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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돋을새김] 이 나라가 국민의 나라라면



설 연휴가 끝나자마자 화끈한 돈세례가 예고돼 있다. 당정은 4월 재·보궐 선거 직전에 4차 재난지원금을 코로나19 타격이 큰 이들에게 선별 지급한다는 방침이다. 당초 전 국민 보편 지급과 선별 지급을 병행한다던 여당은 한발 물러났다. 하지만 ‘선(先)선별, 후(後)전 국민’을 공식화한 데다 여론의 관심을 고려하면 시기만 문제일 뿐 5차 재난지원금도 기정사실로 봐야 한다.

1월 11일부터 지급된 3차 재난지원금이 종료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여당은 불과 한 달 만에 4차 확정, 5차 예고를 한 것이다. 3차(9조3000억원)에 이어 4차는 최소 10조원대, 5차는 1차 전 국민 재난지원금(약 14조원) 수준이 유력하다. 혈세와 국가 빚으로 마련되는 재난지원금이 제대로 된 검증·분석 없이 자식 용돈 주듯이 헤퍼지고 있다. 영화 ‘타짜’에서 나온 “묻고 더블로 가” 수준이다.

이게 다가 아니다. 정세균 국무총리의 “이 나라가 기재부(기획재정부)의 나라냐” 발언이 나온 배경인 자영업자 손실보상도 대기 중이다. 최대 100조원으로 추정된다는 자영업자 손실보상은 입법 문제로 선거 전 지급이 쉽지 않다. 하지만 지급 약속만 해도 큰 효과를 거둔다는 것을 여당이 모를 리 없다. 1차 재난지원금도 당정이 지난해 총선 전에 약속하고 지급은 그 후 이뤄졌지만 결과는 역대급 여당 승리였다. 총선의 쓴맛을 본 야당이 퍼주기 잔치에 딴죽 걸 일도 없다.

대선 주자급이 이런 돈의 힘을 외면하겠나. 현재 후보군 중 지지율 1위인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기본소득’을 아예 트레이드마크로 삼았다. 여당 인사들조차 월 50만원씩 전 국민에게 주려면 연간 예산이 300조원을 훌쩍 넘는다고 혀를 내두르는 제도다.

비판이 거세자 이 지사는 즉답을 피한 채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게 정치”라고 동문서답 식으로 말했다. 10조·100조원의 재원 정책을 내놓은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정 총리는 기본소득을 외치는 이 지사를 향해 “국민에게 큰 부담을 준다” “포퓰리즘”이라고 비난한다. 10조→100조→300조의 판돈 불리기도 놀랍지만 도긴개긴 플레이어들의 언행은 실소만 자아낸다.

공돈은 달콤할지 모르나 한국 경제의 우환이 될 수 있다. 단순히 미래 세대의 부담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당장 자산시장 거품을 키우며 경제의 뇌관으로 작용할 우려가 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지난해 11월 ‘통화 공급 증가의 파급 효과와 코로나19 경제 위기’ 보고서에서 “통화량이 1% 늘면 1년간 집값이 0.9% 상승 효과를 보인다”고 밝혔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시중 통화량(M2)은 지난해 4월부터 8개월 연속 전년 대비 9%대로 증가했다. 부동산 가격 급등이 정책 실패가 아닌 풍부한 유동성 탓이라던 정부·여당이 정작 선거를 앞두곤 돈을 풀지 못해 안달이다. 재원 조달을 위해 정부가 발행하는 국고채 물량이 많아지면 대출금리가 오른다. 서민에게 푼돈 쥐어준 뒤 벼락거지 만들고 가계 부실을 안기는 격이다.

집권층은 압도적인 국회 의석 수, 팬덤 지지층에 힘입어 뭐든지 가능하다고 여기는 것 같다. 그게 아니고선 집값 잡겠다면서 역대급 돈을 퍼붓겠다는 모순된 주장을 거리낌없이 하기 어렵다. 하지만 미국 작가 빌 포셋의 말대로 “흑역사를 만드는 가장 큰 적은 자만심”이다(‘101가지 흑역사로 읽는 세계사’).

“(코로나에 따른) 이런 수준의 재정 지원을 끝없이 할 수 없다. 2023년부터 막대한 빚을 갚아 나가겠다”는 독일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솔직함은 우리 정치인들과 극명히 대비된다. 이 나라가 기재부도, 민주당도 아닌 국민의 나라라고 믿는다면 경제 대책은 고심과 신중을 거듭해야 한다. 거품과 눈속임은 영원하지 않다.

고세욱 경제부장 swko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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