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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정성진 (10) 대형교회 부교역자 면접… “교회 옆으로 이사 오시죠”

정성진 목사(앞줄 왼쪽 세 번째)가 2019년 11월 24일 경기도 고양 거룩한빛광성교회에서 열린 이임식 후 김창인 목사(앞줄 오른쪽 두 번째)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친구 김호권(현 동부광성교회 담임목사)이 광성교회 부목사로 있었다. 1991년 11월쯤으로 기억한다. 호권이가 나를 찾아왔다.

“성진아. 우리 교회에서 부교역자를 뽑는데 네가 와줬으면 좋겠다. 김창인 목사님께도 귀띔해 뒀다.”

나는 봉천제일교회 전임전도사였다. 교회를 옮길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친구 부탁이니 면접이나 한번 보자는 마음으로 약속된 날 교회에 갔다. 김창인 목사님 앞에 앉았다. 광성교회를 대형교회로 키우신 목사님이셨다. 늘 뵙고 싶었다. 그런데 그분 첫인상이 너무 쌀쌀맞아 놀랐다. 5분쯤 대화했을까.

“정 전도사님. 교회 옆으로 이사 오시죠.”

이 말만 남긴 채 방에서 나가셨다. 이렇게 광성교회와 연을 맺게 됐다. 92년 1월 첫 주 부임했다.

나는 김 목사님의 진면목을 봤다. 거칠게 살았던 사람은 강한 상대를 빨리 알아본다. 센 상대를 만나면 빨리 피하든지 복종하든지 해야 한다. 김 목사님과의 만남이 그랬다.

대단한 카리스마를 가진 분이었다. 목회를 위해 자신을 철저하게 헌신하셨다. 부교역자들도 자신을 따르길 바라셨다. 그 과정에서 무서운 분이라는 소문이 났다.

말씀도 길게 하시지 않으셨다. 무엇보다 맡겨진 일은 완벽하게 해내야 했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늘 혼났던 기억이 난다. 그러면서 나의 혈기는 점차 사라졌다.

당연히 김 목사님께 배울 게 많았다. 그분은 자신의 삶을 통해 나이 어린 후배 목사들에게 목회를 가르치셨다. 나는 순종하는 기쁨도 알게 됐다.

부임하자마자 암사동 교구를 맡았다. 교인들을 심방하는 일이 즐거웠다. 그런데 5개월이나 지났을까. 김 목사님께서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통합 총회 부총회장 선거에 나간다는 말이 돌았다. 어느 날 목사님이 날 불렀다.

“정 목사, 오늘부터 날 좀 도와야겠다. 잘 부탁한다.”

그날부터 나는 그분의 비서가 됐다. 그해 9월 24일 서울 명성교회에서 예장통합 77회 총회가 열렸고 김 목사님은 부총회장에 당선되셨다. 잠깐 비서로 일할 줄 알았지만, 착각이었다. 그때부터 무려 4년 동안 비서로 일했다.

특별 교구도 맡기셨다. 이 교구는 멀리 이사한 교인을 위해 만들어진 교구였다. 강원도 춘천에서 대전까지 교인이 흩어져 있었다. 특히 김 목사님 사모님이 직접 챙기신 정말 특별한 교구였다. 하루가 멀다고 사모님과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심방을 다녔다. 하루 100㎞ 운전하는 게 다반사였다.

늦은 밤 교회로 돌아오면 김 목사님이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그리고는 할 일을 주셨다. 비서로 일하는 동안 하루도 못 쉬었다. 휴가도 딱 한 번 간 기억이 난다. 동료들은 하나둘 담임목회를 나갔다. 나이까지 많았던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김 목사님은 내 거취에 대해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매일 일은 늘었다.

정리=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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