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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돋을새김] 에너지 전환, 강을 건너다



1941년 12월 7일 오전 7시49분, 하와이 오아후섬 진주만 상공에 전투기들이 나타났다. 허를 찌른 기습에 전함 5척과 항공기 200여대를 잃었고, 2000명가량이 목숨을 빼앗겼다. 이날 공습은 일본과의 충돌, 전쟁을 피하고 싶었던 미국을 태평양전쟁으로 몰아넣었다. 전쟁의 불쏘시개는 석유였다. 산업화를 수행하던 일본은 늘 자원 부족에 시달렸다. 특히 에너지 자원 확보는 생사를 좌우하는 일이었다. 일본은 석유를 모두 수입했고, 미국은 전체 공급량의 80%를 차지했다. 자원과 시장을 얻기 위해 한국 중국으로 마수를 뻗치던 일본은 차츰 인도차이나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보르네오 등의 유전지대는 필수 목표물이었다.

위기를 느낀 미국은 1938년 군수용 물자(철강재, 고철, 구리, 항공유) 수출금지 조처를 내렸다. 진주만 공습 직전인 1941년 7월 26일 미국 내 일본 자산을 동결하고, 그다음 달 1일에 일본으로의 석유 수출금지라는 강수를 던졌다. 전쟁 발발 직후 일본은 동남아시아 유전지대 공략에 속도를 냈다. 하지만 미국의 ‘일본 석유공급선 차단’ 전술이 먹히면서 급속히 패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석유 때문에 불붙은 전쟁은 석유 때문에 막을 내렸다.

역사는 되풀이된다. 80년이 지난 지금도 석유와 천연가스 같은 에너지 자원은 분쟁, 갈등, 전쟁의 도화선이다. 모든 나라에선 분명하게 알고 있다. 에너지 자원이 국가의 생사를 가른다는 걸. 그런데 에너지 자원을 찾고 확보하는 일은 점점 어렵고 비싸지고 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접어들면서 광물자원조차 무기로 자리 잡았다. 세계적 경쟁력을 확보한 한국의 배터리산업은 핵심 원료인 리튬, 코발트, 니켈의 중국산 의존도가 80% 안팎에 이른다. 언제든지 중국이 목줄을 죌 수 있는 셈이다. 또 중국은 최근 희토류 생산 국유기업의 구조조정·통합에 나섰다. 전기차 모터의 핵심 소재인 중(重)희토류 생산을 통제해 세계 시장 장악력을 높이려는 속셈이다.

더 심각한 건 에너지를 둘러싼 국제적 헤게모니 전쟁이다. 전선은 복잡하고 다층적이다. 가장 큰 전선이 화석에너지와 재생에너지 사이에 그어졌다. 여기에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 미래 산업·기술 주도권 다툼이 끼어들었다. 미국과 유럽이 주도하는 탄소중립 정책, 탄소세 도입 등은 새로운 산업의 틀 세우기에 닿아 있다. 중국 한국 일본 등 아시아 지역에 빼앗긴 세계 제조업의 패권을 되찾기 위해 ‘에너지 게임의 규칙’을 바꾸려는 것이다.

자본과 기업 간 전투도 격렬하다. 서구 자본이 거세게 압박하는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은 ‘에너지 세계대전’이라는 큰 그림 안에 있는 하나의 풍경이다. 기후변화, 지속가능한 경제, 지구 살리기는 우리 시대의 다급한 과제임에 틀림없다. 다만 그 안에는 미래 경제·산업 권력을 누가 거머쥐느냐를 두고 펼쳐지는 국가 간 생존 경쟁이 자리한다. 총성은 없지만 어느 전쟁보다 피 튀기는 에너지 세계대전에 한국도 참전했다. 수소를 전략무기로 꺼내 들었다.

우리 정부와 기업들은 거대한 수소 생태계를 꿈꾼다. 태양광, 풍력 등은 전기 생산량이 들쑥날쑥한데, 전기가 남을 때 수소로 저장하고 나중에 수소를 태워 전기를 뽑아내 쓸 수 있다. 그래서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수소를 탄소중립 시대의 ‘에너지 화폐’라고 부른다. 글로벌 수소 시장은 2050년 3000조원(맥킨지 예측) 또는 1경4000조원(골드만삭스 예측)으로 추산한다.

그동안 세계 경제가 기대어 왔던 화석연료 자원은 유한하다. 이미 우리는 에너지 전환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시간으로 진입했다. 생사가 걸린 에너지 전쟁은 분명 위기이지만 부존자원 하나 없는 우리에겐 절호의 기회일 수도 있다.

김찬희 산업부장 ch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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