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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는 시대다] 궁예 ‘관심법’ 지금도 회자… 블록버스터 사극의 기념비

2000년 KBS 1TV에서 방영된 대하사극 ‘태조왕건’은 미국과 북한에서까지 인기를 모으며 고대사를 다룬 사극을 연달아 등장하는 계기가 됐다. 김영철이 연기한 궁예의 관심법은 20년이 지난 현재도 회자될 만큼 파급력이 있었다. KBS 제공


왕건을 연기한 최수종은 이 작품으로 사극 전문 배우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KBS 제공


최수종과 견훤을 연기한 서인석. KBS 제공




‘태조왕건’은 2000년 KBS 1TV에서 방송된 대하사극이다. 장장 2년 동안 200회가 방영된 최장 사극으로, 시청률도 60%를 넘겼다. 당시 사극은 주로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한 궁중암투극이었다. 조선 시대 이전 역사를 다룬 사극은 낯설고 사료가 부족한 데다 대규모 전투 장면이 들어간 사극은 제작비가 많이 들어 찍을 엄두를 내지 못한 탓이다. ‘태조왕건’은 군웅할거를 담은 스펙타클한 액션 사극을 정초한 드라마로 손꼽을 만하다.

‘태조왕건’은 세트를 짓고 부수며, 많은 엑스트라와 말을 동원해서 찍는 블록버스터급 사극으로, 국내는 물론이고 미국이나 북한에서도 인기도 끌었다는 후문이다. 드라마의 성공 이후 ‘해신’ ‘주몽’ ‘대조영’ 등 웅장한 스케일의 고대사 사극들이 잇달아 제작됐다. 이런 대규모 사극의 경향은 이후 ‘태왕사신기’ 등 고증에 구애받지 않거나 아예 판타지 사극으로 나아가는 움직임을 보였다. ‘태조왕건’은 이런 움직임이 나타나기 전 정통사극으로, 역사 왜곡을 최소화하려는 장치를 갖는다. 진지하고 상세한 성우의 내레이션은 사료의 출처를 밝히고 드라마 속 묘사와 실제 역사의 차이점 등을 짚어주는데, 지금 관객의 눈으로 보자면 꽤 고풍스럽다.

‘태조왕건’은 사극 배우 최수종을 만든 드라마이기도 하다. 지금 최수종은 사극의 간판으로 인식되지만, 당시엔 처음 도전하는 사극 연기였다. 우려의 목소리도 높았다. 청춘스타 출신에 오랫동안 예능 프로그램 MC를 맡았던 이미지가 강한 데다 높고 가는 목소리가 사극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의견이 많았다. 하지만 최수종은 안정된 연기와 발성으로 왕건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해냈다. 처음엔 궁예, 견훤 등 걸출한 경쟁자들에 가려 무늬만 주인공이라는 힐난도 나왔지만 ‘조용한 2인자로 서서히 성장해 최후의 승자가 되는 영웅’이라는 왕건의 캐릭터를 각인시켰다. 이런 왕건의 캐릭터는 배우 최수종의 모범생 이미지와 맞아떨어져 상승작용을 일으켰다. ‘태조왕건’의 성공 이후 최수종은 수많은 역사 속 인물들을 도맡아 연기하며 사극 전문배우로 변신했다.

궁예는 어떻게 흑화되었나

“누가 기침 소리를 내었는가?” 지금도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궁예의 토막 영상이다. 이 장면 후 조회 때 기침을 한 신하를 때려죽이는 장면이 이어졌던 걸 생각하면 소름이 쪽 끼친다. ‘관심법’ ‘마구니’ ‘짐은 살아있는 미륵이니라’ 등 수많은 유행어를 낳은 궁예는 전무후무한 카리스마를 뿜는 캐릭터다. 200회 중 궁예가 죽는 120회까지 드라마의 진정한 주인공은 궁예였다고 할 수 있다.

철원성 전투를 앞둔 궁예를 보여주며 출발한 드라마는 약 20회에 걸쳐 그의 출생과 성장기를 보여준다. 궁예는 신라 경문왕의 버려진 서자로 각간 위홍의 군대에 쫓겨 절로 들어온다. 절에서 참선, 무술, 의술 등을 익힌 궁예는 스스로 미륵이라 칭하며 절에서 만난 책사 종간과 함께 속세로 내려온다. 백성들을 위한 평등한 세상을 열겠다고 나선 그는 여느 호족이나 도적의 우두머리들과 달랐다. 물욕이나 성욕 등 사리사욕에 빠져있지 않으며, 백성들을 사랑했는데, 가는 곳마다 식량과 의약품을 나누어주며 민심을 얻었고 투항한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자신의 군대로 삼는 등 성군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드라마는 철원성을 함락한 궁예가 국호를 고려라 하고 미륵 사상을 담은 연설을 하는 장면을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곧 그는 무섭게 ‘흑화’ 돼 간다.

‘미륵의 현신’이라던 지도자가 어떻게 흑화됐는가. 보통의 지도자들은 권력을 잡은 뒤 추구하던 이상을 버리고 세속적 욕망에 물들어 타락한다. 그러나 궁예의 흑화는 도덕적 이상주의 자체에서 온다. 즉 ‘자신만이 옳다는 확신’과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우월감’에 의해 공포정치를 하는 폭군으로 돌변한 것이다. 궁예의 모습은 근본주의 정치철학을 바탕으로 한 혁명세력이 도달하게 되는 곤경을 보여준다.

