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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김형석 (19) 숭실중 4학년 때 첫 설교… 성인 대상 부흥회 인도

김형석 교수는 연세대 재직 중에도 시간을 쪼개 성경공부를 인도했다. 사진은 연세대 교수 시절 동료 교수와 함께한 김 교수(뒷줄 맨 오른쪽)의 모습. 양구인문학박물관 제공


내가 부흥집회와 성경공부로 교회를 섬긴 건 평양 숭실중학교 4학년 때부터다. 평양역에서 기차를 타고 가 버스로 갈아타고 들어가는 시골인 덕지리의 교회 여름 성경학교에 보조교사로 섬기러 갔는데 주 강사가 불참해 내가 설교자로 나섰다. 열흘 넘게 오전엔 주일학교 어린이에게 말씀을 전하고 오후엔 성인을 대상으로 부흥집회를 했다. ‘앞으로 내 삶은 하나님 뜻을 따라 살리라’는 14살 때의 기도가 처음 이뤄진 순간이었다.

이듬해에도 마우리 선교사의 부탁으로 평양 숭실전문학교 농장 교회의 부흥회를 이끌었다. 그는 시골교회를 찾을 때마다 나를 데려가서 설교를 부탁하곤 했다. “내 서투른 한국말보다는 한국인인 네 설교를 더 좋아한다”는 이유였다.

중앙중학교와 부산의 피란민 시절 이후에도 성경공부 지도 요청은 이어졌다. 1956년 12월 남대문교회에서 대학생을 위한 성경공부를 의뢰해왔다. 참석자의 3분의 2가 외부인으로 채워지자 남대문교회 성경공부반은 1년 뒤 문을 닫았다. 이들 중 교회를 처음 나온 이들이 갈 곳을 잃었다. 덕수교회 찬양연습실을 얻어 성경공부를 계속했다. 그러다 이들의 제안으로 58년 4일간의 공개집회를 열었다. 첫날 저녁부터 덕수교회 예배당이 가득 찼다. 대부분 젊은 대학생이었다. 이튿날엔 2층까지 빈자리가 없었다. 나는 이 일을 평생 잊을 수 없는 은총으로 여기고 있다.

성경공부 참가자 수가 늘면서 덕수교회에 부담을 줄까 봐 집회 장소를 피어선성경학교로 옮겼다. 이후엔 강신명 목사의 제안으로 새문안교회에서 열었다. 그러자 타 교회 성도는 물론이고 천주교 수녀, 구세군 사관도 참석했다. 마음이 무거워진 나는 다시 종로의 YMCA회관과 시사영어학원 순으로 장소를 옮겨 조용히 모임을 가졌다.

30여년 동안 성경공부를 이끌면서 여러 사회적 변화가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당한 뒤 신군부가 등장했다. 전두환이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모든 집회를 금지하는 포고령도 내렸다. 그래도 우리는 모임을 쉬지 않았다. 내가 신군부를 비난할 때는 고초를 겪을까 걱정됐다고 참석자들은 말했다.

교회에서는 무교회주의란 오해도 받았다. 하지만 우리는 조용히 말씀과 기도 시간을 갖는 데만 몰두했다. 성경공부 참석자 중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이들은 성경공부에만 집중했다. 교회를 부정적으로 보진 않았다. 기성 교회를 비판하다가도 성경공부를 하며 교회를 섬기기로 한 이들도 적잖았다.

아내가 중병으로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되면서 성경공부는 중단됐다. 내가 아내와 함께 교회에 동행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94년 6월 몇 사람과 함께 성경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이번엔 여러 명이 모이는 수고를 덜기 위해 성경공부를 녹음한 테이프를 보내주기로 했다. 테이프는 주부, 목사, 교수, 실업인 등 국내 각계각층뿐 아니라 미국 캐나다 중국 등 해외에도 전달됐다. 25년 차가 되는 2019년엔 마지막 성경공부를 이끌었다. 모두 합해 60년이 넘는 세월, 인생의 3분의 2를 성경공부에 바쳤다. 앞으로는 또 다른 주님의 뜻이 있을 것이다.

정리=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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