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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된 무용… 춤을 스크린에 맞게 새롭게 안무·연출

코로나19 확산 이후 한국에서도 댄스필름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바체바 무용단의 ‘Home Alone’ 중 한 장면. 바체바무용단 유튜브 캡처


국립현대무용단 신창호 안무가의 댄스필름 ‘비욘드 블랙’ 중 한 장면. 국립현대무용단 제공


김설진 안무가의 ‘볼레로 만들기’ 촬영 현장. 국립현대무용단 제공


어느 허름한 폐건물, 누드톤 의상을 입은 무용가들이 천장에서 바닥으로 천천히 이동한다. 이후 몽환적인 표정을 한 여성 무용가의 주근깨 가득한 얼굴이 클로즈업되면서 분위기가 반전된다. 온몸을 분절하듯 흔드는 여성 무용가를 응시하다 보면 어느새 남성 무용가의 선 굵은 웨이브가 화면에 들어찬다. 2013년 공개된 아디 할핀 감독의 댄스필름 ‘Home Alone’ 일부다. 이 프로젝트는 세계적인 이스라엘 무용단 바체바의 예술감독 타미르 에딩의 제안으로 시작됐다. 13명의 무용가와 할핀은 유기적으로 소통하며 화면에 몸짓을 담았고, 1분43초 분량의 짧은 걸작이 만들어졌다.

댄스필름이란 몸과 춤이 매개가 되는 일종의 단편 영화다. 춤과 영상이 합쳐졌지만 단순한 공연 녹화본이 아니라 춤을 스크린이라는 플랫폼에 맞게 새롭게 안무 및 연출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의 대확산으로 공연장이 문을 닫은 이후 관객의 수요와 창작자의 도전 의지가 맞물려 댄스필름에 대한 관심이 급부상했다. 최근 붐을 이루는 온라인 스트리밍 영상은 기록용 수준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제대로 만들어진 댄스필름 시장이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카메라 앞에 선 무용가들

무용이 대중예술과 여러 형태로 결합하면서 무용가도 무대가 아닌 영화의 주인공이 됐다. 해외에서는 80년 전부터 댄스필름이 하나의 예술 장르로 자리 잡았고 한국 시장도 꾸준히 커지는 추세다.

최근 미국 LA에서 개최된 댄스 카메라 웨스트 필름 페스티벌 등 각국 축제에 초청 받아 댄스필름을 공개한 송주원 안무가는 “현장 공연은 증발하지만 댄스필름은 시간이 저장된다는 점에 매료됐다”며 “몸짓을 시각화하면서 삶에서 흘러나온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막상 무대에 옮겨놓으니 왜곡되거나 과장되는 측면이 있었다. 무대 판타지 탓에 춤에 담긴 의미가 퇴색하지 않도록 보다 사실적인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댄스필름은 다양한 시각에서 접근하는 만큼 뚜렷한 장르 구분도 없다. 영상의 길이도 짧게는 1분에서 길게는 한 시간짜리 장편도 있다. 송 안무가는 주로 실험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제작하지만, 앞서 바체바의 ‘Home Alone’은 영화적 실험을 기반으로 영상 기술을 접목한 스크린 댄스 방식을 활용했다.

해외의 경우 홍콩의 점핑 프레임스 국제 댄스비디오 페스티발, 런던 국제 스크린댄스 페스티발 등 다양한 축제가 열릴 정도로 보편화해 있다. 대학생부터 전문 안무가까지 참여 스펙트럼도 넓다.

국내의 경우 서울무용영화제를 포함해 서울국제뉴미디어페스티발, 서울독립영화제,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등에서 댄스필름이 상영되고 있다. 현대무용단 고블린파티의 ‘나는 도깨비 입니다’, 김병준 감독의 ‘플리커’, 남정호 안무가의 ‘구르는 돌처럼’, 김시헌 감독의 ‘부카니마: 춤’, 이병윤 감독의 ‘유월’, 김보라 안무가의 ‘초기화된 몸’ 등이 대표적이다.

