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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용 목사의 ‘복음 설교’]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1)



이 비유는 피상적으로 보면 너무 간단하고 쉽다. 비유 내용은 이렇다. 어느 길에 죽어가는 한 사람이 있었다. 레위인, 제사장은 본 척도 안 하고 지나갔는데 착한 사마리아인은 지나치지 않고 그를 극진히 보살펴주고 고쳐 주었다.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너도 그렇게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말고 선행을 베풀고 살아라’라고 말씀하셨다.

많은 경우에 이 비유를 이렇게 해석한다. 그 이유로 ‘선한 사마리아인’이라는 칭호는 착한 일의 대명사처럼 쓰인다. 그러나 이 비유는 우리 기독교인이 세상에서 선한 삶을 살아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 아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하신 대상이 누구인가. 율법학자이다. 즉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며 살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그는 “자기를 옳게 보이기” 위해 예수님에게 “나의 이웃이 누구인가”라고 물었다.(29절)

‘내가 누구를 도와야 합니까’라고 물어서 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나는 도울 의지가 충분히 있는 의로운 사람임을 증명하고 싶어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그의 치부를 거침없이 드러내는 놀라운 말로 그에게 역질문하셨다.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누구인가”라는 것이다.(36절)

왜 이 질문이 놀라운가. 우리는 율법학자가 도와야 할 대상, 그 불쌍한 사람이 당연히 ‘강도 만난 자’로 생각한다. 아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질문하지 않으셨다. 율법학자의 ‘나의 이웃’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라고 되물어서 율법학자를 의미하는 ‘나’에 ‘강도 만난 자’를 대입시켰다.

무슨 뜻인가. 율법학자, 그가 곧 강도 만난 자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율법학자에게 안타까운 마음을 갖고 ‘네가 지금 누구를 돕겠다는 것이냐. 내가 보기에는 네가 지금 당장 도움이 필요한, 구원이 필요한, 치유가 필요한 강도 만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율법학자는 자신을 누구든 도울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의로운 자라 생각했다. 그래서 예수님 앞에서 나는 이런 의로운 삶을 사는 사람이고, 언제든 남을 도울 수 있는 의지를 가진 선한 사람임을 증명하려 했다.

그 의도 앞에 예수님은 ‘네가 착각하는 것이 있다. 너는 네가 스스로 의인으로 여기고 행위가 온전한 사람이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착각하지 마. 너는 너 혼자 스스로 구원할 수도, 일어나 걸어서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는 사람이야’ 라고 그의 정체를 폭로하고 있다.

그는 율법을 연구하는 사람이었다. 사람이 어떻게 의롭게 될 수 있는지 너무나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알고 있는 지식이 그를 구원하지 못했다. 오히려 본인이 자신의 행위로 의롭게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함정에 빠져 있었다.

이것은 비단 율법학자에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을 사는 많은 크리스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늘 자신이 갑의 위치에서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해냄으로써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으려 한다.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하나님께서 내 생명을 주관하여 주시고 도와주시지 않으면 하루도 살 수 없는 사람임을 인지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없기에 예수님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우리 인간들이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며 나의 가장 정확한 정체성이다.

우리는 모두 다 강도 만나 피 흘리고 있는 자임을 기억하자. 우리는 죄와 허물로 인해 죽은 자이다. 이것이 우리의 실존임을 알 때 참 복음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이수용 미국 버지니아 한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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