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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용 목사의 ‘복음 설교’] 과부와 재판장의 비유



이 비유의 대략은 이렇다. 어떤 도시에 불의한 재판관이 있었다. 그곳에 있는 한 과부가 자신의 원수를 갚아 달라고 계속 요청을 하는데 이 재판관이 무시했다. 그러나 과부가 끊임없이 자주 찾아와서 요청하니 재판관이 너무 번거로워서 어쩔 수 없이 들어주었다는 것이 비유의 내용이다.

많은 경우 이 비유의 재판관을 하나님과 대조시켜 ‘내 소원이 있으면 하나님 앞에 지극 정성으로 끊임없이 기도하면 하나님이 감동하여 소원을 들어주실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그러나 이 비유는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나의 끈질김과 정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시며 그 목적을 언급하셨는데, 그것은 내 열심과 정성이 아니었다.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않게 하려고’이다.(1절)

많은 경우 우리가 드리는 기도의 응답이 바로 오지 않을 때가 있다. 이 비유는 그런 날이 오더라도 절대 낙망하지 말고 기도를 쉬지 말라는 게 핵심 내용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침묵’이 있을 때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것에 더 많은 강조가 있다.

그러면 기도 응답이 없을 때 어떻게 하면 낙심하지 않을 수 있는가. 우선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잘 알아야 한다. 우리가 기도할 때 시험이 드는 이유는 하나님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나 한 사람을 위해 자기 아들을 아낌없이 내어 주신 분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고, 그가 내 인생의 주관자라는 것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믿음이 없을 때 기도는 내 열심과 정성만 강조된다. 왜 그것을 앞세우는가. 내 인물됨과 죄성을 너무나 잘 알기에 하나님 앞에 내 노력과 공로를 인정받기 위함이다. 그에 대한 보상으로 내 소원을 이루기 위함이다.

하지만 기도에서 내 소원, 내 정성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이다. 그분과 사귐이다. 이것이 기도의 목적이며 우리가 이뤄가야 할 방향이다. 기도는 내가 얼마나 열심이 있는가를 증명하는 자리가 아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와 쉬며 안식을 누리는 ‘신앙의 태도’이다.

여기서 질문이 하나 생긴다. 기도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의 누림이라면 더 이상 간구할 필요가 없는가 하는 것이다. 아니다. 간구해야 하고 또 많이 해야 한다. 왜냐하면 기도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도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 응답받는 기도는 이것이다. 먼저 관계적인 면에서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자격, 즉 예수를 믿는 믿음을 통한 ‘자녀의 자격’이 우선이다. 그다음으로는 ‘당위성’이다. 나의 요구와 하나님의 뜻이 일치해야 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라고 해서 모든 요구를 들어주지는 않는다. 우리 기도가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내용이어야 한다.

재판관이 ‘나쁜 자’였음에도 과부의 기도를 들어준 것은 그녀가 요구한 내용이 안 들어 줄 수 없는 요구(정당함)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다른 방법이 없다. 잦은 대화를 통해 하나님을 경험해야 한다. 그 대화의 방법이 기도이다. 우리는 일상의 모든 내용을 기도로 하나님과 함께할 때 하나님의 나를 향한 온전한 뜻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항상 기도해야 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신 것이다.(1절)

여기서 정말 중요한 점이 있다. 과부의 기도는 정당했었다. 그런데도 오랫동안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이 과부의 예를 통해 ‘항상 기도해라. 하지만 응답이 늦더라도 낙망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신앙에는 우리의 기대 속도와 하나님 응답의 조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수용 미국 버지니아 한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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