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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 목사의 빛을 따라] 희미한 빛조차 소중하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는 말이 요즘처럼 실감 나는 때가 또 있을까. 입춘 무렵부터 우리를 사로잡은 코로나 블루는 지금까지 지속하고 있고, 50일 넘게 지속한 장마는 쉽게 아물지 않을 상처를 남겼다. 태풍까지 연이어 찾아오고 있다. 농부들의 시름이 깊다. 소상공인을 비롯한 자영업자들은 폐업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다. 전공의들의 파업으로 응급환자들의 마음은 새카맣게 타들어 가고 있다. 모두가 감염병 재확산을 막기 위해 불편을 감수하는 이 시기에 일부 목회자는 정부의 방침을 어기며 대면 예배를 강행하고 있다. 목숨보다도 소중한 예배를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은 비대면 예배는 진정한 예배가 아니라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다. 정말 그러한가.

자신을 감추면서 드러내고, 드러내면서 감추시는 하나님은 아니 계신 곳이 없다. 고대 세계에서 이방 종교의 신들은 장소 귀속적 존재였다. 특정한 장소에 머물며 자기에게 분여된 역할을 수행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야훼 하나님은 온 세상의 주재자인 동시에 백성들이 있는 곳 어디에나 함께 계신 분이다. 우리는 시련과 고통 속에 있는 인간을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믿는다. 하나님은 바벨론 강가에서 울고 있던 포로민들 곁에 머물며 그들의 품이 되어주셨고, 사자 굴 속에 갇힌 다니엘과 함께 머무셨다.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됐지만 예배는 멈춘 적이 없다.

예배의 목표는 만남이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위험을 내포한다. 우리의 안온한 삶을 뒤흔들기 때문이다. 예배는 낯선 세계로 들어서려는 용기이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난다면 더 이상 자기 좋을 대로 살 수 없다. 이웃 사랑으로 귀결되지 않는 예배는 온전한 예배가 아니다. 우리가 목숨을 걸어야 할 예배는 이런 것이다.

로드니 스타크가 쓴 ‘기독교의 발흥’은 초기 기독교가 박해 속에서도 성장한 이유를 사회학적으로 분석한 책이다. ‘역병, 네트워크, 개종’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이 책의 4장은 로마에 닥쳐온 역병을 언급한다.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통치하던 165년경 천연두로 의심되는 역병이 닥쳐와 15년간 지속했고 제국 인구의 4분의 1에서 3분의 1이 사망했다. 251년에는 홍역으로 의심되는 역병으로 제국의 토대가 흔들렸다. 이방 종교들은 역병 앞에서 무력했다.

기독교인들의 상황 또한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이웃 사랑을 실천했다. 병자들을 곁에서 돌보았고 죽은 자들의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치렀다. 기독교인들의 사회적 네트워크가 선행을 장려했던 것이다. 그들은 종교 인종 계급을 넘어 박애를 실천했다. 이것이 이교도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가장 심각한 위기의 시기에 기독교인들의 수가 증가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1세기가 지난 후 율리아누스 황제는 기독교인에 견줄 만한 구제 기구를 설립할 목적으로 캠페인을 벌였는데, 362년 갈라디아의 대사제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비록 가식적이라 해도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에게 속한 가난한 자만 돕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난한 자까지도 돕는다며 그것이 기독교인의 성장 요인이라고 밝힌다. 그러면서 그는 로마인들이 기독교인의 미덕에 뒤처져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오늘의 교회에 대한 세상의 평가는 사뭇 다르다. 참담하고 우울하다. 그러나 세상 곳곳에 희미할망정 작은 불을 밝히는 이들이 있다. 그 희미한 불빛은 어둠에 지친 이들에게 밝은 미래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게 해준다. 시인 정진규 선생은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고 노래했다. 나는 이 시를 별이 도드라지게 드러나기 위해 어둠이 필요하다는 말이 아니라 지극한 어둠 속에서도 자기 자리를 지키며 마땅히 해야 할 도리를 하라는 말로 받아들인다.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단 12:3)

(청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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