궁예의 흑화에 가장 지대한 공헌을 한 자가 아지태이다. 그는 궁예의 이상주의에 기름을 붓는다. 대동방국을 만들겠다는 허황한 야망에 사로잡힌 아지태는 북벌을 통해 중원을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지태의 주장에 따라 궁예는 송악에서 철원으로 천도하며 국력을 낭비하고 백성들을 고통에 빠뜨린다. 결국 아지태는 역모로 처형되지만, 그의 유언은 궁예를 돌이킬 수 없는 파멸로 이끈다. 황후 연화에게 의심과 질투를 품은 궁예는 마침내 황후와 자신의 두 아들을 불에 달군 쇠몽둥이로 지져서 죽인다. 이 사건은 광기의 절정을 보여주는 것이자, 많은 이가 궁예에게 등을 돌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궁예는 왕건의 쿠테타와 민심이반으로 제거되는데, 이는 어쩌면 예고된 것이다. 궁예도 막 하산했을 때 기훤의 수하로 들어갔다가, 약탈과 만행을 일삼고 무모한 전투를 명령하는 기훤을 내쫓고 무리의 지도자가 되었는데, 같은 방식으로 내쳐진 것이다.

왕건은 어떻게 최후의 승자가 되었나

왕건은 극 초반 궁예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며 충성하는 2인자의 포지션을 취한다. 송악의 성주인 왕건의 아버지는 궁예에게 송악을 통째로 바친다. 모든 물자를 헐어 송악에 궁궐을 짓게 하고 해상무역으로 닦아놓은 바닷길도 열어 준다.

원래 연화도 왕건의 정혼자였다. 그는 황후가 될만한 자질과 관상을 지닌 사람으로, 정치적인 이해관계에 얽혀 왕건의 여자에서 궁예의 여자가 되었다가 죽는다. 연화는 자신의 사랑을 지키고 스스로 운명을 결정하려는 주체성을 지녔지만, 여성의 교환으로 남성들 사이의 관계가 만들어지는 정략결혼의 사회에서 비운의 주인공이 된다. 궁예에게 충성하느라 자신의 사랑을 포기하는 왕건에게 연화는 “뭐가 그리 무서워 벌벌 떠느냐. 사내들의 사랑은 이런 것이냐?”고 다그치지만, 왕건은 비겁한 남자의 전형인양 몰래 눈물지을 뿐이다.

연화까지 포기하며 은인자중하던 왕건은 어떻게 최후의 승자가 되었을까. 물론 왕건은 황제가 될 운명이라는 예언과 함께 태어난 자이고, 궁예를 몰락으로 이끈 아지태도 “궁예는 나라를 세운 사람이지만, 오랫동안 유지할 사람은 못 된다. 나라를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왕건 당신이다”라며 알아볼 만큼 잠재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왕건은 스물을 갓 넘긴 나이에 총사령관으로 전투에 나서 대승을 거둘 만큼 전투 실력도 뛰어났지만, 그보다 뛰어난 능력은 싸우지 않고 얻는 기술이다. 왕건은 궁예가 창업한 고려의 왕이 되는 것을 넘어 통일의 과정에도 이 기술을 활용한다. 신라의 경순왕과 후백제의 견훤이 왕건에게 투항해오는데, 이는 왕건이 이들에게 신뢰를 얻은 덕분이다.

궁예는 신라를 멸도(멸망해야할 할 도시)라 부르며 경멸했지만, 왕건은 망해가는 신라와 가까이 지내며 도움을 주었다. 견훤이 서라벌을 공격하자, 신라의 경애왕은 고려에 원군을 요청한다. 고려의 원군이 도착하기 전 견훤은 경애왕을 죽이고 왕비를 모욕하고 허수아비 왕 경순왕을 세운다. 하지만 경순왕과 서라벌 사람들은 견훤을 원수로 여기고, 고려를 은인으로 여기게 된다. 결국 경순왕은 고려에 투항하고, 왕건은 경순왕의 서라벌 지배를 인정해준다.

왕건은 또 견훤과 라이벌 관계였지만 서로를 인정하고 의형제를 맺는다. 견훤의 집안은 3대에 걸친 부자간 불화가 점철돼 있다. 견훤과 사이가 틀어진 견훤의 아버지는 왕건의 꾸준하고 극진한 대접에 마음을 연다. 그는 결국 견훤이 아닌 왕건에게 상주를 바치고 귀화한다. 또한 말년에 견훤은 아들 신검의 쿠테타로 권좌에서 쫓겨난다. 일생 아버지와 화해하지 못한 견훤은 유독 아들에게 단호하고 엄격하게 대했는데, 이런 것들이 쌓여 결국 아들이 난을 일으킨 것이다. 왕건은 쫓겨난 견훤의 귀화도 받아들인다. 고려 군복을 입은 견훤이 신검의 군대와 맞서게 되자, 후백제군 대다수는 전투를 포기하고 무기를 내려놓는다. 이렇게 후백제도 쉽게 접수함으로써, 왕건은 싸우지 않고 통일을 이룬다.

‘태조왕건’은 조선 시대 이전 역사를 다룬 전투형 사극의 새 지평을 연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드라마의 성공에는 궁예와 견훤 등 개성 넘치는 캐릭터 열전 속에서 조용히 자기 실력을 쌓으며 민심을 얻어갔던 ‘성장형 영웅’ 왕건에 대한 지지도 한몫하였다. 화합과 관용의 지도력을 20년간 희구하지만, 한국사회는 아직 왕건을 만나지 못했다. 분열과 대립이 극에 달한 난세에서 다시금 곱씹어볼 만한 위인이다.

황진미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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