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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윰노트] 증평과 괴산이 알려준 여행의 방식



청주에서 괴산으로 가는 버스는 몇 시간 후에나 있었다. 터미널 매표소의 시간표는 빼곡했지만 버스들은 코로나19를 이유로 띄엄띄엄 단축 운행되고 있었다. 마냥 기다리려니 시간이 아까워 곧 출발하는 버스가 있는 증평으로 가서, 다시 괴산 가는 버스를 찾기로 했다. 예정에도 없이 생전 처음 가보게 된 충청북도 증평, 증평우체국 앞 버스정류장에는 할머니들이 귀엽게 등을 말고 나란히 앉아 있었다.

괴산 가는 버스 시간을 확인하려고 기웃거리니 한 할머니가 내 옷자락을 슬쩍 잡아당긴다. “여기 좀 앉아봐. 따숴요.” 벤치에 앉으라고 권하며 엉덩이를 옆 할머니 쪽으로 밀착해 내가 앉을 자리를 마련해 주셨다. 버스가 오려면 30분 이상 기다려야 해서 못 이기는 척 앉았는데 정말 따뜻해서 놀랐다. 벤치는 몇 분마다 엉덩이를 들썩여야 할 정도로 뜨끈했다. “와, 너무 따뜻해요. 이런 거 처음 봤어요. 증평 너무 좋은데요”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증평군이 일을 잘햐. 저짝 동네는 이런 거 없다구.” 할머니들이 입을 모았다.

여행의 묘미를 다시 느끼고 있다. 입지도 않을 옷과 읽지도 않을 책들을 차에 싣고 장시간 운전을 해서, 인테리어나 가성비가 괜찮다고 알려진 호텔에 머물며, 맛집에서 식사를 하고 예쁜 카페에서 사진을 찍는 것이 최근 몇 년 동안의 국내 여행이었다. 다들 좋다는 곳에 나도 가서, 똑같은 사진 몇 장 찍어오는 일 같기도 했다. SNS에서 습득한 정보를 여행의 길잡이로 삼는 게 갈수록 시시해졌었다. “괴산에 걸으러 가자”는 친구의 제안이 솔깃했던 이유다. “괴산? 괴산에 뭐가 있는데?”

괴산에는 달천이 있었다. 우리는 ‘산막이옛길’이라는 이름으로 조성된 4㎞ 길이의 산책로를 걸은 후 다시 천을 따라 두어 시간을 더 걸었다. 산막이옛길을 벗어나자 걷는 내내 사람 한 명 볼 수 없었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바람 소리, 수심이 낮은 곳에 자리 잡은 백로들, 조용한 ‘올갱이 마을’을 지나는 발걸음마다 가볍고 즐거웠다. 식당은 택시 기사님께 물었다. 송어회 먹을 곳을 찾는다고 하자 태어나 괴산에서만 줄곧 사셨다는 기사님이 데려다 준 식당은 보석 같은 곳이었다. 송어회도 맛있었지만 올갱이국도 끝내줬고, 디저트라며 주신 수제 복숭아절임은 한 그릇 더 먹고 레시피까지 얻어왔다.

걷기나 하자고, 운동화를 신고 대중교통을 이용해 나선 이례적인 여행이 모처럼 기억에 남는 여행이 됐다. 차가 없었기에 무거운 짐을 들고 다녀야 했고, 숙소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맛있는 커피를 마실 카페도 없었다. 하지만 덕분에 증평의 할머니들과 ‘엉뜨’ 벤치에 앉아볼 수 있었고, 증평만큼이나 낯선 괴산에서 최고의 로컬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관광지가 아닌 평범한 시골의 길을 걸었던 경험은 여행에 흥미를 잃었던 나에게 시기적절한 동기부여가 됐다.

다음 여행지는 포항이었다. 죽도시장 가까운 곳에 숙소를 정하고 저녁에 시장에 갔다가, 파장 시간인데 손님이 쪄달라고 부탁한 홍게를 찾으러 오지 않는다며 한 박스 가득한 양을 3만원에 가져가라는 외침에 바로 응할 수 있었다. 다음 날 구룡포에서는 과메기의 기름진 담백함과 쫄깃한 부드러움을 처음 제대로 알게 됐다. 질기고 비릿해서 좋아하지 않았던 과메기가 이렇게 글을 쓰는 동안에도 생각나는 매력적인 맛이었던 것이다.

국내 여행을 다녀도 로컬의 실상이나 매력을 제대로 느낄 기회는 많지 않았다. 넘치는 정보 속에 나의 고유함을 반영해 여행을 구성하기도 쉽지 않았다. 앞으로는 종종 대중교통을 타고 가서 걷다가 로컬 식당이나 시장에 들르는 여행을 해야겠다. 인터넷이 아니라 현지 사람들로부터 정보를 얻고 우연이 개입될 여지를 만들어두면, 여행은 설레는 모험이 된다. 이미 갔던 곳도 새로운 곳이 된다. 조금 불편하더라도 사색의 시간, 새로운 것들과의 조우, 자유롭다는 실감을 할 수 있는 여행을 시작해야지.

정지연 에이컴퍼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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