 수 있었고, 그게 계기가 돼서 국악에 계속 빠져들었습니다. 제대 후 김덕수사물놀이패를 찾아가 김덕수 이광수 선생님에게 사물놀이와 비나리 등을 배웠습니다.”

법조인의 길 대신 프로 국악인으로

그는 1994년 사물놀이패 ‘이광수와 노름마치’ 창단멤버로 프로 국악인의 삶을 시작했다. 판검사 아들을 기대했던 부모의 실망은 컸지만 국악에 대한 그의 열정은 누구도 말릴 수 없었다. 명창 임방울의 ‘수궁가’ 음반을 듣고 판소리에 매료된 그는 2년간 수천 번 반복해 들으며 판소리를 독학했다. 95년 1월 그의 판소리를 들은 안숙선 명창의 제안으로 안 명창을 사사한 데 이어 명창 성우향에게도 배웠다. 중앙대 대학원에서 한국음악을 전공한 그는 2007년 ‘적벽가’를 시작으로 2012년 ‘춘향가’까지 1년에 한 바탕꼴로 판소리 다섯 바탕을 모두 완창했다. 그가 작창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98년 국립창극단에 들어가면서부터다.

“남자 소리꾼이 많지 않기 때문에 제가 운 좋게 국립창극단에 입단해 5년간 활동할 수 있었죠. 당시 신인이라 작은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작품을 관찰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그때 작창이나 국악기 활용에 대해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본격적으로 국악 창작의 매력에 눈을 뜬 것은 2001년 국악계 스타 원일이 이끌던 창작타악그룹 푸리 3기 멤버로 참여하면서부터다. 푸리에서 다양한 실험을 하면서 전통적인 국악을 현대적 의미로 재해석해 새로운 전통을 창조하겠다는 그의 바람은 점점 커졌다. 무엇보다 이곳에서 그는 14살 아래인 ‘지음’(知音) 정재일을 만났다. 최근 영화 ‘기생충’과 드라마 ‘오징어게임’으로 전 세계에 이름을 알린 정재일은 국악 록 재즈 클래식 등 장르를 아우르는 뮤지션이다. 두 사람은 2014년 ‘바리 abandoned’, 2017년 ‘끝내 바다에’ 등 크로스오버 음반을 냈다. 정재일은 국립창극단의 ‘리어’에도 참여했다. 그가 정서적인 색채를 담당하는 국악기와 작창을 맡고 이를 받쳐주는 반주 음악은 정재일이 디자인했다.

“나이와 상관없이 재일이는 정말 천재적인 음악가에요. 푸리에서 처음 만난 후 첫 음반이 나오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는데요. 저는 다섯바탕 판소리를 다 배우고 완창해야 했고, 재일이도 다양한 작업을 하면서 군대에 다녀오느라 늦어졌죠. 최소 3집 음반까지는 내고 싶어요.”

스타 극작가 고선웅·배삼식과 창극 작업
국립창극단에서 고선웅과 호흡을 맞춰 ‘변강쇠 점 찍고 옹녀’ ‘귀토’를 선보인 그는 이번 ‘리어’에선 배삼식과 손을 잡았다. 고선웅과 배삼식은 색깔이 다르지만 현재 국내 공연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양대 극작가다. 고선웅이 대중적이고 해학적이라면 배삼식은 관조적이면서 서정적이다. 작창가로서 두 작가와 작업할 때 어떤 차이가 있을까.

“두 작가는 정말 스타일이 달라요. 기본적으로 배 작가의 대본은 텍스트에 윤기가 흐르고 군더더기가 없어요. 창극이 음악극인 만큼 배 작가의 시적인 대사는 노래 만들기가 쉽죠. 이번 ‘리어’에서 함축적이고 심리 표현적인 장면은 노래를 짜기 어려웠지만 기존 창극을 벗어나 새로운 음악적 어법으로 시도해 봤어요. 반면 고 작가는 텍스트가 많고 삐죽삐죽해서 기존 율격으로 작창하기가 쉽지 않아요. 가사도 가벼운 구어체로 쓴 게 많고요. 하지만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고 작가의 파격이 새로운 음악을 만들도록 자극합니다.”

국립창극단은 작창의 중요성에 주목해 올해 작창가를 발굴·육성하는 ‘작창가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공모를 통해 지난 2월 합격자 4명을 선발했다. 그는 안숙선 이자람 배삼식 고선웅과 함께 멘토로 참여해 현장에서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창작 비결을 전수할 계획이다. 그는 “요즘 젊은 소리꾼 중에는 작곡 실력이 있으면서 컴퓨터음악까지 가능한 친구도 있다”면서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작창가의 풀이 넓어질 것 같다”고 말했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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