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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사니] 논리가 소용없는 상황



#1. 지난 7일 밤 온라인을 뜨겁게 달군 기사가 있다. 삭제되기 전까지 불과 20여분 만에 네이버에서만 5만개 가까운 공감과 3000개 넘는 댓글을 받았다. 제목은 ‘그냥 중국이 메달 모두 가져가라고 하자’를 두 번 반복했다. 본문 역시 ‘그냥 개최국 중국이 메달 모두 가져가라고 하자’라는 문장을 10번 반복하며 시작한다. 이날 열린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남자 1000m 준결승에서 대한민국 황대헌과 이준서가 석연찮은 판정으로 실격되고 대신 중국 선수가 결승에 올라갔다는 내용이었다.

실수로 내보낸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하지만 오후 10시17분 기사가 최초 게재되고 5분 후 한 차례 수정됐던 걸 보면 단순 실수 같진 않아 보인다. 이번 해프닝은 뉴욕타임스(NYT)에서 보도했을 정도로 화제가 됐다.

#2. 이 기사를 보며 떠오른 글이 있다. 2017년 7월 28일 김세은 강원대 신문방송학과 교수(2020년 작고)가 한겨레신문에 기고했던 칼럼이다.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깨달았다. (중략) 이들에게는 설명과 논리가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하여 나는 하릴없이 다음과 같이 외친다.” 그리고 김 교수는 그에게 할애된 지면 전체를 “○○○은 물러나라”는 구호로 채웠다. 당시 공영방송을 망치고 있다고 지목된 이들이 대상이었다. 제목은 ‘하릴없이 외친다, 물러나라’.

그때도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사람들은 각종 SNS에 퍼 날랐다. 읽는 시간은 10초에 불과하지만 메시지는 그 어떤 글보다 강력했다, 백 마디 말보다 더 큰 울림을 줬다는 등의 코멘트가 붙었다. 한 대학 교수는 “단순 반복의 형식미가 돋보이고 메시지가 분명하게 전달된다. 이유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으로써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냐고 되묻는 작품”이라며 “2017 올해의 칼럼으로 꼽힐 만하다”고 극찬했다.

#1과 #2에 소개한 글의 형식은 모두 파격이었다. 파격엔 반작용이 뒤따른다. 특히 #1의 기사는 언론이라는 도구를 이용해 개인의 감정을 쏟아냈다는 비판도 크다. 엄밀히 보면 기사가 갖춰야 할 양식을 갖추지 않은 보도 사고에 가깝다고 볼 수도 있다. 기사에 달렸던 베스트 댓글 중 하나가 기자의 징계를 걱정하는 내용이었고, 실제로 해당 언론사는 해프닝이 벌어진 다음 날 기자의 임의적인 온라인 기사 송출을 제한하는 방향으로 출고 원칙을 변경했다.

여기서 문득 든 한 가지 의문. #1과 #2의 글에서 국민을 열광하게 한 건 무엇이었을까. 명료한 팩트를 중심으로 탄탄한 기승전결을 갖춘 수많은 기사를 제쳐두고 독자들은 왜 이 글에 찬사를 퍼부었을까. 김 교수가 당시 인터뷰에서 이런 칼럼을 쓴 이유를 밝힌 적이 있었는데 이게 힌트가 될 수는 있을 것 같다. “설명과 논리가 안 먹히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유려한 문체로 설득하는 글을 써도 전혀 소용이 없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베이징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쇼트트랙 남자 1000m 결승에서 헝가리 선수가 1위로 골인하고도 실격당해 중국에 금메달을 내줬다. 헝가리 스포츠지 넴제티스포츠는 ‘중국인의 승리를 축하하는 심판위원’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베이징올림픽을 ‘블랙 코미디’라고 혹평했다. 스키점프 혼성 단체전에서는 금메달 유력 후보였던 카타리나 알트하우스(독일)를 비롯해 5명이 유니폼 규정 위반으로 무더기 실격 처리됐다. 독일 스키점프 대표팀 감독은 “완전히 미친 짓”이라고 분노했고, 일본 네티즌들도 “올림픽을 정치화하더니 선수들까지 탄압하고 있다”며 항의했다. 편파 판정을 문제 삼는 기사뿐만 아니라 각국 선수단의 이의 제기도 계속되고 있지만 소용이 없다. 오죽하면 ‘눈 뜨고 코 베이징 2022’라는 구호마저 나왔을까.

살다 보면 설명과 논리가 소용없는 경우가 많다. 그런 상황에 맞닥뜨렸을 땐 굳이 논리적 대처가 불필요하다. 독자들이 ‘그냥 중국이 메달 모두 가져가라고 하자’ 기사에 열광한 이유도 이런 이유 때문 아니었을까.

이용상 산업부 기자 sotong203@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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