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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 in 이건희 컬렉션] 조국의 산하 독창적 색채로 그려낸 한국 인상주의 대가

오지호는 프랑스 인상주의를 수용해 한국의 자연을 밝고 명랑하게 표현하며 독창적 회화 세계를 열었다. 광주시립미술관에 기증된 ‘계곡추경’(40.8×53.1㎝, 캔버스에 유채, 1978년). 광주시립미술관 제공


대표작인 ‘남향집’(80×65㎝, 캔버스에 유채, 1939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으로 제작 시기를 둘러싸고 1960년대 제작됐다는 반론이 나오는 등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전남도립미술관에 기증된 ‘복사꽃 있는 풍경’(48.5×60㎝, 캔버스에 유채, 1980년). 전남도립미술관 제공


전남도립미술관에 기증된 ‘잔설’(38.3×53.5㎝, 캔버스에 유채, 1978년). 전남도립미술관 제공


1938년 미술계에 ‘사건’이 일어났다. 일본 유학을 다녀온 두 화가 오지호(1905∼1982)와 김주경(1902∼1981)이 함께 ‘이인화집’(二人畵集)을 낸 것이다. 큼지막하고 꽤 두꺼운 이 화집은 금박으로 장정한 호화판이었다. 화집 자체가 드문 시대였지만, 일제강점기에 식민지 한국인이 컬러 화집을 냈다는 것 자체가 큰 뉴스였다.

오지호는 훗날 화집을 펴낸 이유를 이렇게 술회했다. 조선총독부가 주최하는 조선미술전람회를 거부하며 추구한 민족회화를 보여주고 싶었고, 일본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고급 화집을 냄으로써 한국인의 긍지를 높이려는 카타르시스적 요소가 있었다고.

30대의 피 끓는 식민지 청년 화가 오지호가 화집에서 보여주고자 한 민족회화는 무엇이었을까. 일본에서 배워온 인상주의에서 일본색을 버리고 한국의 자연에 접목하는 것이었다. 그가 파악한 한국의 산과 하늘, 논과 밭을 휘감은 대기는 밝고 명랑했다. 오지호가 조선의 산하가 갖는 특질을 명랑한 자연으로 정의한 것은 일본 지식인 야나기 무네요시가 침투시킨 ‘애조 띤 한국의 미’ 이론에 대한 반발이기도 했다.

오지호는 햇빛을 받아 시시각각 변하는 산하의 풍경을 클로드 모네와 카미유 피사로 등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처럼 색채를 분할해가며 원색의 리드미컬한 붓 터치로 표현했다. 김주경은 인상주의 화가들이 서로를 그렸던 것처럼 사과밭에서 사생하는 오지호를 그림으로 남겼다.

오지호가 누군가. 이름은 몰라도 교과서에 수록된 그의 대표작 ‘남향집’을 기억하는 이는 많다. 햇살이 정면으로 따뜻하게 비치는 시골 초가와 그 뜨락에 누워 자는 삽사리에게 밥 주러 가는 소녀를 그린 작품이다. 따듯하고 정감이 가득해 고향에 대한 근원적 향수를 건드린다. 지붕과 담벼락에 길게 걸쳐있는 고목나무의 보라색 그림자가 인상주의의 냄새를 짙게 뿌리며 화면 전체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한국 인상주의의 효시로 평가받는 이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돼 있고 등록문화재로도 지정됐다.

오지호에게 인상주의는 평생을 추구한 예술정신이었다. ‘한국적 인상주의 화가’로 불린 그의 작품이 이건희 컬렉션에 빠질 리 없다. 전남도립미술관과 광주시립미술관에 각각 5점, 국립현대미술관에 4점이 기증됐다.

오지호는 ‘남도의 간판 화가’로 꼽혔다. 대구에 이인성이 있다면 광주에는 오지호가 있다고 할 정도였다. 그런데도 오지호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데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오지호는 해방 후 잠시 서울에서 활동한 것을 제외하면 40년대 후반 낙향해 조선대 교수로 있으며 창작을 하고 후학을 기른 광주 지역 기반의 작가였다. 전남 고흥 태생의 천경자가 홍익대 교수를 지내며 일찌감치 서울을 무대로 활동한 것과 비교된다.

‘좌익’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닌 것도 이유 중 하나다. 일제강점기 일제에 부역하지 않은 극소수 화가 중 1명이었던 그는 6·25전쟁 때 빨치산으로 활동하다 붙잡혀 포로수용소에 갇혔고 박정희정권 하에선 민족자주통일협의회 임원이었다는 이유로 1년간 수감생활을 했다. 반골이었던 그에겐 우국지사였던 아버지의 피가 흘렀다. 오지호는 전남 화순의 유복한 사대부 집안에서 8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부친 오재영은 대한제국 말기 보성군수를 지냈는데 1919년 고종 인산과 3·1만세 운동을 서울에서 보고 내려온 후 식민지 현실에 대한 울분을 참지 못하고 자결했다.

오지호가 미술에 눈을 뜬 건 서울로 올라와 휘문고보에 입학한 뒤였다. 당시 스타였던 나혜석의 서양화 작품을 본 뒤 미술에 관심을 갖고 일본 도쿄미술학교에 유학했다. 그곳에서 프랑스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은 일본 외광파의 세례를 받지만, 인상주의의 토착화를 추구한다. 당시 한국 화단에선 일본과 다른 ‘조선적인 향토색’을 찾으려는 논의가 활발했다.

화가이자 미술이론가였던 오지호가 파악한 한국의 자연은 어땠을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조선의 대기는 투명청정하다. 이 맑은 대기를 통과하는 광선은 물체의 깊은 속까지 투과한다. 그래서 물체가 표시하는 색채는 물체 표면의 색채만이 아니고 물체의 조직 내부로부터 반사가 합쳐져서 가장 찬란하고 투명한 색조를 발하게 되는 것이다.”

이 대목을 읽다보면 후기 인상주의를 개척한 폴 세잔을 떠올리게 된다. 세잔은 한때 빛이 만들어내는 찰나의 순간을 그리려 한 인상주의에 발을 담갔으나 빠져나왔다. 그 대신에 대상이 가진 불변의 본질을 캐내고자 생트빅트와르 산을 관찰하고 또 관찰하며 독창적인 회화 세계를 열었다.

세잔의 산처럼 오지호의 산도 찬란히 빛나면서 영속적이고 속이 깊어 보인다. 특히 이번에 기증된 70년대 전후 작품들이 그렇다. 꽃피는 봄의 산, 녹음의 여름산, 단풍 든 가을의 산, 눈 내린 겨울의 산 등 한국의 사계를 담은 그의 작품들은 근경과 원경의 차이를 두지 않고 각각의 형태를 명확하게 그린다. 때로 진한 윤곽선도 쓴다.

그는 광주 어디서나 보이는 듬직한 무등산을 즐겨 그려 ‘무등산의 화가’로도 불렸다. 광주에서 벗어나 내장산 삼학도 목포항 등도 화폭에 자주 담았다. 지역에서 활동했지만 낭중지추와 같았던 그의 독창적인 작품세계는 70년대 이후 평단의 주목을 끌 수 밖에 없었다. 사후인 1985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인전도 열렸다. 오지호라는 이름은 로컬이 한국을 대표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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