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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 in 이건희 컬렉션] 붓끝서 춤추며 쏟아지는 사람들… 광주 시민에 바친 헌사

재불화가 고암 이응노는 서예에서 구상화, 추상화로 넘어가며 끊임없이 변신했다. 그랬던 그가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소식을 듣고 서체를 연상시키는 구상으로 돌아가 ‘군상’ 연작을 발표했다. 광주시립미술관에 기증된 군상 연작의 하나인 ‘인간’(140×69㎝, 1986, 종이에 먹). ⓒ이응노 / 프랑스미술저작권협회(ADAGP), 한국미술저작권협회(SACK)


인간을 형상화한 ‘작품’(131×173㎝, 1982, 종이 콜라주). ⓒ이응노 / 프랑스미술저작권협회(ADAGP), 한국미술저작권협회(SACK)


국립현대미술관에 돌아간 ‘문자도’(234×145㎝, 1971, 천에 채색). ⓒ이응노 / 프랑스미술저작권협회(ADAGP), 한국미술저작권협회(SACK)


흰 화선지에 상형문자라도 쓰듯 휘갈긴 붓끝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다. 때론 어깨를 겯고 열을 맞춘 듯, 때론 학처럼 신명 나게 한판 춤이라도 추듯…. 프랑스 파리에서 ‘재불 화가’로 살며 문자추상 등 서구 현대미술의 영향을 받은 추상 작업을 하던 그는 어떻게 구상으로 돌아와 토해내듯 ‘군상’을 그렸을까.

고암 이응노(1904~1989). 그의 화가 인생은 1958년을 기점으로 갈린다. 우리 나이로 55세. 은퇴를 앞두고 슬슬 인생을 정리하는 그 나이에 청년처럼 프랑스로 떠났다. 서화가에서 출발해 동양화가로 살아오던 그는 과거와 단절하고 현대미술의 심장으로 날아감으로써 환골탈태했다. 서구 현대미술의 세례를 받은 콜라주 작품과 문자추상 등은 그렇게 유럽에서 탄생했고 그의 브랜드가 됐다. 정주하기를 거부하고 새로운 미술을 찾아 도전하는 유목민적 용감성이 이응노의 DNA다.

그는 충남 홍성에서 훈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집에서 한문과 사서 등을 배우던 그는 보통학교에 다니다 일제 하 학교 분위기가 싫어 그만뒀다. 농사를 지으며 좋아하는 그림을 독학으로 그렸다. 17세 때 지역 서화가에게 사군자를 배우더니 18세 때 무작정 상경했다. 3대 서화가 중 한 명인 해강 김규진(1868∼1933) 문하로 들어가 대나무 그림의 귀재였던 스승에게 배운 재주로 1924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청죽’으로 입선했다. 31년 조선미전에서는 ‘풍죽’으로 특선과 입선을 또 받았다. 조선총독부가 주관하는 공모전은 화가로 출세하는 코스였다. 그런 조선미전에 거듭 붙었으니 안주할 만했다. 하지만 33세에 일본 도쿄로 유학을 갔다. 도쿄 가와바타미술학교에서 동양화, 도쿄 혼고양화연구소에서 서양화를 배웠다. 해방 후 화숙을 운영하고 홍익대에서 강의도 하던 시기의 작품은 전통 묵화에서 벗어나 사생과 현장체험에 기반을 둔 풍경화로 요약된다. 거리 양색시, 서울공습과 피난 등 시대의 풍속화를 그렸다.

도불 이후 작품 세계가 바뀐다. 처음 콜라주가 나오고 60~70년대 문자추상으로 발전하는 등 국제적인 미술 흐름 속에 안정적으로 착륙했다. 콜라주는 파리 정착 전에 독일을 여행하다가 현대미술 잔치인 카셀 도쿠멘타를 보면서 받은 신선한 충격의 결과물이다. 붓과 물감을 쓰지 않고도 할 수 있는 미술, 캔버스에 비단 솜 양털 등을 재료로 끌어와 붙이는 콜라주는 그렇게 탄생했다. 문자추상은 동양적인 문자의 형상을 취하면서도 이를 추상화했다는 점에서 동서양의 접목이다. 그가 60~70년대 추구한 문자추상은 오래된 비석에 새겨진 글자를 연상시킨다. 그 낡은 돌의 질감, 돌에 새겨진 문자가 오랜 세월 비바람을 견뎌온 모습까지 담아내려 애썼다.

이건희 컬렉션으로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된 ‘문자도’는 1971년 절정기의 대형 작품이다. 한자의 상형문자를 떠올리지만, 문자로서 구체성은 추상화되면서 사라졌다. 개개의 기호·문자형상은 사라지고 대신 각 문자는 서로 연결되도록 짜여 하나의 통일된 구성으로 결합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화면 배치를 통해 역동성을 부여했다. 특히 왼쪽의 붉은 색과 오른쪽 갈색의 색상 대비가 역동성을 강화한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이건희 컬렉션 가운데 문자추상 연작을 포함해 56점(한국화 51점, 판화 4점)을 기증받았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은 “이응노의 문자추상은 조형적으로 ‘결구미’가 있다. 한국 전통건축에서 못을 쓰지 않고 목재와 목재를 짜 맞추는 걸 ‘결구’라 한다. 그처럼 조형성에 자연스러움이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고암은 서예가에서 시작했다. 그 필력 덕분에 그림에 생동감이 있다. 글씨와 그림이 한몸(서화동체)이라는 동양정신을 현대식으로 풀어낸 수작”이라고 강조했다.

그렇게 한국미술의 서구화, 추상화를 밀어붙이던 이응노가 구상으로 돌아온다. 흰 종이에 먹으로 글씨를 쓴 것 같은 ‘인간’ ‘군상’ 연작이다. 서예 같은 구상이다. 이응노는 유럽 생활 초기인 67년 동백림사건(당시 동독의 수도인 동베를린을 거점으로 한 대규모 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2년 반 동안 옥고를 치렀다. 이후 쫓겨가듯 파리로 돌아갔고 77년에는 백건우·윤정희 부부 납치 미수 사건에 연루돼 정권과 불화하며 영영 유럽에서 자가 유폐되는 처지가 됐다. 80년 이역만리 고국에서 들려온 소식이 마음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광주민주화운동이었다.

“내 그림은 추상적인 표현이었으나 80년 5월 광주사태(민주화운동)가 있고 난 뒤로 더 좀 사람들에게 호소되는 구상적인 요소를 그림 속에 가져왔다. 200호의 화면에 수천 명 군중의 움직임을 그려 넣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 그림을 보고 이내 광주를 연상하거나 서울의 학생 데모라 했다. 유럽 사람들은 반핵운동으로 보았지만, 양쪽 모두 나의 심정을 잘 파악해준 것이다.”

이들 연작은 광주 시민에 바치는 헌사인 셈이다. 그는 “광주의 희생자들은 말하자면 승리자들이다. 그들은 영원히 우리 핏속에서 살아 화가 시인을 만들며 예술에 목표를 줬다. 저들 민중의 한가운데 뛰어들어 남은 생을 마감할 생각이다. 매일 매일 군중의 외침을 화면에 옮기고 있다”고 말했다.

국가에 기증한 이건희 컬렉션 중 이응노 작품 11점은 광주시립미술관에 돌아갔다. 광주민주화운동에서 영감을 얻은 ‘인간’ 연작 2점이 포함돼 의미가 깊다. 광주시립미술관은 ‘군상’ 대작도 소장하고 있어 지역미술관으로서 품격이 높아졌다.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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