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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예배자 건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눈 건드리는 것



이제라도 멈춰야 한다. 어쩌자고 이러는가. 수많은 사상이 무례하게도 예배를 넘보다 못해 온갖 구실을 들어 아예 예배를 농단하려 달려든다.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예배의 자리에는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예배는 천지를 지으시고 영원히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계신 곳이다. 예배자는 하나님의 초청을 받은 자들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장 예뻐하시고 기뻐하시는 자들이다. 예배자들이 힘든 상황에 있다 해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예배자를 건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눈을 건드리는 것과 같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영광을 위하여 나를 너희를 노략한 여러 나라로 보내셨나니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슥 2:8)

치졸한 사상으로 치장한 자들이 예배에 다가오는 모습은 가소롭다 못해 불쌍하다. 무엇보다 예배는 자본주의자들의 놀이터가 아니다. 자본주의의 이단아(異端兒) 번영신학이 예배에 들어와 난장판을 만든다.

은과 금이 아닌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가진 교회를 은과 금을 좋아하는 시장터로 만들 심사인가. 번영신학과 그 배후의 자본주의에는 자기들이 만든 상품과 자기들을 다스려야 할 은금을 신으로 섬기려는 무서운 덫이 있다.

예배자는 공산주의자들과 근본이 다르다. 예배자들은 하나님을 높이고 공산주의자들은 자아를 높인다. 소외의 근원은 전혀 모르고서 막연히 고통받는 소외상태에서 다시 찾아야 한다는 자아로 이 땅의 유토피아를 꿈꾸는 공산주의가 어찌 위대하신 하나님과 광대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그리고 죄에서 용서받은 하나님의 형상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유물론 공산주의는 유신론의 기독교를 결코 이길 수 없다.

공산주의의 길목 그 곁에 때때로 서 있는 사회주의도 결코 예배를 좌지우지해서는 안 된다. 사회주의자들은 도덕을 붙잡고 헛기침하며 다른 모든 것들을 해석하고 비판한다. 그러나 그들의 도덕은 기준이 없고 제동장치가 전혀 없어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자기들의 시대가 끝나기 전에 필연적으로 부패하게 돼 있다.

상대적인 도덕이 어떻게 절대적인 진리의 상대가 되겠는가. 그러니 사회주의자들이 알량한 도덕으로 하나님의 진리로 가득한 예배를 참견하는 것은 지나가는 소도 웃을 일이다.

로마 황제 네로는 자기의 실정을 감추기 위한 희생양으로 기독교인들을 택했다. 그들은 도망가거나 타협하지 않았다. 굶주린 사자가 달려오는 원형 경기장에서도 끝까지 찬송하며 기도하고 예배를 드리다 죽었다.

아니 죽은 것이 아니라 영원한 피난처이신 하나님 품에 한 명씩 평안히 안겼다. 그리고 그들은 누구도 또 어떤 사상도 침범치 못하는 하늘나라 예배자로 다시 일어났다. 그들을 바라보던 네로는 이런 하늘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시 2:1~4)

(미국 퀸즈장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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