최근 대구시립무용단도 ‘존재: 더 무비’를 시작으로 댄스필름에 첫발을 디뎠고, 얼마 전 인공지능과 신창호 안무가가 만든 국립현대무용단의 ‘비욘드 블랙’도 온라인 상영회를 통해 공개됐다. 당초 ‘비욘드 블랙’은 지난 3월 예술의전당에서 공연하기로 했었지만 감염병 여파로 연기되면서 댄스필름으로 재탄생했다. 곽아람 국립현대무용단 기획팀장은 “댄스필름은 무대 공연과는 완전히 달라 안무 등을 재구성해야 했다”며 “댄스필름은 단순히 무대 공연을 촬영한 영상이 아니라 영상 예술로 구현한 단편 영화”라고 말했다.

댄스필름이 만들어지기까지
김설진 안무가와 댄스필름 ‘볼레로 만들기’ 제작을 함께한 공연기획자 양은혜 스튜디오그레이스 대표는 “댄스필름을 위한 안무와 구성은 무대와는 달라야 한다”며 “영상을 위한 예술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고 말했다.

핵심은 콘티(Continuity)다. 양 대표는 “영화와 마찬가지로 콘티는 안무가와 영상 감독 사이 소통의 도구”라며 “촬영 전 얼마나 치밀하게 장면을 그려 놓느냐에 따라 방향이 달라진다”고 말했다. 콘티를 작성할 때 특히 중요한 요소는 장소다. 공간에 따라 안무와 메시지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안무가는 촬영할 공간이 좁은 골목인지, 복잡한 구조의 건물 내부인지, 창고 같은 넓은 평지인지 등을 고려해 공간의 특성과 안무의 관계성을 고민하는데, 이때 영상 감독과 긴밀하게 소통하는 것이 작품의 질을 높일 수 있는 포인트다.

영상의 길이는 차츰 길어지고 있다. ‘볼레로 만들기’와 ‘비욘드 블랙’은 15분 정도인데, 곽 기획팀장은 “현재 국내 기술로는 긴 호흡의 댄스필름을 제작하기엔 어려움이 있다”면서도 “언제까지 단편에 그칠 수는 없어 전막 공연은 어떻게 구현할지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송 안무가 역시 “45분 이상의 장편 댄스필름을 만들기 위해 여러 시도를 해보고 있다”며 “그러려면 관객과 호흡을 길게 가져갈 수 있는 리듬과 서사가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댄스필름은 무대 공연과는 다른 매력을 선사한다. 객석과 무대가 분리돼 고정된 좌석에서 무용가를 지켜볼 수밖에 없는 환경은 극장의 한계로 꼽혔는데 댄스필름은 카메라 위치에 따라 무용수를 다각도에서 볼 수 있어 감상 폭이 넓다. 양 대표는 “공연은 라이브로 이뤄지지만 영상은 편집할 수 있어 움직임과 공간의 분위기 등을 극대화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무대 공연보다 유통이 쉬운 것도 댄스필름의 또다른 매력이다. 특히나 코로나19로 사람들의 이동이 제한된 상황에서 댄스필름에 대한 관심이 커지는 것이 이 때문이다. 곽 기획팀장은 “댄스필름을 영화관에서 상영할 수도 있고, 넷플릭스 등 OTT나 유튜브에서 감상할 수도 있어 접근성이 높다”고 말했다.

“댄스필름은 코로나19 대안 아닌 새 시장”

최근 코로나19 여파로 대면 공연이 어렵게 되자 댄스필름이 대책으로 회자되지만 전문가들은 이런 접근을 경계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송 안무가는 “어떤 상황에서도 공연의 본질은 현장”이라며 “무대를 지속할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댄스필름은 무용가의 춤을 공유하는 하나의 새로운 시장일 뿐 대면 공연의 대안이 돼서는 안 된다”고 선을 그었다.

양 대표도 “공연은 무대를 근본으로 해야 한다”며 “댄스필름은 완전히 다른 장르이고 무언가의 대안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공연계가 댄스필름에 주목하는 이유는 예술은 계속돼야 한다는 열망 때문”이라며 “댄스필름이라는 새로운 시장과 대면 공연이 상생하는 방향이 바람직하다”고 덧붙였다.

박민지 기자 pmj@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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