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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김신웅 (2) 신앙 좋은 어머니의 ‘귀한 아들’로 태어나 사랑 독차지

김신웅 장로(뒷줄 왼쪽 첫 번째)가 부모님(첫째 줄 중앙) 및 3남 3녀 형제들과 함께 찍은 가족사진.


나는 1940년 10월 9일 경북 청도군 화양면에서 태어났다. 3남 3녀 중 장남이어서 태어날 때는 4대 독자였다. 당시 외가에도 외증조할머니와 외할머니, 이모와 누나 모두 여자들뿐이었다. 나는 ‘귀한 아들’로 불리며 절대적인 사랑을 받고 자랐다.

어머니는 나이가 12살이나 많고 가난한 아버지에게 시집을 가면서도 그렇게 좋아하실 수가 없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내가 4살 때쯤 뇌전증 발작을 두어 번 더 겪으신 뒤로 다시는 발병된 적이 없을 정도로 완치됐다.

여덟 살이 되던 해 우리 가족은 경산으로 이사를 했다. 신앙이 좋은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아버지는 38살 젊은 나이에 경산교회 장로가 됐다. 아버지는 정 장로님이란 분의 철공소에서 근무했는데 장로님이 소천하신 뒤 우리는 다시 경주 건천으로 이사를 했다. 무일푼이었던 아버지는 귀한 동업자를 만나 건천제재소를 경영하셨다. 하나님의 은혜로 젊은 나이에 장로가 되고 제재소를 경영하는 사장이 된 것이다.

유년 시절 어머니를 떠올려보면 늘 베풀고 나누는 것을 좋아하셨던 기억이 난다. 여동생이 학교에 갈 때면 매일같이 도시락을 몇 개씩 더 챙겨주셨다. 아프고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여분의 도시락이었다. 어려운 목회자 가정에는 쌀과 땔감을, 가난에 찌든 교인들 가정에는 음식과 물질을 나누며 사랑을 베푸시곤 했다. 오전 예배가 끝나면 오갈 데 없는 교회 청년들을 집으로 초대해 음식을 대접하고 쌀과 김치는 넉넉하게 퍼주셨다.

까까머리 중학교 시절, 아버지는 새벽이면 나를 깨워 기도의 제단을 쌓게 하셨다. 새벽 예배를 마치면 단석산 아래 작은 동산으로 나를 다시 데리고 올라가 또 기도를 시키셨다. 해 뜨는 동쪽을 향해 손을 들고 이렇게 기도하게 하셨다. “햇빛같이 살게 하옵소서. 햇빛같이 살게 하옵소서.”

나는 무산중학교와 경주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대학 진학을 위해 서울 채비를 서두르던 어느 날 아침이었다. 일찍 집을 나서려던 나를 아버지가 부르셨다. “신웅아, 오늘은 출발하지 말고 내일 가거라.” 이유인즉 지난 밤 불길한 꿈을 꾸셨다고 했다.

꿈에서 아버지는 새벽 기도를 하러 갔다. 교회 종이 울려서 종각 밑으로 가는데 갑자기 종 추가 떨어졌다. 달려가 보니 어떤 사람이 머리에 추를 맞고 쓰려져 새카맣게 타서 죽어 있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나였다고 했다.

너무 놀라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데 한참 뒤 새까맣게 탄 피부에 새살이 돋아나며 내가 다시 살아났다고 했다. 아버지는 내가 오늘 출발하면 사고가 날 것 같으니 내일 가라고 하신 것이다. 그 꿈 이야기를 들으며 나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 내 미래의 삶이 곤혹한 인생의 태풍으로 쓰러져 신음하다 다시 살아나는 형국이 되겠구나”라고 말이다.

정리=박효진 기자 imher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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